금지옥엽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 (1436년 ~ 1473년) 솔새김남식
금지옥엽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일생을 돌아보기 위해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경혜공주 묘를 찾아가 봅니다 필리핀 참전비가 있는 삼거리에서 대자동 중남미문화원 이정표를 따라 들어서면 妄碑가 여러개 나열되어 있다
경혜공주묘의 안내판은 없고 위 지도를 참조하여 위치를 가름하고 농로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 이성군 조선 제9대 성종의 서자로 이름은 관(慣)이다. 숙용 심씨(淑容 沈氏)의 소생 이곳에서 200며미터 올라가면 경혜공주의 사당이 있는데 주인없는 집안은 무척 쓸쓸해 보였다. 예전엔 원혼을 기리는 제사를 했을 것으로 짐작이 되지만 지금은 문도 잠겨있고 잡풀만이 사당을 지키고 있다. 한나라의 왕녀로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그녀의 마지막 안식처는 깊은 산중턱에 홀로이 쓸쓸하게 묻혀 있는데 사당을 지나 조금만 오르면 마을 온동네 개들이 모두 나와서 짖는데 혼자서는 조심하여야 한다 . 경혜공주와 정종의 묘를 알리는 신도비가 산 초입에서 쇠사슬 철망 울타리가 녹슨채 서 있다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경혜공주역을 한 여배우 홍수연양은 촬영전에 묘소를 다녀가며 아쉬움을 표했다 전한다
아무도 지나지않은 인적이 없는 산속에 비석이 있는데 그 비석의 비문을 자세히 읽어보니 '경혜공주와 정종의 제단이 마련되고 신도비를 세우게 되었다는 당시 계유정난의 내용을 기록하고 비통한 마음이 금할길 없다는 내용이 쓰여저 있었다' 신도비에서 좀 으시한 산 길을 깊숙히 10여분 더 올라서면 깊은 산속에 경혜공주 묘가 홀연이 나타난다 남자도 아닌 꽃다운 공주의 묘가 이런 산 속에 혼자 있다니 측은한 생각이 든다 1470년 그 당시는 매우 한적한 곳이었을 이곳에 왜 묘를 썼을까 그냥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옆에 작은 묘는 남편 정종의 제단으로 단은 원래 시신이 없을때 혹은 묘를 잃어 버렸을때 세우는 일종의 제단이다. 그의 남편 정종은 세조때 단종 복위로 능지처참의 거열형벌로 시신을 찾을길 없어 가묘를 했다고 한다. 거열(車裂)형은 오마분시(五馬分屍)라고 해서 죄인의 사지와 머리를 말이나 소에 묶고 각 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사지를 찢는 형벌로 옛날 사람들은 정말 殘忍하게 벌을 행했다 부부 합장묘가 아니라 공주 혼자 단독 묘와 대신 묘옆에 남편 정종을 기리는 비석이 다른 묘와 특이하다 조선국 경혜공주 지묘라는 비석은 6.25총탄에 의거 망가져서 얼룩저 있었다 정종의 묘는 지금의 서초동 법원 검찰청 자리에 있었다는데 정확하게 언제 어디로 이장을 했는지 알 수 없으며 세조의 잔당들이 역적의 묘라고 하여 시신을 없애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후 200년이 지난 정조때 경혜공주 작호를 복권하면서 그 사실을 알고는 공주묘 옆에 정종의 제단을 만들어주 했다고 한다. 특히 정종의 아버지 참판 정충경 묘 또한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는데 지금껏 알 수 없어서 답답 하던 중 최근에 여주에 舌端을 설치했다고 한다 경혜공주 경혜공주 이름이 그 당시로는 고운 이름으로 문종이 얼마나 이뻐했는지 시집 보내기 싫어서 결혼도 늦은나이 16살에 형조참판 정충경의 아들 정종과 결혼 하는데 단종이 즉위한지 1년만에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경혜공주와 단종 남매를 키워주던 세종대왕의 후궁 혜빈양씨까지 유배를 당하게 되고 남편 정종도 이 사건에 연류되어 유배를 가게 된다. 경혜공주는 병석에 누워 시위를 하자 힘이 없는 단종이었지만 누이를 위해 세조(수양대군)에게 간청하여 정종은 잠시 한양에 돌아 오기도 하는데 그러나 다시 반정에 연류되어서 또 유배를 가는 길에 이번에는 경혜공주도 함께 따라가게 된다. 유배지에서 단종복위에 계속 연루되어 결국 능지처참형의 죽음을 당하고 경혜공주는 순천부의 관비로 전락하는 극귀(極貴)의 신분에서 천민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정종의 유배지로 따라 갈때 경혜공주의 뱃속에 있던 아이가 바로 유복자 정미수이다. 유배지에서 아이를 낳자 세조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세조의 손자(성종)와 같이 어울려 같이 노는데 어느날 우연히 그 모습을 본 세조가 "저 계집 아이는 계집 아이 같지가 않다" 고 하자 할수 없이 정희왕후가 실토를 하자 세조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미수(眉壽)"라는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남편의 육신을 능지처첨으로 찢어서 죽인 숙부 정종의 시신도 찾지 못한 경혜공주는 아무래도 평생 숙부에 대한 홧병이 쌓였을 것 같다. .
어쨌든 정미수는 정희왕후의 비호로 목숨을 건지고 끈질기게 살아 남아 문종의 외손자 신분으로 성종이 형조정랑이라는 벼슬을 주는데 당연히 대신들이 정미수에 대한 공격은 끊이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성종이 바람막이를 했다고 한다.
정국공신에 임명되고 부원군의 자리에 까지 오르는데 정미수가 쿠테타로 권력을 쥐게 되는 것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겠다 경혜공주와 남편 정종의 결혼생활은 짧고 비극적인 결말이었지만 아들은 잘 풀려서 다행이고 또한 정미수(아래내용참조)는 단종비 정순왕후(외숙모에게 양자가 되는격)의 양자가 되어 노후를 모셨고 제사를 봉향 했으며 정순왕후의 묘가 있는 사릉에 정미수의 묘가 있다 왕녀로서 평탄할 것만 같았던 경혜공주의 삶은 세조의 왕위 찬탈로 뒤틀리기 시작하여 쓸쓸한 일생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그해 여름이 깊어가는 9월초 다시 경혜공주를 방문 했을때는 풀이 웃자라고 있었다
경혜공주 남편 정종역을 한 이민우 지아비였던 정종이 역시 비운의 운명으로 부마가 되고 부마가 된 덕분에 능지처참이라는 형을 받고 비참하게 죽게 되는데 그 위치에서는 단종에 복위에 관하여 벗어 날 수가 없었다. 특히 비운의 아내 경혜공주를 지키려 무척 노력을 했던 의리파 남자였다는 것을 드라마에서 짐작케 한다.
정미수 정순왕후가 1521년 후사없이 승하하자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어 결국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시가(媤家) 해주정씨 선산에 모시게 돤다. 1698년 왕위가 복위되어 왕릉을 조성하려 하자 숙종실록 1698년(숙종 24) 11월 29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옛 무덤들을 파서 옮기지 않은 예에 따라 특별히 그대로 두도록 숙종 임금이 허락하시더라 한다' 는 기록이 있다. 경혜공주의 아들 사릉에 있는 정미수묘 정미수 1456(세조 2)~1512(중종 7)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기수(耆叟), 호는 우재(愚齋) 시호는 소평(昭平) 아버지는 형조참판 종(悰)이고 어머니는 경혜공주(敬惠公主)이다. 죄인의 자식으로 관리가 되었다해서 여러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성종의 도움으로 무사했다. 그뒤 사헌부장령· 충청도 관찰사· 도승지· 공조참판. 한성부판윤을 지냈으며 1504년(연산군 10)의정부 참찬 겸 판의금 부사를 지냈다. 1506년(중종 1) 우찬성으로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고 1507년 박경(朴耕)의 옥사에 연루되어 경상도 울진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숙모전 충남 공주 동학사 경내에 위치하며, 단종과 단종 복위에 가담한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경혜공주 남편 정종(鄭悰)의 위패도 안치되어 있으며 영월 단종 릉에도 정종의 위패가 있다 조선전기에 단종의 영혼과 세조에게 항거한 충신 열사의 혼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우로 동학사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숙모전은 1456년(세조 2)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의 시신을 신라, 고려, 조선조에 이르는 충의절신을 모신 곳으로 무려 349위의 충혼이 모셔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