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에서 제일 불행한 왕비 솔새김남식
1. 정순왕후 송씨(1440 ~ 1521년 82세) (단종, 사릉)
여량부원군 송현수(礪良府院君 宋玹壽)의 딸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김종서의 사후 1454년에 간택령에 따라 왕비교서를 받고 즉위하였다.
남편 단종이 강등되면서 군부인(君夫人)으로 격하되었다가 관비가 되었다
이후 남편 노산군의 명복을 빌다가 사망하였으며, 그녀의 능의 소나무는 동쪽 방향으로 굽는다는 전설이 있어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중종 때부터 복위가 거론되다가 송시열, 김수항의 거듭된 건의로
1698년(숙종 24년)에 단종과 함께 복위되어 왕후로 추봉되었다.
세종의 왕자 영응대군의 부인 대방군부인 송씨는 그녀의 고모이자 시숙모이다.
2. 단경왕후 신씨 (1487 ~ 1557년 71세 )(명종 12년) 12월 27일(중종 온릉)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1499년(연산군 5년) 13살의 나이에 당시 진성대군에 봉해져 있던 중종과 결혼하여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면서 남편(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왕비가 되었다.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인 데다가 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관계로 반정세력에 의해 7일 만에 폐위되었다.
그녀가 폐위된 후 새로이 중종의 왕비가 된 장경왕후가 1515년 사망하자
담양 부사 등이 그녀의 복위를 간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복위를 반대하는 중신들에 의해 복위되지 못하였다.
훗날 단경왕후의 복위를 간한 사람들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폐위된 이후 중종기에 그녀의 처우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어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인종이 즉위하여 그녀가 거처하는 곳에 폐비궁(廢妃宮)이라는 이름을 주고 생활에 보조를 하기 시작했다.
1557년(명종 12년) 사망하자 왕후(王后) 시부모의 예(例)에 따라 이등례(二等禮)로 초상을 치렀다.
그녀는 계속해서 시호도 없이 폐비 신씨 혹은 신비(愼妃)라고 불리다가
영조 때인 김태남 등의 건의로 왕후(王后)로 복위되었다. 이때
그녀의 아버지는 익창 부원군(益昌府院君), 적모 권씨는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친어머니 한씨는 청원부부인(淸原府夫人)으로 격상되었다.
그때 단경(端敬)이라는 시호와 함께 공소순열(恭昭順烈)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3. 폐비윤씨 (1445 ~ 1482 년 38세) (성종. 서삼릉)
성종과의 슬하에 세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장남과 셋째 아들은 조졸하였다
차남은 조선 10대 왕 연산군이고 본관은 함안(咸安)
신숙주는 윤씨의 외당숙이며, 명종 때의 권신 이량은 윤씨의 오빠 윤구의 손녀사위이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의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王妃)로 책봉되었으나
남편 용안에 상처를 내어 폐비(廢妃)되어 사사되었다.
아들 연산군 즉위 후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삭탈되면서 죽을 당시의 폐서인
신분으로 돌아갔다.
남편 성종의 후궁들 문제로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와 고부갈등으로 유명하며
사사 당시 윤씨는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세자가 자라서 왕이되거든 피를 토한 금삼을 넘겨줄 것을 유언했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도화선이 된다.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가 되는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왕비(王妃)의 작호를 추숭시켰다.
그러나 중종 반정이 일어난 후 왕후(王后)의 호는 삭탈되었다.
4. 장렬왕후 조씨 (1624 ~ 1688 65세) (인조. 휘릉 구리)
1635년에 승하한 인렬왕후의 뒤를 이어 1638년 인조의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슬하에 아들을 두지 못하였고
남편인 인조와 사이가 좋지 못하여 1645년 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649년에 인조가 승하하자 대비가 되었으며 이후 자의(慈懿)의 존호가 추상되어 자의왕대비(慈懿王大妃)가 되었다.
이후 의붓아들인 효종이 승하한 1659년과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한 1674년에
대비인 장렬왕후의 상복(喪服) 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간의 2차례의 예송논쟁이 있었는데
이 논쟁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당쟁으로 기록된다.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자 대왕대비가 되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쓸쓸한 여생을 보냈으며
증손자인 숙종 때인 1688년 창경궁 내반원에서 6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능(陵)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東九陵)내에 위치한 휘릉(徽陵)이다.
5. 폐비류씨 (1576 ~ 1623 48세 ) (광해군, 남양주 진건)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의 왕비(王妃)이다.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이라고도 한다.
류자신(柳自新)의 딸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1576년 판윤 류자신(柳自新)의 딸로 태어나 1587년(선조 20년) 때 선조의 차남 광해군의 아내로 간택되어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으로 봉해졌다.
그 뒤 광해군이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자 왕세자빈(王世子嬪)이 되었으며
그 후 광해군이 34세로 즉위하자 왕비(王妃)로 책봉되었다.
1623년 음력 3월 12일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 반정을 일으켜 왕으로 즉위하면서
유씨도 남편 광해군과 함께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 해 6월 아들 폐세자 질과 며느리 박씨가 탈출기도 실패 후 자결하였고, 결국 그해 10월 유씨도
폐위된 지 7개월여 만에 화병으로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경기도 양주 적성에 장사지냈으며, 폐비인 까닭에 능은 조성되지 않았다.
6. 인현왕후 구씨 (1667 ~ 1701년 34세) (숙종 명릉 서삼릉)
본관은 여흥(驪興)으로, 여양부원군 민유중과 은성부부인 송씨(송준길의 딸)의 차녀(次女)
1681년에 외조부 송준길의 친척 아우인 송시열의 후견으로 갓 왕비를 잃은 숙종의 계비(繼妃)가 되었으나
1689년 기사환국의 여파로 폐위되었다
이후 한 달 뒤에 서인의 상징 인물인 송시열도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5년 후 1694년 갑술환국의 여파로 왕비(王妃)로 복위했다
1700년 하반신이 부풀어 오르는 괴질이 발병해 신체가 썩어 들어가는 고통 아래 투병하다가
1701년 음력 8월 14일에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사망했다.
이 여파로 무고의 옥과 신사환국이 발생하여 그녀의 오랜 연적(戀敵)이었던 희빈 장씨가 자진했으며
가문의 정적(政敵)인 남인·소론이 큰 화를 입었다.
무덤은 서오릉 중 하나인 명릉(明陵)
7. 인목왕후 김씨 (1584 ~ 1632년 49세) (선조. 목릉구리)
연안 김씨 김제남(金悌男)과 광주 노씨의 딸로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 사망한 뒤
1602년에 왕비로 간택되어 19세의 나이로 51세의 선조와 가례를 올렸다.
1603년 정명공주(貞明公主)를,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고 대북(大北)이 집권하였는데, 이들은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賜死)하고 이어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하였다.
인목왕후 역시 폐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선조와 의인왕후와 함께 경기도 구리시의 목릉(穆陵)에 묻혀 있다.
인목왕후의 서궁 유폐 생활은 그녀의 궁녀로 추정되는 작가가 쓴 《계축일기(癸丑日記)》에 전해진다.
금강산 유점사에 인목왕후가 친필로 쓴 《보문경》일부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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