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려조선

고려의 건국역사

시인김남식 2015. 1. 4. 17:22

고려의 건국역사   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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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신라말 왕건이 세운 왕조이다.

왕건은 태봉의 왕인 궁예의 부하로 있다가 호족세력을 배경으로 918년 포악한 왕인 궁예를 추방하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하였다.왕건은 처음 철원에서 즉위하고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다음 ,호족세력 통합정책, 북진 정책, 숭불정책(불교를 숭상)을 펴서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935년에신라를 병합하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격파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성취했다.

 

태조 때는 호족세력 통합의 방도로 호족과의 정략 결혼이 성행하게 되자 종실세력이 대립하여 왕실의 약화를 가져왔으나 제 4대 광종은 노비 안검법,과거제도,공복제도등을 실시하여 왕권강화에 힘썼으며 제 5대 경종은 전시과라 하여 새로운 토지제도를 마련하여 관리들의 생활안정을 도모 하였다.또 제 6대 성종은 새로운 사회 질서를 위하여 유교적 정치 사상에 입각한 2성 6부의 중앙관제를 마련하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등 중앙집권체제 강화에 힘썼고 제 11대 문종은 율령 , 관제, 병제등을 완비하여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완성하였다.

 

 

[고려의 건국 설화]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몽녀 한씨와 결혼하여 송악산 남쪽 기슭에 살림을 차렸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선(신라말 도참사상으로 유명했던 승려)이 그들을 찾아왔다. 도선은 왕륭의 집앞을 지나며,
"어허, 기장을 심을 터에 어찌 삼을 심었는가?"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왕륭의 아내는 급히 남편에게 달려가 이 말을 전했고 왕륭은 급히 도선을 쫓아갔다. 도선은 왕륭이 쫓아오자 그에게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천지의 대수에 부합하여 내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이를
얻을 것입니다.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왕건이라고 하십시오"라고 말하며 봉투를 만들어 겉에 '삼가 글을 받들어 백 번 절하면서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주인 대원군자를 당신에게 드리노라 '라고 써 주었다. 왕륭은 도선이 주는 봉투를 받아 백번절하고 그가 시킨 대로 집을 젓고 살았더니 그들부터 아내에게 태기가 있었고 열달뒤에 아이를 낳으니 그때가 877년 1월 이었고 그 아이가 바로 고려 태조 왕건이었다.

 

 

[고려의 통일 과정]

 

왕건이 청년으로 성장한 900년 전후의 한반도는 극도의 혼란기 였으며, 신라의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졌고 재정이 바닥나 백성들에게 무리한 세금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자 농민들이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고 , 이 지경까지 이르자 이렇게 되자 신라는 더 이상 통치권을 유지할 수 없었고 이런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나라를 세운 이가 바로 견훤과 궁예였다.

 

견훤은 그의 아버지가 농민이었는데 장군이 되었고 견훤은 그의 아들로서 역시 무예가 출중해서 무장이 되었다고 한다. 견훤은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892년 5000명의 병사로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점령하여 왕을 칭하고 전라도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국호를 후백제라 정하고 도읍을 완산주(지금의 전주)로 정하였다.

 

한편, 궁예는 신라의 왕족출신이다. 정권경쟁에서 밀려나서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가 나라가 혼란스 러워지자 환속하여 기훤, 양길등의 밑에서 일하다 독자세력을 형성하여 철원을 기점으로 하여 세력을 키웠다. 이때 왕건 부자가 궁예의 밑으로 들어오고 왕건 부자의 합류로 세력이 커진 궁예는 송악에 거점을 잡고 901년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여 나라를 세웠다. 그 후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905년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으며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후삼국은 성립된다.

 

왕건은 궁예 밑에 있으면서 나주 공략등 많은 공을 세워 태봉 의 제 2인자로 떠오르게 된다. 왕건의 지위가 높아지자 자연스럽게 그를 시기하는 세력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왕건은 위기감을 느끼고 궁예에게 변방으로 보내줄 것을 청한다. 궁예는 이를 허락했으나 왕건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자 위협을 가하려고 그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소환하게 되지만 왕건을 죽이지는 않고 그냥 두는데 그 후 궁예는 점점 더 포악한 왕이 되어 왕자와 왕비를 모두 죽이고 충성스러운 신하들까지도 역모죄를 씌워 죽이는 등 광적인 행동을 한다. 이에 궁예를 따르던 용맹스러운 신하들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해 새로운 왕으로 모셨다. 왕건은 새나라의 이름을 '고려'라 바꾸고 연호를 '천수'라 정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운 후 고려 내에서는 그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는 무리가 생겨나게 된다. 대표 적인 인물이 마군장군 환선길과 청주출신 임춘길, 배총규, 강길아차, 경종, 옹주(공주)성주 이흔암 등이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복지겸과 신숭겸의 활약으로 역모를 성공시키지 못했다. 이런 사건들 이후 왕건은 자신의 지지기반이 있는 송악으로 도성을 옮겼으나, 이러한 노력에도 왕건의 고려는 내부적으로 결집력이 매우 약한 상태였다. 왕건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족들과 결혼을 통한 인척관계를 맺게 됐지만, 이 결혼정책이 오히려 후에 왕건이 죽은 후 외척들간의 왕권다툼으로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왕건의 첩은 무려 29명, 거기에서 낳은 자식이 25남 9녀이다.

 

한편 후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견훤도 호전적인 궁예보다는 왕건이 상대하기 편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방면에서 고려와 교류를 추진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자신을 한반도지역의 맹주로 인식시키려 했고, 신라도 왕건에게 호의를 보였다. 신라장수출신이었던 까닭에 역적으로 인식하고있던 견훤보다는 호족출신인 왕건을 더 믿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가 2년동안 지속된다. 그런데 920년 견훤이 신라지역인 합천을 침범해 서 이런 평화는 깨어져 버리고 만다. 합천이 무너지자 위협을 느낀 경상북부 지역호족들이 고려에 차례로 투항하기 시작하였고, 고려는 후백제의 신라 침공에 불쾌함을 느끼고 925년 조물성(경상 북부)싸움을 시작으로 후백제 견제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이 전쟁이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자 두나라는 화의를 맺고 서로 인질을 교환했는데 그런데 이듬해 고려로 갔던 후백제의 인질이 죽자 견훤은 그 인질을 고려가 독살한 것으로 여기고 공주성을 기습한다. 이로써 고려와 후백제간의 본격적 통일 전쟁이 시작되었고, 신라는 고려를 응원해서 전쟁에 막 돌입했을 때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이 고려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왕건은 그들을 같은 민족이라 여기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한편 927년 9월 견훤이 경상 북부공략중 갑자기 경주를 기습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견훤은 경주를 장악하고 경애왕을 비롯 많은 왕족을 죽이고 김부를 신라왕에 앉힙니다. 이 김부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다. 이로써 신라는 더욱 고려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신라의 원병 요청을 받은 고려군은 경주가 함락된 후에 도착 후백제군과 팔공산에서 일대 격전을 벌이지만 대패하고 만다. 이 싸움으로 고려는 열세에 놓이게되지만 견훤은 오히려 경상도 주민의 원성을 사게되어 더 많은 적을 양산하는 결과를 빚게 된다. 견훤 병사들의 노략질에 분노를 느낀 경상북부일대의 호족들이 고려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이 후 고려는 병산군 싸움을 계기로 전세를 역전시킨다. 이 싸움 이후 힘이 약화된 후백제는 애를 쓰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때 왕건이 경주를 방문하였고, 신라의 고려에 대한 신뢰도가 더욱 높아져 많은 호족들이 고려에 투항했다.

 

고려가 이처럼 국력을 신장시키고 있을 때 후백제에서는 내분이 일어났다. 바로 견훤의 아들들이 후계자 선정을 싸고 싸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 내분의 결과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되고 장남 신검이 금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견훤은 그 해 6월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한다. 왕건은 견훤을 후히 대접하고 그것을 본 신라 경순왕도 그 해11월 고려에 항복한다. 이렇게 되자 왕건은 통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936년 9월 8만 7천의 군사로 신검을 응징 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처음 접한곳은 일선(선산)이었다. 이곳에서 신검은 대패하고 완산주로 퇴각한다. 하지만 열세를 느낀 신검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왕건은 완산주에서 정식으로 신검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마침내 민족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된다.

 

신라의 통일이 외세를 빌어 이룬 것이라면 고려의 통일은 민족 대화합적 차원의 자주적 민족통일 이었다. 고려의 통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은 다시 한번 단일 국가에서 우리의 문화를 꽃피 울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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