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書/추억일기

1972년 7월15일 토요일

시인김남식 2008. 2. 11. 19:49

옛날일기  




1972년 7월15일 토요일

학교 다닐 때도 그랬고 서울 와서도 그랬지만 늘 편지 쓰기를 좋아 했다. 구로동에서 소개받은 어떤 아가씨에게 지금 편지를 쓰고 있다. 서울생활 하면서 일요일 같이 다닐 수 있는 친구가 필요 했었다. “낮과 밤이 서로의 얼굴을 모르듯이 미지의 소녀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라고 쓰는 penpal 문장 실력은 누가 봐도 마음에 들었다.

 

8월05일 토요일

그녀에게 편지가 왔다. 여러번 읽어도 기분이 날아 갈 것 같다. 그리고 내 삶이 풍요로워 질 것 같았다. 세상이 고요한 이 밤에 나혼자 조용히 읽는다. <읽어 주세요> 고요한 이밤 끝없이 어둠이 흐르는 밤입니다. 알고 지낸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합니다. 타향에서 이렇게 고생을 해도 서로 아껴주는 사람이 있다면 오죽 좋을까요. 항상 몸조심 하세요. 객지에서는 건강이 최고 이지요 쓸줄 모르는 편지를 쓰고 있노라니 혹시 흉을 보지 않나 걱정 입니다. 옆에서 친구가 장난하고 있어요 그래서 글씨가 엉망 입니다. 미안해요. 

 

8월20일 일요일

아침에 낙균이 그리고 현균이를 만나서 남산으로 놀러갔다. 오랜만에 시내를 내려다 보니 맑고 깨끗했다. 남산에서 명동으로 내려 와 점심을 먹고 고향 친구들이 양복점 하고 있는 곳에 잠시 들렸다. 그런데 문득 구로동에 있는 사람이 생각이 났다. 편지만 주고 받았던 사람으로 한번도 만나 보지를 못했다. 오늘은 그를 만나야 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니 꼭 가봐야 했다. 약속이 있다고 하며 친구들과 청계천에서 헤어졌다. 그리고 구로동 가는 뻐쓰를 탔다. 일요일 인데도 차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엊그제는 구로동 갔다가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서 왔다. 외출 나왔다가 회사에 들어가는 아가씨들에게 면회를 부탁 했으나 만나지도 못했다. 더구나 억수같이 퍼붓는 소낙기를 맞으면서 기다렸건만 만나지도 못하고 밤 늦게 허탈한 기분으로 돌아왔다. 오후 5시에 구로동 STC, 서울통상(주)앞 뻐스 정류장에 내렸다. 8월의 더위는 훈끈거리고 있다. 몇번의 편지를 왕래 했지만 아직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공장으로 들어 가려고 하는 어떤 아가씨를 붙잡고 면회를 신청하였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 중에서 혹시 내가 찾는 사람이 있는지 두 눈을 크게 뜨고 찾아 봤으나 보이지 않는다. 저녁 해가 서산으로 넘어 가고 있었다. 서울통상 아가씨를 면회는 수위 아저씨가 잘 해 주지 않았다. 아마 귀찮아서 그런것 같았다. 그래서 공장을 들락 거리는 인편에 면회 신청하는 편이 월씬 편하고 빨랐다. 벌써 시간은 6시를 지나 7시로 넘어가고 있다. 공장앞 빈터 언덕배기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애경유지 공장에서 까만 연기가 피여 오르고 사람들은 어디론가 부지런히 들락거리고 있었다. 한참 후 저 멀리에서 걸어 오는 반가운 사람이 보였다.

“오래 기다렸어?”

“응, 한참 전에 면회를 신청 했는데 지금 나오면 어떻게”

“미안해, 그렇게 됐어. 저기 있는 삼영다방에서 기다려. 금방 나갈게”

다방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첫 만남이라 조금은 긴장 되었지만, 시원한 보리차 한잔으로 우선 긴장을 풀었다. 다방 아가씨는 내게 와서 아는 척 하려는 것을 만날 사람이 있다고 했더니 아쉬운 듯, 자리로 돌아갔다. 지금 구로동 삼영다방에서 경숙이를 기다리고 있다. 얼마후 그녀가 다방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조금은 긴장 했지만 자신있게 일어섰다. 누나는 두사람에게 인사 소개를 하였다.

“서로 인사해”

“앉으세요”

우선 첫 인상이 마음에 들었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수줍은 모습이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편지로 실례 많았지요.”

“안녕 하세유”

촌스런 사투리가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편지속에서 보낸 사진얼굴을 이미 익혀기에 그리 낯 설지는 않았다. 그냥 수줍게 웃는 미소가 내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아는 것이 없어요. 많이 도와 주십시요.”

“전 더 그래유”

“자주 만나 친해 봅시다.”

조금은 서먹한 분위기 였지만 커피를 마시며 얼굴을 훔처 보았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 눈치있게 누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뜨고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두사람은 분위가 잠시 어색했다. 모두가 처음 있는 자리고 보니 용기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언니 찾으러 나 갈께요”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 아이처럼 언니를 찾아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로 이야기 하라고 일부러 자리를 비웠지만 두사람은 그녀를 찾으러 다방을 나왔다. 결국 언니를 찾아서 셋이 뻐스를 탔다. 회사 앞에서는 아는 사람이 있으니 자리를 옮겨야 했다. 노량진 한강 유원지를 가려고 생각 했는데 엉겁 결에 뻐스를 타고 보니 신촌가는 뻐스였다. 세 사람은 그냥 합정동에 내렸다. 어디를 가야 할 지 모르고 아는 곳도 없고 어디를 가야 할 지 망서렸다. 뻐스에서 내려 길도 잘 모르면서 왼쪽 길을 따라 무조건 접어 들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이상한 길로 접어 들었다. 그 길은 제2 한강교에서 절두산 천주교 성지 옆을 지나 한강변을 따라 마포까지 가는 새로 생긴 강변도로였다. 원래 차만 다니는 길 인데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는, 그 길로 들어 간 것 같았다.. 이제 막 저녁 해가 지고 강변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한참을 걸었다. 약간 떨어진 뒤에서 누나는 천천히 우리를 따라 오고 있었다. 묻는 말만 대답하고 그냥 듣기만 하는 그녀였다. 절두산 공원에 와서는 천주교 성당 이야기를 하고 당인리 발전소 앞에서는 ‘정인숙 여인 살인사건’이야기를 화제로 그녀에게 들려 주었다. 그 시절 정인숙 사건은 박대통령하고 ‘뭐 어떠니 또 국무총리 하고 어쩌니’ 하는 그런 것들이 세간에 떠도는 미쓰테리 이야기였다. 그녀가 별로 말이 없으니 약간은 답답했다. 하지만 초면에 너무 말이 많으면 흉이 될 것 같은데 오히려 그런 것이 더욱 좋았다.

“다리 아프지 않아요”

“괜찮아유! - 언니 왜 혼자가?”

나이는 열 아홉이고 고향은 충남 예산이라고 했다.

그녀는 칭얼대는 어린애 처럼 정말 순진하게 언니를 찾고 있었다.

“언니야 혼자 가지마. 나쁜사람 많아!”

“그냥 놔둬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얼마를 걸었는지 출발점이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저녁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강 건너 영등포의 불빛이 어둠 속에 보이고 지나는 차들은 빨리 스처 지나고 있었다. 건너편 강변아파트 신축 공사장에서 일하는 남자들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우리에게 하고 있었다. 남자 혼자 여자 두사람을 데리고 으슥한 강변 길을 걸어 가니 그것이 그들 에게는 재미있고 질투나는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였다. 더구나 짖궂은 택시와 추럭 운전 기사들이 우리 곁으로 차를 가까이 다가 와서 욕설을 하고 지나첬다. 어떤 짚차는 우리 앞에 차를 세워 놓고 ‘왜 이길로 다니지’하며 큰 소리로 시비를 걸고 지나 가기도 하였다. 그때서야 이 길은 자동차 전용도로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여름 이지만 아직은 강변의 밤바람은 차거웠다.

어둠은 깊어가고 있었고 얼마를 걸었는지 다리가 아픈 것 같았다.

“몇시까지 숙소에 들어 가면 돼요”

“11시30분 까지 들어가면 돼유”

“첫 데이트가 너무 걸어서 힘들지요”

어느듯 마포 종점까지 다달았다. 시간은 9시였다. 아마 8km이상은 걸은 것 같다.

뻐스를 타고 광화문에 가서 뻐쓰를 타고 가자고 하여 마포에서 광화문 가는 뻐스를 탔다. 차를 타니 온몸에 땀이 축축한 것 같았다. 두사람에게 정말 미안했다. 잘 알지도 모르는 강변 길로 접어들어 고생을 한 것이 미안했다. 그래도 끝가지 불평하지 않고 따라 와 주니 고마웠다. 광화문에 내려서 서소문 덕수궁 앞까지 걸어왔다. 정말 착하고 순진한 아가씨였다.

“우린 지난주엔 일이 바빠서 근무했기 때문에 내일은 쉬는 날이예요. 그래서 오늘 늦게 집에 들어가도 괜찮아요 ”

“우리도 내일 노는데,,,,,,,,,,”

“그럼 잘됐네요. 내일 우리 다시 만나요”

내일 오후 2시 영등포역앞 다방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와 주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나오리라 믿고 기다릴게요”

“걱정 마세요 나 갈께요”

그와 단둘 이라면 어디까지 라도 따라 가겠어요. 차를 태워 그녀를 보내고 중곡동으로 가는 뻐스에 올랐다. 내일은 내일은 어디에 가서 그와 같이 재미있게 보낼 수 있을까 생각을 한다. 입가엔 즐거운 미소가 가득 있었고 네온불이 오늘따라 아름다웠다. 흔들리는 차속에서 눈을 감아본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차가 종점에 왔을 땐 주민등록증을 분실하여 찾느라고 혼이났다. 집에 오니 열두시가 되었고 누나는 어디를 밤 늦도록 돌아 다니냐고 야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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