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書/生活수필

고향을 떠나다

시인김남식 2010. 2. 20. 19:52

고향을 떠나다

 

중학교를 졸업 후 청운에 푸른 꿈을 앉고 서울로 올라와서 공장을 다니면서 일 년은 잘 이겨 냈지만 그 다음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미처 하지 못한 공부도 계속해야 했지만 원래부터 몸이 약해 객지생활은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든 게 너무 힘들고 어려웠다. 중학교 졸업 후 한두 달은 슬럼프에 빠져 시골집에서 그냥저냥 놀고 있었다. 지금쯤 친구들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학교에 나가고 있겠지 그 생각을 하니 집안일 돕는 것 자체도 싫었다.

농사일을 배우면서 시골에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고 농사를 지을만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당시 뭔가 아는 사람들은 도시로 나가 무슨 일이든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학교를 가지 못한 아이들은 기술이라도 배워서 스스로 자립해야 가난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농촌에는 젊은 사람들이 하나둘 도시로 빠져 나갔다.

봄이 막 지나던 어느 날 서울에서 공장에 다닌다는 사람이 이웃집에 손님으로 놀러왔다. 마침 이때다 생각하고는 취직 좀 시켜 달라고 졸랐다. 그랬더니 마침 사람을 하나 데리고 가야 한다면 즉석에서 승낙하고는 서울에 올라가서 사장하고 상의해서 곧 연락 주겠다고 했다. 취직이 쉽게 되는 것 같아 무척 반가웠다. 며칠 후 연락이 왔다. 취직 되었으니 준비해서 오라는 편지였다.

농사 할 기력도 없을 뿐더러 시골에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내겐 없었다. 그동안 아파서 가족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마땅히 시골을 떠나야 했다. 시골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누구나 할 것 없이 도회지로 떠나려 했다.

서울에 간다고 건강하지 못한 내가 돈 벌 수 있을까 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주어지면 열심히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야 했다. 어쩌면 돈에 대한 애착과 돈에 대한 궁핍, 돈에 대한 원망과 설움이 너무 많았다. 나를 데리고 갈 사람이 조치원에 와 있다고 해서 다음날 필요한 몇 가지의 옷을 보따리에 싸 들고 조치원으로 갔다. 객지로 떠나는 자식과 어머니는 눈물에 작별인사를 한다.

“가서 몸 건강하고”

“알았어요. 엄마!”

몸이 성치 못한 내가 떠나는 게 걱정되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조치원에서 나를 데리고 갈 사람 구씨를 만나서 서울 가는 버스를 탔다. 어머니의 따스한 품을 떠나서 지금 생존사회로 가고 있다. 내게 어떤 길이 주어질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버스는 조치원을 떠나 천안을 지나 수원에 도착하니 차창 밖으로 처량하게 내리고 있었다. 새로운 생활에 걱정되고 마음이 울적해서 차멀미를 하였다.

촌티 있는 남루한 옷을 입고 허름한 보따리를 들고 출발한지 4시간 만에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렸다. 그때가 1966년 6월 5일 일요일이었다. 떠날 때부터 내리던 비는 서울에 도착하니 더욱 굵어지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첫 서울 나들이에 자신이 처량해 보였다. 오후 5시 아직은 이른 저녁시간 인데도 검은 구름 때문에 일찍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어디론가 모두 떠나 버렸다. 우산을 준비 못 했으니 터미널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에 자동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울적해지고 자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집으로 그냥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좋은 일이 있어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을 했다. 돈도 많이 벌고 못다 한 공부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건강해야 한다. 스스로 자신을 위로 하고 있었다. 비가 조금 그치자 가자고 한다. 서울 거리는 낯설었기에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꽁무니를 졸졸 따라 나섰다. 내 인생은 지금부터 그에게 달렸다. 버스를 타고 어딘지 모르는 곳에 내렸다.

구씨는 형님 댁에서 공장을 다니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있으려니 구씨는 사장 댁에 인사를 가자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우선 그가 하자는 데로 따라 나섰다. 또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버스를 타고 집을 나섰다. 시골에서 보지도 못한 네온사인이 제멋대로 재주를 부리며 혼란스럽게 한다.

버스를 내려 얼마를 걸어가니까 약방이 있고 다시 안채로 들어서니 30대 초반의 사장이란 사람이 있었다. 구씨는 내게 사장과 부인에게 절을 하라고 한다. 좀 어색해서 절하기 싫었지만 상하관계라서 할 수 없이 절을 했다. 지금부터 주인과 머슴 관계가 성립되는 것 이다.

사장은 내게 ‘꼬마’라고 불렀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꼬마라는 말이 듣기에 기분 나빴지만 할 수 없었다. 공장에서 잔일을 하며 심부름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사장은 내게 일을 할 수 있겠냐고 몇 가지 물어본다. 무슨 일이던지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그곳에서 11시 출발해서 집에 오니 12시 구씨에게 어디냐고 물어 봤더니 중앙청 옆이라고 하며 팔판동이라고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어찌나 피곤한지 그만 잠이 들었다. 집에 와서 잠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낯선 집이라 그런지 잠을 대충 한 것 같다. 누구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객지 생활이 시작이다.

혼자 판단하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식구들은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데 잠이 오지 않아 일찍 깨어났다. 새벽이라 그런지 시골에서 보지 못한 것 들이 많았다. 두부장수의 땡그랑 요량 소리와 생선을 팔러 다니는 아줌마 쉰 목소리, 야채를 사라는 아저씨 목소리 등 내수 시골시장터 보다도 더 시끄러웠다.

시골서 가져 온 보따리를 끌러 공장에서 입을 작업복을 꺼내고 세면도구와 책을 챙겼다. 아침을 먹고 구씨를 따라 공장을 향해 도살장에 가는 소 돼지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발했다. 거리에서 보는 학생들은 책가방을 메고 가는데 공장으로 일하러 가고 있다. 골목길을 몇 번이나 돌아가서 공장이 있는 것 같다. 혼자는 찾아 가지도 못할 미로의 길이다.

공장 문을 처음으로 들어서니 참으로 신기했다. 학교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일하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쳐다보고 있다. 아, 나도 드디어 공돌이가 되는구나 생각하며 의자에 앉아서 사장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11시쯤에 사장이 출근해서 공장을 이리저리 한 바퀴 돌아보더니 구씨와 무슨 애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다가 왔다.

“꼬마야, 잘해 봐라.”

사장은 내게 또 꼬마라고 부르면서 잘 해 보라고 하면서 다시 어디가 가는 것 같다. 내가 들어간 공장은 호마이카 전축 케이스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동생은 전축케이스를 만들고 사장 형은 신당동에서 진공관 라디오 전축을 케이스에 조립해서 파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당시는 전축을 가내공업으로 만들어서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팔았다.

내가 하는 일은 구씨와 같이 장식을 달아 전축 케이스를 완성 시키는 것이다. 구씨가 시키는 대로 서툴게 칼로 깎기도 하고 다듬기도 하며 각종 부품을 케이스에 부착시키는 일이다. 처음 하는 일이라서 조금은 서툴고 힘들었다. 공장 사람들이 착해서 일 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음날부터 구씨네 집에서 나와 공장에서 먹고 자야 했다. 공장에서 숙식을 하는 객지생활이 시작 된 것이다.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고 무작정 따라 온 곳이 바로 하이파이라는 전축 케이스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씨가 공장을 그만 두었다. 아마 어떤 실수와 잘못을 했는지 사장이 나가라고 했다. 어째든 그가 취직을 시켜주고 같이 일 해서 좋았는데 그가 있어서 객지생활에 위안이 되었는데 그가 공장을 나가게 된다고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장한테 무슨 잘못을 했는지 잘 모르지만 내가 울려고 하니까 구씨는 나를 떼어 놓으려 애를 썼다. 객지라는 무서운 세상에서 공포와 함께 어린 내게는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참고 일하라는 말을 남기고 구씨가 공장을 떠났다. 모든 것을 접고 내려가고 싶었다. 서울생활 일주일도 채 안 돼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허망했다. 그러나 시골에 다시 내려가면 아무것도 안될 것 같다. 마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와서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다. 모두들 시골서 돈 벌겠다고 올라온 사람들 이다.

구씨가 나가자 이제 혼자의 힘으로 공장 생활을 하며 어려운 객지생활을 해 나가야 했다. 저녁에 일을 마치면 커다란 공장을 혼자서 청소하고 아침에는 고참에게 세수 물을 데워주고 저녁에는 간단한 빨래까지 해 주어야 했다. 이제부터 진짜 꼬봉 노릇이었다. 기술 배울 때까지 처음 몇 달은 월급을 받지 않기로 사장하고 약속 했다.

어느덧 서울에 올라 온지 서너 달이 되었다. 며칠 있으면 추석이다. 사람들은 월급을 타서 시골 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갈 차비가 없었다. 사장은 내게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정말로 냉정했다. 월급은 모두 밥값에 포함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공장에서 추석을 보내야 할 형편 이였다. 시골서 올라 올 때 얼마 안 되는 돈을 가지고 와서 한 달 밥값을 내고 생활에 필요한 몇 가지를 사고 나니 돈이 바닥이 났다.

식사는 공장 안 집에서 먹었다. 밥값은 한 달에 3,500원 이었다. 처음 3개월은 월급을 주지 않고 그 후 3개월이 지나서 1,000원씩 준다고 했다. 식사비용은 사장이 절반 내고 내가 절반을 내야 한다고 했다. 시골에서 먹어 보지 못한 하얀 쌀밥에 맛있는 반찬으로 문득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생각났다.

추석 전날 모든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혼자 남아 있으려니 공장 문을 닫아야 떠난다는 공장장이 시골에 가면서 200원을 주는 것이다.

“참 안됐구나, 이거 가지고 누님 댁에 가서 명절 보내고 와라”

어찌나 고마운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사람이다. 누나는 내가 어떻게 서울에 와 있는지를 몰랐다. 그리고 찾아오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왕십리에서 전차를 타고 누님 댁으로 가서 추석 명절을 며칠 보냈다. 남루한 옷을 입고 그곳에 갔으니 얼마나 창피 했을까마는 추석이 지나서 다시 공장생활이 시작 되었다.

9월이 지나자 밤이면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가을로 접어들었다. 저녁에 잔심부름을 시키는 고참이 밖에 나가고 없으면 이유 없이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어느덧 요령이 생기면서 힘들고 어렵지만 꾹 참았다. 친구를 사귈 수가 있었고 서로 의지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시골에서 돈이 보내와야 필요한 것을 살 수 있을 텐데 돈이 오지 않았다. 서울 가면 큰돈을 버는 줄 알고 있는 식구들 이었다. 몇 번 편지해도 답장이 없다. 어머니는 편지를 읽지도 쓰지도 못하니 누구하나 내게 신경 쓸 사람도 없다.

사장은 3개월 후에는 약간의 월급을 준다고 하더니 주지 않았다. 그냥 몇 달을 밥만 먹여줄 뿐이다. 날씨는 자꾸만 추워지는데 이불도 없고 입을 옷도 없다. 여름은 그냥 아무거나 입을 수가 있었지만 가을로 접어들면서 시골서 올라 올 때 갖고 온 옷 들은 입을 수 없다.

밤에는 추워서 옷을 입고 자야 했다. 돈이 없어서 비싼 밥은 먹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길가 포장마차에서 해결해야 했다. 포장마차에서 먹을 수 있는 식사는 10원 짜리 국밥과 5원 짜리는 선지국수 이었다. 그것도 매일 먹으니 어떤 때는 입맛이 없었다.

전찻길 옆에 있는 국밥집과 골목길에 있는 국수집에 각각 외상 장부를 만들어 놓고 먹는 대로 주기로 했다. 어떤 때는 입맛이 없으면 밥을 먹고 또 다른 때는 국수를 먹기로 했다. 저녁에 야근을 할 때면 사장이 공장사람들에게 찐빵을 사 주었다. 빵을 사러 중앙시장까지 갈 때는 항상 꼬마인 내가 심부름을 했다. 빵집에 자주 가니깐, 빵집 주인은 내게 한 개씩 덤으로 주었다. 그것은 빵집에서 먹고 공장에 와서는 안 먹은 것처럼 다시 하나를 더 먹으니 배가 불렀다.

 

찐빵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신당동 중앙시장 찐빵 가게

그 앞을 지날 때면 군침이 돌지만

주머니에는 동전 한 푼 없었다

 

1개 5원 짜리 찐빵 두 개면

한 끼 식사로 충분 했던 그때

세상을 처음 구경 나온 꼬마는 배가 고팠다

 

먹음직스러운 찐빵이

방금 가마솥에서 나오는 모습만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며

목구멍으로 꼴깍 침을 삼켰다

 

몸도 춥고 마음도 추웠던 그 시절

따끈한 엽차와 찐빵을 먹으며

난롯가에서 몸을 녹이고 싶었지만

머뭇거리다가 아쉽게 그냥 발길을 돌렸다

 

공장생활은 두더지 생활이다. 세탁은 한 달에 한번 할까 말까 했고 목욕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러니 몸엔 자연히 ‘이’가 많았다. 속옷은 아예 빨기 싫어서 한 달 씩 입고 그냥 버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추운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니 건강도 원래 안 좋은데다 자꾸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기에 열심히 했다. 객지에서 올라온 친구들과 일요일이면 시내를 돌아다니며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지만 하루의 피곤한 생활을 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누우면 시골 생각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미련을 버리고 서울 생활에 익숙 하려 애를 섰다. 일요일에는 극장도 가고 공원도 놀러 가기도 하고 헌책방에도 들렸다. 그러나 사회생활 첫 고생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공장 건물 주인집 딸이 친구가 되어 주었다.

무학여고 1학년으로 참으로 예쁘고 귀여웠다. 남루한 작업복을 입고 있는 공장 사람들에게 거리낌 없이 대했고 웃음을 주었다. 보통 여학생과는 다른 데가 있어서 남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친 하려고 했다. 건물 주인집에서 공장 사람들에게 식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식모가 있었지만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식사 준비를 하였다.

그녀를 보게 되면 재밋는 이야기를 해 주며 친하게 지내려고 했다. 그녀의 집은 안채가 있는 별채의 양옥집으로 대문을 나서면 밖으로 공장 건물이 있고 조금만 나가면 왕십리 전차역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식구들이 외출을 하고 혼자 집에 있는 것 같다.

마침 공장안도 모두 외출 나가서 없었다. 그녀와 친해 질 수 있는 방법으로 공장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가끔 공장에 놀러 오기도 했지만 먼지가 많고 화공 약품들이 있어서 가족들이 못 가게 하였다. 전축을 크게 틀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그녀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고 있어서 놀러 오라고 손짓을 했다. 정말 오라는 것이 아니고 그냥 심심해서이다.

얼마 후 그녀가 뜻밖에 과일을 깎아서 들고 나왔다. 까맣게 된 작업복에 터벅머리 지저분한 모습에 순간적으로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냥 과일만 주고 나가길 원했지만 오히려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또래의 나이로 어느 사람보다도 친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영화구경을 갔다 오다가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할머니와 시장 나왔다가 할머니를 먼저 보내고 근처 빵집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부모까지 알게 되었는데 마치 내가 어찌 하려고 하는 줄 알고 있었다. 며칠 후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 꾸중을 들었고 자존심까지 밟아 버리는 말까지 들었다. 기분 나빴지만 행색이 너무 초라하여 객지 생활하는 처지라 아무 말도 못 했다. 이어서 사장에게 야단을 맞았고 내일부터 무조건 그만 두라고 한다.

때마침 공장에 있던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서 같이 가게 해 달라고 졸랐다. 생전 처음 취직한 공장을 6개월 만에 그만 두었고 주인집 딸과의 짧은 인연을 멀리한 채

월급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공장을 나왔다.

그래서 기술자가 되었다고 사장에게 거짓말 하고 안암동 공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우선 월급을 받으니 생활이 좀 나아졌다. 이불도 사고 옷도 사고 책도 사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힘은 들어도 그런대로 재미가 있다. 모든 것은 어려운 일이 있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기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어느덧 객지생활에서 처음으로 고향에 내려가는 설날은 기분이 들떠 있었다.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길게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얼마 후 버스가 승강장에 도착해서 차에 오르면 어떻게 된 일인지 이미 사람들이 있었다. 승객들이 차를 타면 자리를 돈 받고 파는 사람들이다. 참 재미있는 일인지는 모르지만 먹고 사는 방법도 여러 가지 라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에게 드릴 돼지고기 한 근과 소주 대병으로 큰 것 하나를 사는데 천원이 들었다.

“너 못 오는 줄 알았다. 고생 많이 했지. 항상 네 걱정 했다.”

어머니 얼굴에는 벌써 굵은 눈물 자욱이 주름진 얼굴을 내리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을 벌어서 시골에 왔으니 그저 반가움이 두 배였다. 명절 휴가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날 어머니는 청주까지 나왔다.

“가서 고생이 되더러도 건강하고 편지 자주 해라”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홈에서 돌아가지 않고 눈물을 훔치고 있는 어머니를 보니 가슴 아팠다. 차는 서서히 청주역을 빠져 나오자 어머니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내 마음은 어머니에게 있다. 건강하지 못한 나를 늘 걱정했다. 뚜렷한 기술 없이 서울에서 돈 번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체험하지 못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기에 떠나야 한다. 내가 있을 곳은 객지에서 내 삶의 둥지를 만들어야 한다.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고 자리에 앉는다. 마음속으로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짐 보따리를 들고 안암동 공장에 도착했다. 보다 낳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어떤 어려움도 견디어야 했다. 시골에 다녀와서 인지 긴장이 풀리고 몸이 나른하고 어지러웠다. 분위를 바꿀 겸 몇 사람과 같이 중량교 공장으로 직장을 이전하기로 했다.

전축 케이스에 포마이카 칠이 굳으면 컴 파운드 광을 내기 위해 사포로 닦아내는 일은 겨울에는 극한작업이다. 광기계로 광을 낼 때는 온통 옷에 컴 파운드가 달라붙어 작업복이 하얗게 되고 사람은 먼지에 묻혀 얼굴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공장은 주위에는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우선 공장이 넓어서 좋았다.

철길 넘어 들판에서 겨울바람이 저녁이면 세차게 불어왔다. 공장안 합판위에서 추운 새우잠을 자면서도 젊음이 있기에 희망이 있었기에 추위도 잊었다. 그러나 한번은 합판에 불이 붙어서 죽을 뻔했다. 춥다고 불문을 열어 놓고 문제가 되었다. 합판 밑에 연탄을 놓고 잠을 자기 때문에 정신이 없으면 합판이 타는 경우가 있다. 새벽 3시경에 자다 말고 불을 끄고 말끔히 청소를 하는데 한 시간 이상 걸렸다. 공장안으로 불이 번지지 않고 특히 화상을 입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고향 생각이 나면 중앙선 기차선로에 앉아 고향 노래를 부르는 낭만적인 일도 있었고 청량리를 무작정 돌아다니기도 했다. 판자촌이 즐비한 중량천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이제 내 인생은 내 지게에 지고 일어서야 했다.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들 사연을 들어 보면 똑 같이 가난 했기에 배우지 못하고 돈 벌겠다고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 이었다.

휘경동 공장에서 겨울을 보내고 월급을 더 준다고 하는 노량진 공장으로 옮겼다. 처음 몇 달은 월급이 잘 나오더니 얼마 지나서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일을 하지 않고 며칠을 놀기만 했다. 사장이 부도를 내고 도망가자 결국 몇몇 사람들과 을지로 4가 세운상가 공장으로 옮겼다. 당시는 경제 여건이 좋지 않아 공장들이 오래 가지 못 하고 부도를 내는 일이 허다했다. 서울 중심가 세운상가에 오니 사람들도 많고 먹을 것도 많고 구경거리도 많았다.

무엇보다도 장춘단 공원이 가까웠고 가까워 일요일에는 매일 올라갔고 극장이 많아 좋았다.

그러니 친구들과 어울려 헤프게 쓰는 버릇이 되었다. 세운상가에서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았기에 홍제동에 있는 공장으로 옮겼다. 사장이 친절했고 봉급도 많이 주었고 사장 동생이 내 또래여서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다.

국군의 날은 비행기 에어쇼 구경 하려고 용산서 부터 한강 고수부지 까지 먼지 속을 걸어야 했다. 파란 하늘 위에서 펼쳐지는 비행기 묘기는 볼거리가 없던 시절 좋은 구경으로 사람이 정말 너무 많았다. 한강 모래판에 쭈그리고 앉아 구경하던 일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공장장은 시골 아저씨처럼 얼굴이 넙적하고 인정이 많아 객지에서 고생하는 우리를 동생처럼 아껴주고 사랑 해 주었다. 그는 인왕산 계곡 언덕에 살고 있었는데 가끔 우리를 집으로 불러 맛있는 음식과 술을 대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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