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재 신숙주(1417년∼1475년)선생묘 솔새김남식
의정부 고산초등학교에서 1키로 지점 큰 길에서 200여미터의 집입로는 비좁지만 묘지앞에 서면 쉼터와 화장실
그리고 대형차가 머물수 있는 너른 주차장이 있다. .
신숙주 묘는 경기도의 기념물 제88호로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로163번길 34-39 고산동에 소재하고 있다.
신숙주는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정치가로서 본관은 고령, 자는 범웅, 호는 보한재이다.
세종 때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충성으로 보필하였고 특히 계유정란 이후 부터는
조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 하였다
사육신과 함께 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변절하여 계유정난때 수양대군 편에
가담하여 반정을 적극 지지하였고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번 출정 하였으며
영의정을 두번씩이나 역임했다.
세종 때 집현전의 학사로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했으나
단종 복위 운동 실패후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남이의 옥사때도 적극 참여하여 사후 사림파 도학자들로 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1910년(융희 4년) 이후 그의 한글 창제에 대한 공적이 재조명 여론이 서서히 나타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어서인지 한글학회에서 한글창제 사적비를 1971년 10월에 세웠다
생전에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4번 공신에 책록이 되었으며
사육신과 생육신 김시습, 그 밖에 한명회, 권람등 다양한 인맥을 형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성종의 특명으로 간행된 보한재집17권을 비롯하여, 세조 6년(1460년) 여진정벌을 마치고
북정에 관한 것을 편찬한 북정록 6권, 세종 25년(1443년) 일본 서장관으로 갔을 때의 견문록인
해동제국기 1권과 그 밖에 동국정운, 사성통고, 오례의, 경국대전 등이 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동국정운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농업과 축산업 기술에 대한
서적인 농산축목서를 편저하였다.
墓域 아래 이승소가 글을 지어 성종 8년(1477)에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있으나 노후로 비석이 낡아서
글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송군부인 윤씨의 묘와 나란히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묘 앞에는 묘비석, 상석, 문인상, 신도비가 있다.
신숙주묘 오른쪽에는 돌계단으로 올라가면 두개의 묘가 있는데 아래 것은 아들이고 위 것은 손자이다.
그리고 오른쪽 산중턱으로 올라가면 여러개의 묘가 보이는데 그의 자손들 묘소가 근처에 조성되면서
이곳은 고령신씨 묘역이 되었다.
에필로그 (솔새 생각)
신숙주와 성삼문은 집현전 학사로 두 사람은 같은 년배로 절친 이었으며 죽음을 앞둔 문종으로 부터 단종을
잘 보필 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그 이전에 세종에게서도 그런 언질은 받고 두 사람은 충의를 다짐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신숙주는 현실이 중요한 것이며 남는 것은 인간이 성취해 놓은 업적이라고 생각하였고
성삼문은 정치적인 것 보다는 학문적이며 유교적인 성향을 더 짙게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성삼문의 이러한 생각은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꿋꿋한 것이었다.
성삼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신숙주는 단종의 폐위와 죽음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자신이 살아남아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사육신과는 결별을 결심한다.
“자네와는 모시기로 한 주군이 달라져서 이제 가는 길도 어긋 났지만 자네의 굳은 절의는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네.
만약 내가 자네와 같은 선택을 했더라면 나도 자네 만큼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 흉내는 냈을 것이네.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는구먼. '굼벵이는 더럽지만 매미로 변해 가을 바람에
맑은 이슬을 마시고 썩은 풀엔 빛이 없지만 그곳에서 나온 반딧불은 여름 밤을 빛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깨끗함은 항상 더러움에서 나오고 밝음은 항상 어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바로 신숙주가 성상문에게 한 말이다
그리고는 성삼문과는 切親의 벗 이었지만 신숙주는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상소문을 올린다.
그래서 신숙주가 어린 임금 단종을 버리고 수양대군을 받들었기 때문에
사육신의 충절이 빛 날수록 신숙주는 변절자로 낙인이 찍혔으며
성삼문은 절의를 지키고 죽은 것과는 달리 새 임금에게서 영화를 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삼문의 충절과 신숙주의 변절의 차이는 무엇일까?
신숙주는 목숨을 부지했지만 명예를 잃었다.
성삼문은 한 목숨을 바친 대신 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그 이상 이룬 것이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신숙주는 분명히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업적보다 충절(忠節)이 중한지의 문제는 방법과 목적과의 관계처럼 미묘한 것이기는 하지만
신숙주는 역사의 흐름에 떠밀려 갔을 뿐이다고 말한다면..?
이런 점에서 오늘날 사육신의 문제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가치관의 혼란만을 가져 온다는것이다.
변질자도 충절자 못지않게 역사의 흐름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한편 신숙주 부인의 죽음에 대하여 오해와 진실을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성삼문이 국문(鞠問)을 당하고 죽던 날 신숙주가 집에 돌아오니 그의 아내 무송군부인 윤씨가
남편을 향해 오랜 동지인 성삼문과 함께 절의를 지켜 죽지 않고 충의를 저버리고 돌아온 것을 힐책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다락에 올라가 목 매어 자살 했다는 역사적 야사(野史)를 기억하고 있는 우리는
신숙주와 성삼문의 정치적 공과 선을 따질 때면 항상 성삼문 편을 드는 데 익숙해졌다.
성삼문은 의인이요 신숙주는 비겁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부인이 자살했다는 묘사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며 자연사로 죽었다
사망 시기도 신숙주가 사신으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와같은 조선의 야사들은 흥미 본위로 드라마나 소설의 소재가 되었기에 더욱 悲感함을 금할 수 없다.
한편 녹두로 만든 숙주나물은 고려말 원나라에서 들어온 음식으로 신숙주에게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사육신을 배신하고 수양대군의 편에 섰을 때 사람들은 신숙주를 변질자로 비난하고 미워했다.
그리고 음식을 한지 일주일만에 상하는 나물을 그의 이름을 빗대 숙주나물이라 불렀다 하는데
그게 사실인지는 그시대에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겠다 솔새김남식
신숙주의 자손묘 오른쪽으로 10여분 올라가면 의정부 소풍길이라고 하여 부용산 등산로가 있다.
능선에 올라서면 신숙주묘에서 무지랭이까지 3.1키로 306보충대 경전철 차량기지 까지 3.4키로 거리 이정표가 있다.
=> 찾아가기 1호선 회롱역에서 의정부 경전철 환승후 종점 하차하면 산행안내 이정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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