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청주북이

금성대군 북이면 내수

시인김남식 2013. 6. 22. 09:30

금성대군과 내수 북이면 


내수는 옛날에는 삼봉장이라하여 장날이면 주위 촌로들의 쉼터였다

북이면과 북일면(내수)은 내수역을 기준으로 하여 같은 생활권이다

여름방학때 아부지가 풀을 베어 말려서 만든 빗자루 그리고 왕골돗자리와 싸리비를

지게에 지고 가면 나는 짚으로 묶은 계란 한 줄을 망태기에 넣고 따라 간다

그리고 물건을 다 팔면 장터에서 먹은 선지국밥이 그렇게 맛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는 빈지게를 지고 집으로 오고 아부지는 친구들과 2차로 선술집에 가셨다

혼자 집으로 오는 십리길은 왜그리 멀고 지루하고 더웠다

그래도 중간 중간 마을을 지날 때면 샘이 있어서 물도 마시고 등복도 했다

그 먼길이 지금은 내수에서 증평IC로 나가는 큰 도로가 되었다

중간 중간 있던 마을은 거의 전부 공장으로 변하고 물 마셨던 샘은 없어젔다



충북선 철도역 내수역은 청주로 나가는 길목이다

내수에서 증평IC 그리고 초정까지 각각 이십리길로 지금은 북이면 사무소 앞에서

증평IC 앞으로 통하는 지방도 511번 이 있지만

대길, 대율 ,석성리를 지나 반여울(磻灘)를 건너 초평을 지나 진천까지 걸어 다녔다

증평IC부근은 소도머니라고 해서 죽음의 벼랑길이다

소두머니는 진천군 문백면 은탄리와 초평면 연담리 사이의 반여울의 깊은 미호천 냇물로

청룡과 백룡이 살고 있다하여 지금까지도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다


최근에 역사 인물로 북이면에는 손병의선생이 있고 내수는 한봉수의병장이 있다

조선시대로 올라가면 청주에서 시작한 이인좌 난을 평정하다가 참변을 당한 김한정충효각이 석성리에 있고

병자호란때 과감한 현실론으로 나라를 살린 최명길묘가 있다

스스로 볼모로 명나리에 간 최명길은 드라마에서 여러차례 나왔기에 却說하고.


   

그리고 조선시대 수학의 조합이론을 수립하여 마방진을 고안해 낸 최석정 묘가 있다

최석정(1646~1715)은 숙종때 영의정을 8번 한 재상으로 최명길(1586~1647)의 孫子이다

그는 우리나라 과학자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고 그의 초상화는 국보 1936호 청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최석정은 장희빈의 사사에 반대하다 진천에 부처 되었고 위패는 초평 지산서원에 있었으나 

대원군 서원철폐로 지금은 초평초등학교가 자리하고 뒷산에 최석정 글씨로 새긴 ‘옥천병(玉川屛)’이라는 암각만이 남아 있다

북이면 대울리에 최석정묘가 최명길 묘와 이웃하고 있다



최명길의 윗대 윗대 조부는 조선 개국공신 최유경(1343~1413)이다

최유경은 진천 덕산 사람으로 명문가로 지금으로 말하자면 금수저로 대대손손 영의정을 아니한 사람이 없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치사( 致仕)후 초평에서 살다가 용인 자봉산 기슭에 묻혀다하여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란 말이 최유경 때문에 나왔다고 한다

최유경의 호는 竹亭으로 생전에 살던 마을 죽정내(화산리초평저수지)를 호로 사용했다  

최유경은 都城과 숭례문을 축성하였고 청백리 효자로 부모가 병이 들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효를 다했다고 한다 

대율리 입구에는 효자비가 있으며 오창 양지리에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최석정과 함께 배향되었다



최유경의 아들 최사강(1385~1443)은 왕실과 연혼하면서 갑자기 현귀했으나

자신의 분수를 지킨 까닭에 세종의 은총이 떠나지 않아 의정부·육조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최유경과 최사강의 묘는 용인시 기흥IC 부근에 두 부자가 나란히 있다

그러나 단종 복위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부인 전주 최씨가

최사강의 둘째 여식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 

금성대군릉 순흥에서 사사후 그곳에는 순절한 넋을 기리기위해서 만든 영주 금성대군신단이 있다

당시 시신은 온데간데 없고 피묻은 돌을 뫃아 제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미원면 대신리 초정약수에서 미원으로 넘어가는 이티재 내리막 길에 금성대군제단이 있다

이곳에는 금성대군의 부인 전주 최씨묘와 금성대군에게 제향을 올리는 단소가 있다

이곳 첩첩산골에 선산을 정하게 된 동기는 야사에서 이렇게 전해진다 

당시 역적의 집안으로 몰리게 되어 위기가 되었을때 마침 금성대군에게는 유복자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비슷한 또래의 하인의 딸과 바꿔서 키워졌다고 하는데

그후 가족은 모두 청주의 관노로 생활 했다고 한다


대군의 사사후 60여년이 지난 뒤 금성대군의 증손 홍양정이 한양에 올라와 대궐 문밖에 거적을 깔고

부당함을 석달 동안이나 상소 하자 중종이 삼세봉작(三世封爵) 志恩을 허락하였다

유품을 수습하여 돌아오는 길 "대군 할아버지 따라오십니까?" 하고 물으면
"가고말고 가고말고..." 하면서 대답이 있었는데 이곳을 지날때는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홍양정은 " 아! 이곳이 대군의 만년유택(萬年幽宅)이구나" 생각하고 유품을 묻고 단소를 세우고

북이면 대율리에 있던 할머니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이후 금성대군 후손들이 초평면과 북이면 그리고 미원면에 거주하게 되는게

초평면 용기리에는 금성대군사우(祀宇)인 청당사(靑塘祠)가 있다

금성대군의 증손 덕천군이 마을에 살면서 세거지가 형성 되었으며 주위 마을로 자손들이 번창했다

이곳은 금성대군(錦城大君)과 부인 전주최씨의 유패가 있는 곳으로 위치는 증평에서 초평가는 길목에 있다


그리고 북이면 용계리에 죽계서원(竹溪祠)이 있다

죽계는 당시 피로 물들어 지금도 핏걸이라 불리는데 이곳에는 순훙부사이보흠과 금성대군

안평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6명의 위패가 있다


금성대군 死後 300년이 지난 영조때 복권이 되어 비로소 후손들에 의해서 제단이 마련 되었고 

금성대군파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유림들이 제향을 올리고 있다

전주최씨와 함께한 금성대군파의 世居地는 청주지역이 가장 많으며 금성대군파종회 사무실도 내수에 있다


북이면 대길리에 있는 최명길신도비


내수역은 지금 폐역이고 북이면에는 석성초등학교 북이초등학교 대길초등학교가 있고 북일면에는

내수초등학교, 북일초등학교, 비상초등학교, 수성초등학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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