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문화유산
■국보
- 용두사지 철당간 제41호, 남문로2가 48-19.
■보물
- 순성좌리사등공신녹권 제716호, 충북대학교 박물관.
- 용화사 석불상군 제985호, 사직1동 216-1.
- 운천동출토 동종 제1167호, 명암동 국립청주박물관.
- 보살사 영산회괘불탱 제1258호, 용암동 7.
■사적
- 상당산성 제212호, 산성동 산28-1.
- 흥덕사지 제315호, 운천동 866.
- 신봉동 백제고분군 제319호, 신봉동 산7.
- 정북동 토성 제415호, 정북동 351-3.
■중요민속자료
- 청주출토 순천김씨 의복 및 간찰 제 109호, 충북대학교 박물관.
- 청원 구례손씨묘 출토유물 제116호, 충북대학교 박물관.
- 청원 전박장군묘 출토유물 제117호, 충북대학교 박물관.
- 중원 김위묘 출토유물 제118호, 충북대학교 박물관.
- 안동김씨묘 출토의복 제217호, 충북대학교 박물관.
■중요무형문화재
- 금속활자장 제101호, 수동 165-4, 보유자 오국진.
■유형문화재(이하 도지정)
- 충청도 병마절도사 영문 제15호, 남문로2가 92-6(중앙공원).
- 용암사 비로자나불좌상 제23호, 우암동 4.
- 보살사 석조이존병립여래입상 제24호, 용암동 7.
- 탑동 5층석탑 제25호, 탑동 251.
- 청주향교 제39호, 대성동 67.
- 보살사 극락보전 제56호, 용암동 7.
- 보살사 5층석탑 제65호, 용암동 7.
- 청주동헌 제109호, 남문로1가 171-3.
- 망선루 제110호, 남문로2가 92-6(중앙공원).
- 정하 마애비로자나불좌상 제113호, 정하동 산9-1.
- 탑동 양관 제133호, 탑동 94-17.
- 운천동 신라사적비 제134호, 국립청주박물관.
- 조헌전장기적비 제136호, 남문로2가 92-6(중앙공원).
- 신존동 고가 제145호, 신전동 180.
- 성공회성당 제149호, 수동 200-1.
- 순치명 석불입상 제150호, 용정동 522.
- 한씨기조제단비 제169호, 운동동 369-6
- 영조대왕 태실가봉의 제170호, 북문로1가 청원군청.
- 서기사 석조약사여래좌상 제174호, 율량동 산91.
- 눌재 강수유 고판목 제177호, 청주대학박물관.
■기념물
- 압각수 제5호, 남문로2가 92-6(중앙공원).
- 동래부사 송상현충렬사 제16호, 수의동 산1-5.
- 표충사 제17호, 수동 87.
- 연담공묘소 제20호, 명암동 산3.
- 척화비 제23호, 남문로2가 92-6(중앙공원).
- 신항서원 제42호, 용정동 120.
- 송상현묘소 및 신도비 제66호, 수의동 산1-1.
- 방정 제84호, 방서동 588.
- 무농정지 제85호, 방서동 210-4.
■무형문화재
- 청주농악 제1호, 강서1동 지동마을.
- 배첩장(홍종진) 제7호, 북문로2가 116-231.
■문화재자료
- 주성강당 제17호, 주성동 50.
- 것대산(거질대산) 봉수지 제26호, 용정동 산107-2.
☆ 역사적 사건과 현장
-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 인쇄한 흥덕사
고려 우왕 3년(1377) 청주목 흥덕사(興德寺)에서 주조하여 인쇄한 백운화상 초록불조직지 심체요절(白雲和尙 抄錄佛祖直指 心體要節)이며
줄여서 부르는 책명은 <불조직지심체>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직지>는 책의 표지 중앙에 붙여진 책명으로 상·하권 중 하권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1972년 세계도서의 해에 현존하는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되었으나 흥덕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85년 청주 운천동 택지개발공사 중 청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해 흥덕사를 확인할 수 있는 유물들이 발굴됨으로써 청주가 세계인쇄문화의 발상지임이 공식화되기에 이르렀다. 흥덕사터는 1986년 국가사적(제315호)으로 지정되고 그 위치에 고인쇄박물관이 건립되었으며, 청주시민들의 ‘직지찾기운동’이 전국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 임진란 최초의 승전보 청주성 탈환
선조 25년(1592년)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 의해 청주성이 함락되었다.
이때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趙憲)과 영규(靈圭)대사가 이끄는 승병과 박춘무(朴春茂)의 청주의병이 힘을 합쳐 청주성을 공략
8월 2일에 왜적을 물리치고 탈환하니 임진란 육전 최초의 승전보였다.
청주성 탈환은 호남과 호서탈환의 전기가 되었으며, 관군과 의병의 사기를 북돋았음은 물론 관군이 명군과 함께 반격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하는 등 전사적 의미가 큰 의병활동이었다.
- 충청북도 관찰부의 청주 이전
충청도에서 남·북도가 갈라진 것은 1896년(건양 원년) 전국 8도제가 13도로 개편될 때였다.
이때 충북의 관찰부는 충주에 설치되었으나 12년 뒤인 1908년 청주로 이전해와 충북의 수부(首府)로 자리잡았다.
관찰부(도청)의 이전은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조치원역이 생겨나자 교통과 산업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어
청주가 충청북도의 중심지로 부각된 데 기인한다.
당시 5일마다 열리는 청주장은 대구 다음으로 성시를 이루어 충주장에 비해 10배나 큰 규모였다.
1908년 6월 5일 충청북도 관찰부는 중앙공원 내 옛 관아를 청사로 사용하였다.
☆ 내 고장의 역사적 인물
- 곽예(郭預, 1232∼1286)
고려 중기의 문신. 호는 연담. 청주인으로 고종 42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좌승지, 국자감 대사성, 지밀직사사 등 여러 요직을 거쳐
감찰대부에 올라 성절사로 원나라를 다녀오던 길에 세상을 떴다. 원나라를 꾸짖는 항원시 「감도해」를 남겼다.
청주시 명암동에 묘소와 시비가 있다.
- 한명회(韓明澮, 1415∼1487)
조선 초기의 문신. 수양대군을 왕위에 옹립한 정난 1등공신으로 세조, 예종, 성종대에까지 이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등
최고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최항, 신숙주와 함께 『세조실록』을 편찬했다.
- 송상현(宋象賢, 1551∼1592)
임진란 때 동래부사로 동래성을 끝까지 지키다 순국한 절신(節臣)이다. 선조 25년, 20만 왜군이 부산성을 함락하고 동래성을 범할 때
성을 사수하다가 전사했다. 「동래부사순절도」(보물 제392호)가 충렬공(시호)의 장렬한 최후를 잘 전해주고 있다.
청주 수의동에 묘소와 위패를 모신 충렬사가 있다.
- 박춘무(朴春茂, 1544∼1611)
임진란 때 청주 복대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조헌, 영규와 힘을 합하여 청주성 탈환에 큰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
임진년 8월 1일 청주성 공략에 남문을 맡아 야습을 감행하여 왜적들을 퇴주시켰으며, 이어 진천으로 진격
아들 동명과 함께 다시 왜군을 물리쳤다. 인천부사를 지냈고 참찬(參贊)에 추증되었다.
- 김원근(金元根, 1886∼1965)
호는 청암(淸巖). 12세 때 청주 저자거리의 장돌뱅이로 태어나서 피나는 노력 끝에 거상(巨商)이 되었으나 일제하에서
교육구국의 일념으로 인재양성에 전재산을 바친 육영독지가.
1924년 동생 영근(永根)과 함께 대성보통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청주상고와 청주대학 등 초·중·고에서 대학까지
6개 학교를 세워 민족사학의 큰 길을 개척했다.
구휼 봉사활동에도 앞장서 그 공을 기리는 송덕비가 7개소에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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