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금성대군제단

시인김남식 2017. 6. 26. 21:38

청주금성대군 제단 솔새김남식


청주금성대군 제단은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49호로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대신리에 있다



내수 초정약수에서 미원으로 넘어가는 이티재 내리막길에서 상당산성으로 가는 삼거리에 금성대군제단 이정표가 있다


삼거리에서 3키로 정도가면 대신리 마을 초입에 다시 이정표가 있다


좁은 농로길을 따라 2키로 걸어서 들어가면 山 초입에 금성대군제단을 알리는 팻말이 또 있다


그리고 다시 산 길을 따라 200여미터 더 올라가야 한다



금성대군(錦城大君) 제단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제단 형태인 ㅁ자형으로 규모는 앞면 3m, 옆면 4m, 높이 1m이다.


오른쪽으로 금성대군의 부인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 전주 최씨와 함께 있다.



이 제단은 축조 당시의 묘제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금성대군 이유(李瑜)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여섯째 아들로 천성이 강직했으며, 문장가로 명성이 높았다.

1437년 참찬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하여 처음에는 자손이 폐고(廢錮)되는 줄 알았는데 

금성대군 死後에 유복자 하나와 측실에서 아들 하나를 얻었지만 관노가 되었다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으로 귀양을 가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한 관노의 밀고로 체포되어 1457년 10월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1528년(중종 23)에 복위 되었으며, 1739년(영조 15)에 정민공(貞愍公)으로 사시(賜諡)되었다.


비석의 글자는 오른쪽부터 유명조선국금성대군시정민이공지단 (有明朝鮮國錦城大君諡貞愍李公之壇) 글자가

새겨있고 그리고 "숭정4 임오 (崇禎4 壬午) 라고 쓰여 있다

1739년(영조15)에 정민공(貞愍公)으로 사시(賜諡)되었던 것으로 보아 비석의 건립시기는

1822년 임오년(고종19년)이다.


정민공신단(神壇)과 全州최씨지묘 비석


이곳 첩첩산골에 선산을 정하게 된 동기는 야사에서 이렇게 전해진다
미원면지에 의하면 대군의 증손 홍양정이 삼세봉작지은을 입게되자 공은 영주로 가서 대군의 유품을 수습하여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가 중종 기묘년(1519년)의 일이니 대군 치명(1457년)후 60여년이 지난 뒤였다.

홍양정은 유품을 모시고 오면서 가끔씩 "대군 할아버지 따라오십니까?" 하고 물으면
"가고말고 가고말고..." 하면서 대답이 있었는데 이곳을 지날 때는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홍양정은 " 아! 이곳이 대군의 만년유택(萬年幽宅)이구나" 생각하고 유품을 묻고 단소를 세웠다고 전한다.


묘소가 실전될 경우나 또는 죽은자의 시신을 찾지 못한 경우 단소를 설치하여 제향을 올리는데

이를 유허단(遺墟壇)이라고 한다


전주최씨(금성대군부인) 묘는 북이면 대율리(최명길묘소부근)에 있던 것을 차증손인 홍양정(洪陽正)이

당시 이곳으로 개장(改葬)한 것이다. 燈比石 에는 切開를 표하려고 대나무가 그려저 있었다


당시 역적의 집안으로 몰리게 되어 위기가 되었을때 마침 금성대군에게는 유복자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야사에 늘 나오던 이야기대로 당시 비슷한 또래 하인의 딸과 바꿔서 유복자를 키웠다고 한다

 

그후 금성대군의 차증손 홍양정(洪陽正)이 나이 18세에 활달하고 강직한 성품인지라 억울한 일을 나라에

품달이나 하여 보리라 생각하고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가 대궐문 앞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문지기에게 청하여 가로되
“금성대군이 억울하게 돌아가심은 옛 임금을 위함이요, 다른 뜻은 없음이라.” 하며

대궐 문밖에 거적을 깔고 자리를 만들어 부르짖기를 석달 동안이나 하였다
이에  대신들이 중종에게 아뢰기를

“금성대군이 비록 죄가 있다 하오나 옛 임금을 위하여 하게 된 것이요,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세조대왕께서도 사육신이 당세에는 역적이었으나 후세에는 충신이라 하셨으며 금성대군도 일체 무관(無關)이라 금성대군의 관작을 회복시키지 못하고 자손들이 금고(禁錮)를 당하고 있음은 실로 친친지의(親親之誼)가 어그러져 있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전에 이들은 관노의 신세였지만 이를 옳게 여기어 1519년(중종14) 자손 3세에게 승습(承襲)의 명을 내리고

관작을 봉하였다. 

아들 이맹한은 함종군(咸種君)에 추증되고 손자 이연장은 동평군(東平君)에 봉작 되었으며

정조때는 그의 자손들이 종친으로써 대접을 받아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세향일(歲享日)은 매년 10월첫 일요일 10시 파종회 주관으로하고

절사(節祀)는 정월초하룻날 · 한식일 · 추석날 자손 주관으로 모시고 있다.


제단은 전주이씨 금성대군파 종중에서 소유하며, 관리는 후손들이 맡고있다.

.


금성대군묘 아랫쪽에 있는 墓 하나는 평성감 이효인 금성대군 6세손의 묘이다


부인 청주한씨와 합장묘이다


그외 금성대군묘를 내려와서 초입 산기슭에는 금성대군의 자손들 묘가 여럿있다.


묘입구에서 오른쪽으로 500여미터 가면 금성대군 신도비가 산 아랫쪽에 있다

.

같은 鄕里에 살면서도 바쁘다는 핑개로 그냥 지나첬을뿐 관심을 두지않았다가 이번에 특별히 찾아가 참배를 마첬다

.




금성대군제단 가는길 동영상


관련자료 크릭하세요

http://blog.daum.net/_blog/hdn/ArticleContentsView.do?blogid=03Ou5&articleno=16055027&looping=0&longOpen=

'기행 > 역사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남한산성  (0) 2017.10.09
지천최명길묘   (0) 2017.10.04
영조태실  (0) 2017.06.26
의성 조문국사적지   (0) 2017.06.16
영주 금성대군신단  (0) 2017.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