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최명길 묘소 (충북 유형문화재 68호) 솔새김남식
지천(遲川)최명길(崔鳴吉, 1586∼1647)선생의 묘소는 충북 청주시 북이면 대율리에 있다
최명길 묘소는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학교를 다녔던 고향마을에 있다
우리가 어릴때는 최정승묘라 불렀으며 그때는 어떤 인물인지도 잘 모르고 墓 주위에서 놀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나무들이 자라 큰 숲을 이루고 있지만 그때는 나무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최명길은 선조 38년(1605)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 전적이 되었으며
광해군 6년(1614) 명나라와의 문제로 관직을 박탈하였다가 1623년 인조반정의 일등 공신이 되어 완성군이 되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당대 여론에 맞서 현실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고
청의 군대가 물러간 뒤 우의정이 되어 왕을 위로하고 흩어진 정사를 잘 정리하여 국내외가 안정 되도록 하였고
이후 좌의정을 거쳐 1638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영의정 사임후 1642년 다시 영의정에 복직하여 명나라와 비공식적 외교관계가 발각되어 1643년 청나라에
억류되었다가 소현세자와 함께 1645년 귀국하여 완성부원군에 진봉(進封)되었으며 계속 인조를 2년더
보필 하다가 오랜 병환으로 죽었다
인조와 봉림대군이 각각 내관(內官)을 보내어 장례를 치를 때까지 호상(護喪)하고 부조를 하였으며
친히 제사를 지내는 등 관례보다 더 후하게 장례를 했으며 3년상이 끝날 때까지 녹봉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문집으로 《지천집》 19권과 《지천주차(遲川奏箚)》 2권, 《경서기의 (經書記疑)》, 《병자봉사 (丙子封事)》등이 있다.
최명길 신도비는 1984년 충북 유형문화재 59호로 지정되었으며
지은이는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이고 전(篆)은 손자 최석정 본문의 서(書)는 증손 최창대이다
최명길신도비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위해 숙종 28년(1702)에 세워졌으며 현재 비문은 잘 보이지 않고
1979년 비의 보호를 위해 비각을 세웠다.
신도비는 정3품 이상 고관의 무덤 동남쪽에 남쪽을 향한 비석으로 왕명에 의하여 세워진다.
조선상국 증시 문충 (朝鮮相國 贈諡 文忠) 지천최공 명길 지묘 (遲川崔公 鳴吉 之墓)
영의정 의령남구만 서(領議政 宜寧 南九萬 書)
지천최명길 묘표 후면
최명길 묘소는 다른 묘처럼 부인과 좌우 또는 일렬 배치가 아니다
즉 최명길선생 묘역은 品자 형의 봉분으로 앞쪽에는 부인이고 뒷편 중앙에 호석을 두룬 봉분이 선생의 묘역이다
앞에 위치한 좌우의 봉분은 정경부인 인동장씨와 정경부인 양천허씨 봉분으로 먼저 作故한
두 婦人의 묘를 경기도 용인에서 이곳으로 이장하여 함께 조성하였다
野史 본부인 인동 장씨에게 아들이 없어 조카인 최후량을 양자로 들여 후사로 삼았다.
하지만 큰 부인이 죽고 재혼한 부인 허씨 부인이 아들 최후상을 낳았으나 최후량을 파양하지 않고 장남이라 하였다
허씨 소생 아들 최후상은 차남이라 했다는데......
친자가 있으면서 양자를 파양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최명길은 ....
'이미 아비와 자식이 정해지면 저절로 천륜(天倫)의 순서가 있으므로 바꿀 수 없다' 하며 파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 그는 조정에 청하여 최후량을 후사로 삼아 가산을 상속시켰자 주위 사람들은 의리에 탄복 했다고 하며
당시는 양자를 들였더라도 후처에서 아들이 생기면 파양 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최명길묘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전방 산속에 숙종때 영의정을 8번한 증손자 최석정묘가 있다
그는 근대 보기 드문 우리나라의 수학자로 9차 마방진을 고안해 냈으며 그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병자호란 역사의 현장 남한산성
삼전도비는 치욕의 歷史物이란 이유로 수차례의 수난과 이전을 거듭해 오다가 문화재의 고증과
경관심의를 거쳐 지금은 석촌호수 서편 송파대로 변에 설치 되었다.
영광의 역사만 기억하고 치욕의 역사를 끌어않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교훈을 얻지 못한다.
그 시대에 고민했던 문제들이 오늘 우리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지금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大義를 지키고자 했던 김상헌은 충절의 상징으로 추앙을 받았지만 나라를 지키고저 적과 맞서
孤軍奮鬪했던 최명길에게는 변절자로 치부되어 여론이 싸늘하여 오랫동안 매국노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당시 풍전등화의 戰時에서 감히 누구도 말 못하고 있는 싯점에
인조에게 목숨을 내놓고 용기있게 청과 화친을 주도한 최명길은 後代에서 재조명이 되고 있다
.
최근에 개봉한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을 슬기롭게 해결한 최명길보다는
김상헌을 중점 부각하려는 의도가 엿보인 것 같아 아쉬웠으며
특히 삼전도 굴복 때문에 김상헌이 자결하는 것으로 영화를 ending 하는 오점을 남겼다
그는 항복이 정해지자 식음을 전폐했지만 자결은 이런저런 이유로 미수에 그첬고
사실 최명길보다 5년을 더 살았다
찾아가는 길 => 중부고속도 증평IC에서
511번 지방도 내수 방향으로 5키로 지점 오일뱅크 주유소 200미터 전방 이정표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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