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과 병자호란 솔새김남식
남한산성하면 병자호란이 떠 오르고 인조의 삼전도 항복 그리고 이어서 최명길과 김상헌이 역사에서 떠 오르는 곳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으며 2014년 6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다
남한산성은 지하철 5호선 마천역에서 오르거나 승용차로 직접 오르는 곳으로 지금은 계절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여러코스를
이용하여 이곳을 오르고 있지만 그 아픈 역사를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며 얼마나 그 교훈을 않고 남한산성을 내려갈까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이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성터였다고도 하는데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 축성하였다.
하지만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가지 불충분 조건으로 인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를 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城 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1935년 후금 2대 청태종은 명과 몽골과 치른 전쟁에서 승승장구 하자 중원을 제패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명을 재차 공격하기 이전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1936년 12월 청 태종이 이끄는 약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내 달렸다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의 사회복구사업에 여념이 없었고 특히 인조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으로 인한
정예병의 손실등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인조는 부랴부랴 강화도를 향해 대궐을 나섰지만 비보가 날아들었다.
적군이 이미 양철평(지금녹번동)에 도달 했으며 강화도로 가는 길도 차단 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공황 상태에 빠진 인조는
대책을 물었지만 대답하는 신료가 없었다.
바로 그때 최명길이 나서 적진으로 가서 상황을 살피고 시간을 끌어 보겠다고 했다
당시는 전시(戰時)로 청군 지휘부가 최명길의 술책을 눈치 챘다면 그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가겠다고 자원을 하였고
凊將과 담판을 벌여 戰陣을 늦추는데 성공하여 인조는 남한산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했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그리고 세자등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가 위급을 느낄 때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위해 지방 각처에서 올라 온 근왕병들 마저 연일 패배하자 더욱 꼬여가기만 하였다
이제 구원병도 끊기고 군량은 날이 갈수록 고갈 되었고 매서운 추위에 얼어 죽는 병사까지 나오자
인조는 신료들에게 대책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조선은 어차피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것이라고 판단한 청태종은 느긋하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자
척화신들은 명에 대한 의리를 위해 망하더라도 결전을 벌이자고 하였다.
그러자 최명길은 조선의 왕이 명을 위해 종사를 포기할수는 없으며 생령들을 위해서라도 은인자중해야 한다고 한다.
그는 인조를 설득해 청의 요구를 받아 들이자고 했지만 명분이 지배하던 당시 그것은 힘겹고 고통스러운 과업이었다.
당시 그들의 기세나 전후 명과 전쟁에서 보여줬던 참혹한 행태를 볼 때 청의 협박은 빈말이 아니었다.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죽음은 견딜수 없고 치욕은 그래도 견딜 수 있는 것이라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치욕을 견디고
청과의 화친을 도모 하려는 최명길과 한나라의 군왕이 어찌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치욕스러운 삶을 구걸하려 하냐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청에 맞서 싸우려는 김상헌이 대결을 한다.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성이 무너지면 종사를 어디에 보존 하겠느냐며 현실적으로 최명길은 강화를 주장하는 최명길의 뜻에 따라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 나가 항복 문서를 전달하게 된다
그렇게 최명길은 결단을 이끌어 냄으로써 종사와 백성을 살렸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간신이라는 오명이 붙고 말았다.
당시 병자호란은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 청 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두달간의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만 백성이 청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삼전도비는 치욕의 歷史物이란 이유로 수차례의 수난과 이전을 거듭해 오다가 문화재의 고증과
경관심의를 거쳐 지금은 석촌호수 서편 송파대로 변에 설치 되었다.
영광의 역사만 기억하고 치욕의 역사를 끌어않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교훈을 얻지 못한채 그 시대에 고민했던 문제들이
오늘 우리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지금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상헌(1570~1652) 은 先後後和論者로 명분에 입각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했고
최명길(1586~1647)은 先和後戰論者로 실리를 중시한 민족의 지도자로서 병자호란을 슬기롭게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 역할을 하면서 익히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고저 적과 맞서 孤軍奮鬪했던 최명길에게는 변절자로 치부되어 여론이 싸늘하여 오랫동안 매국노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당시 풍전등화의 戰時에서 감히 누구도 말 못하고 있는 싯점에 인조에게 목숨을 내놓고 용기있게 청과 화친을 주도한
최명길은 後代에서 재조명이 되고 있다
최근에 개봉한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을 슬기롭게 해결한 최명길보다는 김상헌을 중점 부각하려는 의도가 엿보인 것 같아
아쉬웠으며 특히 삼전도 굴복 때문에 김상헌이 자결하는 것으로 영화를 ending 하는 오점을 남겼다
그는 항복이 정해지자 식음을 전폐했지만 자결은 이런저런 이유로 미수에 그첬고 사실 최명길보다 5년을 더 살았다
당시 이괄의 난을 평정한지 얼마되지 않아 청군이 의주에서 남쪽으로 광풍질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한양에는 소식은 늦게 전해젔다
두세번의 변란을 맞았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모두가 무사태평 안이한 생각을 하였으며 특히 인조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기 부친을 왕으로 추종하는데만 열을 올렸다.
그러하니 적을 막을 군사도 없고 제대로 된 전략도 없이 꿩이 머리만 처박고 몸을 숨기듯이 남한산성으로 피했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국가의 위기를 각기 다른 방법으로 청하자 인조는 답답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서린다
허나 그들이 보여주는 忠心이라면 전란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고 그것을 사전에 왜 막지 못했을까
다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의 생각과 판단은 지금의 우리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데 있다
지금 이 나라의 중심은 과연 국민에게 있는가
전세계가 전쟁을 걱정하고 있지만 그 당사자인 우리는 무덤덤하고 심각하지 않게 느끼고 있다
정말 위기가 다가오면 이겨낼 힘과 극복할 능력이 과연 있는지 모두가 안이한 생각으로 구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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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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