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여행일기

억지춘양

시인김남식 2017. 4. 22. 21:18

억지춘양 경북봉화 춘양역  솔새김남식 

영주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 춘양으로 출발 하였다 


서울에서 춘양까지 직접 연결되는 열차가 없고 영주역에서 환승을 해야 한다


봉화역을 지나서면 ...


열차에서 바라본 봉화 닭실마을 ...


영주에서 봉화역 법전역등 6개역을 지나서 40분만에 춘양역에 도착을 했다.


춘양역에 도착한 1682호 부전(釜山)발 정동진행 무궁화호 열차


내가 탄 열차는 동해남부선 + 중앙선 + 영암선 + 동해북부선을 지나는 선로이며 부산서 정동진까지 7시간 50분 所要 된다  



사람들을 내려놓고 다시 떠나는 열차의 뒷 모습을 바라보면 저 열차에는 어떤 사연을 싣고 다음역으로 가는 것일까 궁금하다   



어느 봄날 객지에서 돌아온 老客의 고향역은 오랫만에 돌아 왔어도 어머니품 같은 포근함에 웬지모를 그리움이

앞서는 것은 늙음이어다  


역구내에는 벚꽃이 흐트러지게 피어 있어 여행길에서 상큼한 기분을 더해 주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제법 큰 역이지만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이야 숫자로 꼽힌다 


역무실로 들어 가려는 역무원(女子)을 붙잡고 싱겁게 한마디 묻는다.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습니까?   


춘양역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에 위치해 있으며 영암선 영주 ~ 철암 개통으로 1955년 부터 영업을 시작 했다 


승부역에 있는 영암선개통 기념비문


대합실로 들어서면 "이것이 춘양목이다" 라는 안내판과 함께 標本 춘양목이 있고 剝製 호랑이가 낯선 방문객을 맞이한다  


춘양목은 우리나라 태백산을 중심으로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대에서 생산되는 수형이 곧고 재질이 좋은 붉은 소나무로  

一名 금강송 또는 적송이라고도 하는데 伐木한 춘양목을 이곳 춘양역에서 서울로 싣어 보냈다고 한다  


춘앙목은 주로 고궁이나 고관대작의 집을 짓거나 임금님 棺에 사용했다고 하네요

최근에는 古宮의 보수에 사용하고 있다는데 驛프렛트홈 주위와 역전앞마당 公園地에는 춘양목이 여러 數가 자라고 있다

 

곧게 자란 춘양목과 함께 벚꽃이 예쁘게 피어있는 아름다운 마을을 보니 여기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고산지역이라 옛날에는 호랑이가 있었는지 역전을 나오니 호랑이 剝製人形이 3 마리가 또 있어서 정말 깜짝 놀랬다


춘양역은 억지춘양이라는 방언이 유래한 驛으로 정동진과 대구 부전등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가 8회 가량

정차하는 보통역이고 또한 서울역 가는 O-train도 정차 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해서는 잘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기어이 무리하게 억지로 해 내려는 고집을 

재밋는 표현으로  ‘억지춘양’ 또는 ‘억지춘향’ 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때 발음이 서로 비숫해서 어느 것이 定言인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을 따지고 보면 억지로 수청을 들게한 '억지 변사또' 가 맞는 말 같기도 하고

그래서 억지춘향은 아닌것 같기도 하며 암튼 억지춘양을 억지춘향으로 발음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국어사전에는 억지춘향으로 있다

  

이 지역에서만 사용하는 억지춘양의 유래는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일반 소나무를 춘양면 특산물인 고급 춘양목으로 

다른 지역에서 억지로 속여 팔았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하나는 철로와 관계가 있다


이곳 춘양역과 이전역인 법전역 그리고 다음역인 녹동역 사이에서 약 10키로 선로가 곡선반경으로 가설되어 있어서

열차의 속도를 현재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아래지도 참조)


일제 강점기 당시 영암선을 부설 할 때는 본래 춘양을 통과하지 않기로 계획이 설계 되어 있었으나 해방후

자유당 집권시 이 지역 출신 정치인 정문흠(1892 ~ 1976년. 2,3,4대 국회의원)의 요구로 그 계획이 갑자기 수정되어서

억지로 춘양역을 경유하도록 철로가 굽어져 부설된 데서 '억지춘양'이 유래했다는 說이 재밋고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영암선은 우리나라 산업의 역동 지역으로서 화물 열차가 수시로 지나 다니고 있다


화물화차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열차기관차가 두개로 연결해서 끌고 굽은 선로를 서행으로 열차가 지나 간다



현재 춘양면은 인구 4,650여명으로 고택과 문화재등이 산재 한 곳으로 특히 산림 휴양 도시로써 유명하고

韓國山林 科學高等學校가 있다


또한 이 지역은 남북으로 형성된 高山의 긴협곡에 지형적 특색으로 기온이 낮아 한국의 시베리아라고 불리며 봄이 짧다고 한다


역전을 나서면 누군가 지나는 客이 한 잔 기우렸을 역전실비식당 선술집이 지금은 폐업정리중이다. 

 

그리고 깜끔하고 아담한 붉은 건물의 교회 건물도 보이고


또한 흔히 볼수 있는 전원주택의 그림 같은 집도 여러채 역전 주위에 있다


거리는 차와 지나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아 사색하며 걷는 재미가 있다 


면소재지 마을로 들어가려면 운곡하천에 있는 춘양대교를 건너야 한다


영동선 굽이 돌아 쉬어가는 곳 선조의 숨결어린 정겨운 내 고향 한수운곡(寒水雲谷) 의양 4리 마을 이장이 비를 세웠네요


역전을 나와서 운곡 하천을 건너서면 한수정이 기다린다


춘양에 있는 한수정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7호로 조선 중기의 학자인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

손자 석천공(石泉公)이 1608년(선조 41)에 건립했다.


한수정은 글자 그대로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라는 뜻이다



한수정은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연못과 바위, 그리고 수목이 잘 어울려 조화된 경관을 이루고 있다.


丁자형 평면의 건물이 동남향으로 위치하여 있고, 와룡연(臥龍淵)이라 불리는 연못이 삼면에 둘러져 있으며,

연못과 정자 사이에는 초연대(超然臺)라는 이름의 바위가 있다.



소유자는 안동권씨충정공파문중으로 문이 잠겨 있어서 안에는 들어 갈수 없었다.  


한수정을 나와서 낯선길을 30여분을 걸었다. 공기도 맑고 날씨도 따듯하고 하늘도 파랗고 기분도 푸르렀다

    

하천가에 있는 정자나무


한국삼림고등등학교에 있는 서동리 삼층석탑을 찾아 가는 중이다



서동리 입구에는 단정한 고향마을 서동이라는 단향서동(端鄕西洞) 이란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  


봉화서동리3층 석탑은 국보52호이다


한국산림과학고에 도착을 하니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포크레인 실습을 하고 있었다


보존상태는 그냥 그랬다

석탑은 동탑과 서탑의 쌍탑 형식으로 탑은 2층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것으로

통일신라 시대 건립으로 추정되며 ...


지금은 고등학교가 있는 자리는 옛날 신라시대 람화사(覽華寺)라는 절이 있던 옛터라고 하는데 흔적은 찻을 수 없다고 한다 


철책으로 보호하고는 있으나 ..........


탑바로 옆에서 학생들이 실습 공부를 하고 있어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돌아 나왔다 

 

학교 앞 큰 길을 아주 한참을 차를 타고 쭈욱 따라 가면 강원도 영월군이다   

.

학교에서 다시 면소재지쪽으로 2키로 쯤 떨어진 의양리 권진사댁을 찾아갔다



성암고택으로도 알려진 이곳은 1987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었으며 고택향연(古宅饗宴)도 한다고 한다



고택의 내부구조는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다녀 보아도 거의 비슷하다


권철연선생(先生)은 고종(高宗) 25년(188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가산(家産)이 여유(餘裕)해지자 찾아오는 빈객(賓客)이나 걸인을 후히 접대(接待)했으며 문인명사(文人名士)와

우국지사(憂國之士)들에 내왕(來往)이 잦았다고 한다


권철연선생의 아들 권상경(權相經, 1890~1955)은 어린 나이때 부터 독립운동 진영에 참여하고 활동하여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주인공이 고인이 된 표창장을 마당 한 쪽에 색인하여 세워 두었다 

 

성암고택을 나오면 철길 부근에는 두채의 외딴 별채(別莊)가 있다


첫번째 것은 성암고택의 어른 것이고 철길 바로 옆에 있는 것은 만산고택의 어른 것 이라고 한다


이 별채의 고택은 철길이 생기기전 부터 있었던 것이다




만산공 선생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후 벼슬을 버리시고 낙향하여 1910년에 계성산(桂成山) 태고동(太古同)에


작은 정자 태고정(太古亭)을 짓고 망미대(望美臺)에서 망국고신(亡國孤臣)의 한양을 바라보며 매일 한(恨)을 달래었다고 한다 



망미대 시(望美臺 詩)

임금향한 충성 받칠 길 없기에 때로 망미대에 오르노라
산하는 어이그리 적막한고 천시가 회복되기 두손 모아 빌뿐
군신간의 의리는 고금이 같거니 살거나 죽거나 그 충성 다할뿐
숲속에 숨은 고인 그 뜻 어이 앗으리오
목숨 버린 열사들은 그 얼마런가?
고사리 캐던 곧은 절개 천추 두고 우러르며
경술 밝아 높은 벼슬탄 유풍 백대 두고 높이리라
망미대앞에 부질없이 눈물 뿌리니 청구의 차가운 탈만 깊은 속마음 비치는구나


답사 도중 이곳에서 만산공 어른의 손자라는 분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본의 아니게 그분을 따라 만산고택까지 나섰다 

차를 마시며 조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나누었고 하룻밤 유하기를 권했지만 사양했다.


권진사 성암고택과 강진사 만산고택중 어느분이 더 으뜸이냐고 했더니 만산고택이라고 한다


파란 하늘위로 드높은 십자가를 뽐내는 춘양성당이 참 아름답고 고풍스러웠다


성당은 철길을 옆에 두고 있다


경상도지역은 과거 벼슬했던 사람이 많아서인지 서원도 많고 선비촌을 비롯하여 고택들이 많다


고택의 11칸 행랑채는 부를 상징하고 솟을대문은 가마나 말을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행랑보다 높게 지붕을 만든 것은

위세의 상징이라고 한다


봉화군 춘양면에 있는 진주 강씨 만산고택은 조선말기 문신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와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지냈으며

말년에 도산서원장을 역임한 만산 강용(晩山 姜鎔:1846~1934) 선생이 고종15년(1878)에 지은 집으로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문화제 제27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춘양목을 아낌없이 사용했다고 한다


소유 및 관리는 강용 선생의 손자인 강백기씨이며 만산고택과 함께 이웃에 있는 상암재에서는 전통한옥 문화체험 템플스테이

한국관광공사 인증을 받아 현재 각종체험 프로그램을 운영중에 있다


만선고택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강용 할아버지 선대께서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高宗)의 아버지 흥성대원군(興宣大院君)과 친분이 두터웠고

대과에서 장원급제를 하신 후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과 언론기관인 사간원(司諫院)에서 요직을 두루 맡았으며

강용 할아버지께서 태어 나셨을 때 흥성대원군이 직접 만산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손수 글씨까지 써 주었다고 강용의 고손자이자

현재 집주인인 강백기(姜百基)씨는 말한다. 만산은 천천히 큰 산을 이루라는 뜻을 갖고 있다.


또한 서실에는 영친왕 이은공(李垠公)이 8세때 쓴 한묵청록(翰墨淸綠)의 현액이 걸려있어서 그 당시 만산고택의

榮華를 보는 것 같다


강용선생의 외아들 의재공 필(泌. 1878~1942)은 을사조약이후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 운동에 참여하고 3천원의 독립자금을 헌성했는데 나중에 대구 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1995년 광복 50주년때 독립유공 표창이 추서 되었다.

강용선생의 아들 의재공은 현재 만선고택의 주인 강백기씨의 조부이다


특히 사랑채에서 밤낮으로 향기로운 글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아 춘양문중에서 인재가 누에고치 풀리듯

줄을 이어 배출되었다고 한다


별채는 바깥마당의 오른편 끝에서 왼편을 바라보는 자세로 자리 잡은 모습이고 사방을 쪽마루가 돌아가고 있는

작고 아담한 건물이다


성암재는 만선고택의 작은집으로 1915년 금강송으로 건립하여 강용선생의 손자인 성암 강승원에게 물려 주었고 성암의 손자인

강춘기님 부부가 고택 유지 및 보존을 하며 완성된 특별한 고택체험으로 유숙을 받고 있다


만선고택의 주인 강백기님과 성암재 강춘기님과는 재종이라고 한다



노부부는 옛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젊은부부들은  옛 것을 배우는 마음으로 시간과 여휴가 있다면

한번 떠나 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옛날 시골 부잣집 담장에는 겨울에 땔 장작더미를 저렇게 쌓아 놓았다


개교106주년을 맞이한 춘양초등학교 역사관이며 학습연구관 솔빛채


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듯 교정에는 고목들이 즐비하다


학교 건물이 현대식 건물보다는 옛 건물이 보기에 좋다


춘양목은 이곳 갑부들이 전답이부족하여 100여년전 부터 치산녹화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아침에 도착해서 시간은 어느덧 오후 4시를 넘기고 있다.

춘양에서 약 6키로 떨어진 법전역을 아침에 다녀 오니라 3시간을 헛 소비했다.


그곳은 교통이 좋지 않아서 택시를 타고 갔다가 법전에서 춘양으로 돌아 올때는 얼마나 먼가 하고 걸어 오는데

좀 힘이 들었으며 시골길을 두시간을 걸었더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다 


옛말에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바로 춘양장날이라고 합니다


주민이 많이 살고있지 않아서인지 시장터는 너무 한산했다.



오는 5월13일 산골야시장이 다양한 프로그램를 갖고 개장한다고 하는데 시간 되시는 분

경북봉화 춘양까지 한번 가 보길 권합니다


서울로 떠나기 전 헤어지기 너무 섭섭하여 순대를 채우고 막깔리 한잔 하러 시장터로 다시 들어 갑니다


그리고 불그레한 모습으로 시장을 나와서 오후 늦게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까지 4시간 요금은 21,000원이고 버스에 탄 사람은 저와 나머지 7사람 그래서 합이 8명이 탔고요 

밤 10시에 서울 도착했다



서울과 춘양은 하루 5번 버스가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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