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시인백과

송몽규 - 술가락

시인김남식 2017. 4. 6. 20:33

송몽규宋夢奎 (1917년 ~ 1945년)

 

 

 

윤동주의 고종사촌 형으로 같이 독립운동을 하던 수필가 겸

독립운동가로 1935년 은진중학교를 수료후 중국 낙양군관학교에 입교 훈련을 받고

그해 11월에 산동 제남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체포 되었지만

거주제한 조치를 받고 풀려났다.
그후 1937년 용정 대성중학교 4학년에 편입

1938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 
1942년 교토제국대학에서 서양사 전공으로 입학.
1943년 7월 재교토 조선인학생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체포

1944년 징역 2년을 받고 복역 중
1945년 3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93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콩트 <술가락>으로 당선
1938년에 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우지에 <하늘과 더부러>가 있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전보 한장을 받고 당시 일본에 도착한 윤동주의 부친은 화장하여 길림성으로 돌아오는데

약 20여일이 걸렸고 장례식날은 연희전문 시절 몽규와 함께 문우지에 실린

동주의 시 '자화상' 과 '새로운 길' 을 들려 주었다고 한다

장례식이 끝나자 그때 마침 일본 형무소에서는 송몽규가 사경을 헤메이고 있었다.

그도 같은 방법으로 장례식을 마첬다고 하는데

이들은 길림성 용정시 동산교회 묘지에 윤동주 시인과 함께 송몽규도 안장 되었다

송몽규는 "청년문사 송몽규지묘" 라고 윤동주는 "시인 윤동주지묘" 라고 각각 비를 세운다.

시인이나 독립운동가 보다는 장례가 총망되는 청년으로 키우려 했던 양쪽 집안의 부모들은

졸지에 자식을 잃고 말았으나 하늘이 무너지는 아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후세에 존경받는 인물로 사랑 받고 있다. solsae kns 

 

 

 

 

 

술가락 - 송몽규 .

 

 

우리 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 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러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外國) 가잇는 내 안해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대게 이러한 뜻이엇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1940년경 두만강 철교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책방 > 시인백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남식 뉴스보도  (0) 2020.01.21
이육사 - 청포도  (0) 2017.06.05
김남조 - 임  (0) 2017.01.10
서정주 - 국화 옆에서  (0) 2016.11.02
김민부 - 기다리는 마음  (0) 2016.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