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도원역에서 동인천역까지 문화유적걷기 솔새김남식
이곳은 한국철도 최초철도인 경인선 1차기공지로 한국철도100주년을 맞이하여 1999년에 세웠으며
도원역 1번 출구를 나와서 제물포역 방향으로 약 150미터 거슬러 올라가면 인도와 접한 철길의 철조망 옆에 비가 서 있다
한국철도 최초 기공지 비 (碑文內容)
이곳은 우리나라 첫 철도인 경인선을 기공한 터이다. 우리 나라 철도는 고종 황제로부터 부설권을 특허 받은 미국인
모스(James R.Morse)가 1987년 건양(建陽)2년 3월 22일 이곳 인천부 우각리(仁川府 牛角里.지금의도원역일대) 에서 공사를
시작한 데서 비롯한다. 이 기공식은 1825년 세계 최초로 영국에서 철도가 개통한 데에 비추어 보면 혁명적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철도의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제기했던 사람은 1899년 미국에서 귀국한 한국 대리 공사
이하영(李夏榮)이었으며 1894년 조선 정부는 드디어 철도 업무를 관장할 철도국을 정부내에 설치하였다.
이즈음 일본은 철도 부설권을 얻으려 홱책하였으나. 고종 황제는 이를 모스에게 특허하였다.
그러나 모스는 기공식후 곧 자금난을 겪게 되자 부설권을 일본인들의 경인철도인수조합에 넘겼고
이조합은 다시 이를 경인철도합자회사에게 되넘겼다.
부설권을 최종적으로 인수한 경인철도합자회사는 남은 공사를 모두 마치고 1899년 9월 18일 인천역과 노량진역에서
각각 개통식을 가졌다. 인천역과 노량진역 사이의 33.2Km에 달하는 경인선에 마침내 개화의 상징인 철마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달리기 시작하였던 것이였다. 이땅 인천에서 고고의 기적을 울리며 탄생한 철마는 비록 우리의 자본과 기술로 건설됐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인선 개통은 우리 교통사(交通史)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한국철도가 발전해 나가는 모태가 되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되는 오늘 이 역사적 사실을 되새기며 한국 철도와 인천광역시가
무궁하게 발전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이곳에 기념비를 세운다 1999년 9월 18일 정확한 기공장소는 이곳으로 부터
동쪽으로 400미터 지점이며 별도로 표지를 설치 하였다. 한국철도최초 기념지사업 추진위원회
다시 도원역으로 걸어 올라와 배다리 철길지하를 건너 (도원역북쪽방향) 인천세무소 옆길을 지나면 영화에서
나올법한 고풍스런 작은 건물이 보이는데 붉은 벽돌과 하얀창틀 그리고 지붕위로 나온 창문등 지나가는 사람들에 시선을 사로 잡는다.
이곳은 1993년에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 18호로 지정된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 이다
그리고 그 뒷쪽으로 인천시 유형문화재 39호인 영화초등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감리교에서 선교의 목적을 위해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학교로 붉은 벽돌의 신식 교육건물이다
기독교복지관과 영화초등학교를 잠시 구경을 하고 나왔다.
이곳 창영초등학교는 3.1운동 발상지이면서 강재구소령의 모교이고 또한 우리나라 최초공립학교로서 인천 시유형 문화재 17호이다
붉은 벽돌로 단정하게 지어 올려진 이 건물은 얼핏 보아도 세월의 손때를 고스란히 안고 있어 보인다
강재구 소령을 배출한 명문 창영초등학교인 이곳은 인천의 3.1 운동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학교 건물은 2002년 현충시설로 지정받았다고 한다
1907년 개교이래 100년의 역사를 기리는 비석과 인천의 근대사와 함께 해온 역사적인 교육의 산실로 이는 인천의 자랑이라고 한다
1937년생인 강재구소령은 창영초등학교 1950년 40회 졸업생이다
당시 강재구 대위는 1965년10월 월남파병을 앞두고 중대장으로서 수류탄 투척 훈련중 부하의 실수로
수류탄이 중대병력 가운데로 떨어져 일어난 사고로 희생 되었으며 사고현장인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성동리에 강재구소령 추모공원이 있다
이때 많은 병사들이 위험에 처하자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부하들을 구하고 29세의 꽃다운 나이에 전사하여
국민들에귀감이 되었고 후에 영화까지 만들어 홍보를 했다 강재구소령 안내판에는 목련꽃이 하나 가득 내려 앉아 있었다
당시 소령강재구영화는 부인과의 만남의 애잔한 스토리가 영화의 감동을 더해주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휴가차 집에 오는길 만원버스에서 우연히 만난뒤 주일교회 성가대에서 부인의 만난 강재구소령의 부인 성씨가 귀한 溫씨였다
창영개교 100주년 기념비를 동창회에서 세웠다
이곳이 초등학교라서 평일은 방문이 어렵고 가능한 휴일에 방문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
학교를 나와 배다리길을 걷는다. 휴일이라 그런지 서울과는 달리 거리가 한산하다
이 지역은 옛 부터 배다리라고 부르는데 배다리는 뜻은 '배를 잇달아 띄워 놓고 그 위에 널판을 건너질러 깐 다리' 로
바닷물이 드나들던 수로에 밀물때 배가 묶여 있던 곳으로 아마 그 배 위로 사람들이 건너 다녔던 것 같다
이곳은 서울 인사동같은 거리로 헌책방과 소품과 공방들이 여러곳 있다
요즘은 책을 사보는 사람이없지만 옛날에는 새책을 살수 없는 사람들은 헌책을 사서 공부를 하여 자신에 배운의 길을 텄다
옛날 조선말기 서양식 주화를 발행하던 전환국지
화도진지(花島鎭址)는 조선 후기 자주 나타나는 서구의 함선을 감시하기 위해서 군대가 주둔하던 곳으로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었다.
화도진의 설치는 인천 항구의 개방을 요구하는 일본에 대비하여 조정에서
어영대장 신정희와 강화유수 이경하에게 만들도록 하여 1879년 완성되었으나 갑오경장때 전소되었으나 1988년 복원되었다
특히 화도진은 1882년 5월과 6월에 한미수호통상조약과 한영· 한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장소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어영대장 신정희동상이 수도국산박물관앞에 있다 .
수도국산에 올라서면 인천시가 조망되고 자유공원이 손 아래서 보인다
공원 한쪽으로 장면총리가 이곳 출생이라고 팻말이 있다
우리나라 대표적 공익재단인 가천 길병원과 가천대학교 설립자인 이길여 여사의 원래 산부인과 병원자리 인
동인천역 앞에 산부인과 기념관이 있다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에게 보증금을 받지 않겠다는 약조로 돈대신 쌀가마와 옥수수,고구마등 진료비 대신 들고온 농산물을 전시해 놓았다.
가천길재단의 모태가 된 '이길여 산부인과가' 1950년대말 개원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지나는 사람들에 눈길을 끌고 있다
전시관은 분만 대기실과 수술실 그리고 입원실 등은 밀랍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했는데 보기가 좀 민방했다
1883년 인천개항 당시 만들어진 용동큰우물은 원래 이곳이 자연 연못으로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 우물 공원은 가천병원기념관과 이웃하고 있다
인천시는 민속자료 2호로 지정하고 1967년 우물을 보호하기 위해 정자를 만들었다고 하네요
동인천역 광장에 있는 한미기념탑비
동인천 문화유적 코스 (약 4시간소요)
지하철 1호선 도원역 --> 인천 근대화 유적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기공지) - 기독교 사회복지관(인천시 유형문화재)- 영화교 본관(우리나라최초 사립학교) - 창영초교(최초공립학교) - 배다리역사문화마을 -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 송현시장 - 송현배수지 - 화도진지 - 화평동냉면거리 - 이길녀산부인과기념관 - 순대국거리 --> 동인천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