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의선구자 홍영식(1855 ~ 1884)墓 솔새김남식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에 가려진 개화파의 선구자 홍영식의 묘를 찾아 볼셈으로 따뜻한 어느날 집을 나섰다.
당시 홍영식은 청군에 의해서 무참히 살해 되었으며 아울러 그의 집안도 불행을 당했다
홍영식의 묘가 여주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양평을 지나서 이포대교를 건너 북여주 IC를 지난 3키로 지점, 여주군 흥창면 문장리에 있다
문장초등학교 마을길을 따라 2키로 가량 들어가면 낯선 산기슭에 그가 있는 곳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村老가 길을 나섰더니 골목에는 수십마리의 개들이 엄호를 하고 있었는데 여기저기에서
개짖는 소리에 초행자 혼자는 좀 무서운 느낌이 든다
안내판을 따라서 가파른 산 길을 여러번 쉬어가며 200여 미터를 올라가야 한다
길 양편으로는 패기와 용기를 일찍 불살라 버린 그의 젊은 영혼을 달래이듯 봄이면 진달래꽃이 만발하게 도열해 있다
처음 그의 유해는 이복형 홍만식에 의해 당초 경기도 광주 초월면에 있다가 1903년 현 위치인
여주군 흥천면 문장리로 이장 되었으며 1986년 4월 여주군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
갑신정변후 부친 홍순목과 兄 홍만식은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으며 부친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며
자신의 명령에 따라 일가 20여명은 독약으로 자살 했으며 부친 자신도
역시 왕궁을 향해 3배를 올린 뒤에 자결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박영교등과 함께 대역죄로 노륙형을 받아 사지가 분할되어 각도에 효시 되었으며
동대문 밖에 버려진 시신은 후에 누군가가 수습하여 다른 시신들과 함께 비밀리에 암장해다고 하는데......
그리고 이복형 홍만식은 자수해서 1년을 복역을 하였고 동생 홍정식(洪正植)은 홍정표(洪正杓)로 이름을 바꾸고 살아 남았다
兄홍만식은 이후 구한말 애국자로 1866년(고종 3)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검열·수찬·집의 등을 역임하고 동부승지를 거쳐
여주목사에 제수되었고 그후 이조참판까지 지냈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음독 자살 하였다.
고종은 그 충의를 높이 평가, 숭정대부 참정대신(崇政大夫參政大臣)에 증직하고, 장례를 후히 지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홍영식(1855~1884)
조선 말기의 문신, 외교관, 시인이며 개화파 정치인으로 갑신정변의 주역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 본관은 남양(南陽) 서울 출신
홍영식은 일찌기 개화의 선구자로 우편제도를 처음 도입한 사람으로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홍순목(洪淳穆)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홍순목은 사별하고 재혼한 부인 전주이씨에게서 둘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는 몸이 병약하여 자주 병을 앓았고
8세에 생모가 사망하여 계모에게서 성장하였다.
1872년 칠석제 과거에 합격하고 187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의 여러관직을 역임했으며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일본 군사시설에 대한 보고서 일본육군 총제(總制) 일본육군 조전(操典)를 고종에게 올렸다.
1883년에는 고종의 특사 민영익의 부사로 미국에 다녀와 국내에 농기계를 최초로 도입시켰으며 병조참판을 거쳐
1884년 3월 우정국 총판에 임명되어 우정국을 설치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상소로 복권되었으나 김홍집의 실각후 다시 추탈 되었다
그후 1910년(융희 4년) 최종적으로 복권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 규장각 대제학(奎章閣大提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비석은 1977년 2월 13일 체신공무원 훈련소 소장 정규석이 세우고 비문을 썼으며 봄이면 이곳에서 제례를 한다
碑文에는 갑신정변의 槪要와 혈손이 없어서 형에게서 양자를 했으나 6.25때 행방 불명되었고
다시 또 양 손자를 했으나 그리 변변치 못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으며 이후 그의 삶을 교훈으로 삶고저
교직원 및 훈련생이 이 비를 세운다고 적혀있다
홍영식의 묘는 가족이 없어 돌보는 이가 없어서 그간 방치 되었던 것을 비문을 세우고 여주 우체국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여주는 명성황후의 생가(生家)를 보존하고 있는 고장으로서
당시 온건개화파에 섰던 명성황후를 홍영식등을 비롯하여 급진 개화파는 타도의 대상으로 구한말 개화정책의 이견에 섰던
두 인물이 모두 여주와 인연을 맺은 셈이다
하지만 외세의 개입으로 뜻을 펴보지 못한채 민비나 홍영식 두사람은 역사의 제물로 일찌기 단명하였다.
언제나 역사는 잘못을 시인하지만 우리 민족은 매번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참배를 마치고 나오는 길 봄나물을 한줌 뜯어서 집에 돌아와 무침 반찬으로 막갈리 한 잔 하며 탄행정국의 요즘 시국을 걱정하였다
서울 중앙우체국內에 있는 우정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홍영식 흉상
서울 중앙우체국 현관앞에 있는 홍영식동상
그리고 이 지역은 참외 특산지로 오월이 되면 도로 양쪽으로 상점들이 즐비하다
봄날이 되면 주위 학생들이 소풍겸 놀러 온다고 하는데 墓에 이르는 목책계단 길에는 진달래 꽃이 만발하면 볼만 하겠다
이포대교 건너에 있는 파사성은 주차장에서 약 45분 이면 정상에 오르며 조망이 너무 좋은 곳으로 양평 오일장에 들려서
봄철 가족과 여행 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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