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과 김옥균의묘 솔새김남식
한시대의 풍운아 이면서 조선의 약점을 극복하려 했던 김옥균(1851~ 1894)의 墓(유허지)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 13-1호로 아산 방조제에서 아산시로 내려가는 39번국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영인면소재지에 있다
김옥균은 구한말 개화와 개혁을 주장하는 혁명가이며 정치가로 1851년에 충남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에서 태어났다
당숙 김병기의 양자로 입양되어 서울에서 자랐으며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 오면서 일본의 문물을 보고
감탄한 김옥균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호조참판등을 역임하면서 개화파 확산에 힘을 쓰게 된다.
김옥균을 비롯한 일부 세력은 정치적.사회적 변혁을 하려했지만 근본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 하게 되는데
당시 관료들은 오직 사리사욕과 권력욕에 사로 잡혀서 일본을 비롯한 서양 세력에 충분히 대처 할 수 있는 준비가 없었다.
김옥균은 비전은 가지고 있었으나 국내외 역량을 동원할 수 있는 인재도 인맥도 결국 부족했으며
주도 세력과의 협력에도 호응하지 못한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갑신정변을 시도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정변은 삼일천하로 실패하고 말았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비밀리에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연일 암살 위험으로 자신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자
1894년 3월 청국으로 다시 망명을 하게 된다.
그러나 떠돌이 10년 생활의 종지부는 민씨측에서 보낸 홍종우에게 상해에서 저격 당하면서 일생을 마치게 된다
그의 유해는 4월27일 강화도 양화진에 도착해서 능지처참으로 저잣거리에 謀反大逆不道로
효시된 후 실종이 되었다고 한다
연고가 없는 이곳에 묻히게 된 이유는 김옥균의 아들 김영진이 이곳 아산 군수로 재직시 조성했다고 한다.
원래 김옥균의 묘는 일본東京 청산외인 묘지에 있던 것을 이장하여 부인 유씨와 합장하여 1914년에 再 조성하였다
당시 일본에 있던 묘는 衣鉢墓로 그가 일본에 남긴 머리카락과 의복을 김옥균의 호위역이었던
와다 엔지로에게 비밀리로 넘겨 받아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 일본의 혁명가) 에 의해서
아사쿠사 혼간지로 안치한 뒤 사후에 제사를 지냈다. 다시 말해서 묘에는 屍身이 없다
한편 김옥균의 아들 김영진(1876~1947)은 일제 강점기때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지방 여러곳의 군수를 지냈으며
관직에 있을때 불범을 많이했으며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895년 11월 갑오개혁으로 개화당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사면·복권되었고
아관파천후 복권이 취소 되었다가 다시 1910년 순종때 다시 복권되어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 되었으며 시호는 충달이다
미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것에 맞게 역량을 집중해야 하지만 때로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 처럼 좀더 치밀한 계획으로 추진했다면 실패하지 않을터인데 과한 욕심에
섯불리 단행했던 것이 실패의 원인 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갑신정변이 성공했다면 이라는 말은 하지 않아야 겠지요
구한말 정치적으로 어두웠던 그시대를 살아온 많은 인재들이 희생되기도 했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만큼 되지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한일합방을 막지 못한 게 우리 역사의 치옥으로 잘못된 역사를 다시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한다
김옥균(金玉均, 1851년 ~ 1894년) 장동신안동(新安東)김씨, 조선말기의 정치가, 사상가
급진개화로 1872년 문과 장원급제후 여러 요직을 두루거쳤고 충의계를 조직해 개화사상 확산에 힘 썼으며
임오군란 후 일본식 급진개혁을 주장했으나 양무운동식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외척민씨 세력에 여러번 발목을 잡히자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한다.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 12월 4일(고종 21년 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무력정변의 쿠데타이다.
1884년초 부터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등은 정변을 준비하여 그해 7월 부터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2월 4일 저녁 우정국(郵政局) 낙성식때 정변을 일으키게 된다. 고종 내외와 왕비를 경우궁으로 피신시킨 뒤
민태호 민겸호, 민승호, 민규호등 민씨일가를 처형한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창덕궁으로 돌아가야한다고 강력한 요구로 인하여 결국 다음날 창덕궁으로 환궁하는 사이
민씨 정권측은 袁世凱가 이끄는 청나라 주둔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12월 6일 중국 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인민 평등권 확립, 조세제도 등의 개혁정책을 내 놓았지만
오후에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만에 진압되었다.
홍영식, 박영교등은 청나라군과 싸우다가 당일 전사하였고,
김옥균, 서재필, 윤치호, 박영효등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는데 이 사건의 역사는 '삼일천하' 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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