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초김부용 김이양 묘 솔새김남식
충남 아산시 광덕산으로 오르는 길목 입구인 광덕사에서 오른쪽 산길을 10여분 가량 올라가면
낡은 목판으로 된 부용묘 이정표가 있다
김운초(金雲楚)[1820~1869] 호는 부용(芙蓉)
황해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네살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살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양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어려서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된다
김부용은 12세에 기적(妓籍)에 오른 기녀였지만
16세에 평안도 성천군민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漢詩 350여 수를 남겼으며
시문집으로는 『운초당시고(雲楚堂詩稿)』와 『오강루 문집(五江樓文集)』 등이 있다
부용의 묘가 발견된 것은 작가 정비석선생이 1975년 명기열전을 지으면서
여러 사람의 혼신 노력끝에 부용의 묘로 확인하고
1977년 묘비(아래사진참조)까지 세워 후세문인 詩客들에게 안겨 주었다
당시 성천부사 유관준은 김이양의 제자였는데 어느날 부용을 그에게 안내를 하자"
나이가 많아 남자 구실을 제대로 못 하므로 사양하겠다"고 은근 슬쩍 청을 거부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김부용은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하면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세상에는 30노인이 있는가 하면 80청년도 있는 법입니다" 라고
답변을 하자 부용을 거둬 들인 평안도 감사 김이양은 그녀의 試材에 탄복하고 수많은 詩文을 주고 받았다
그나저나 18세 기생과 77세 대감의 사랑은 진실이었을까?
아무튼 나이를 초월한 사랑이었다
그후 김이양(金履陽)이 호조판서가 되어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자 부용(芙蓉)을 妓籍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어 부실(室)로 삼고 훗날을 기약하며 혼자 한양으로 떠나게 된다
생이별을 한 부용(芙蓉)은 재회의 날만 기다리며 외로움과 그리움의 날을 보내다가 애절한 詩를 써서
김이양에게 人便으로 보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이다.
부용(芙蓉)이 남긴 시中 가장 아름다운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 보탑시(寶塔詩)
이별하옵니다
그립습니다
길은 멀고
글월은 더디옵니다
생각은 님께 있으나
몸은 이 곳에 머뭅니다
비단 수건은 눈물에 젖었건만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없습니다
향각서 종소리 들려 오는 이 밤
연광정에서 달이 떠오르는 이 때
쓸쓸한 베게에 의지했다가 잔몽에 놀라 깨어
돌아오는 구름을 바라보니 멀리 떨어져 있음이 슬픔니다
만날 날 수심으로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며
새벽이면 정다운 글월 펴 들고 턱을 괴고 우옵니다
용모는 초췌해져 거울을 대하니 눈물 뿐이고
목소리도 흐느끼니 사람 기다리기가 이다지도 슬픔니다
은장도로 장을 끊어 죽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비단신 끌며 먼 하늘 바라보니 의심도 많습니다
어제도 안 오시고 오늘도 안 오시니 낭군은 어찌 그리 신의가 없읍니까
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저녘에도 멀리 바리 보니 첩만 홀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말을 몰고 오시려 합니까
장림이 바다로 변한 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렵니까
이별은 많고 만남은 적으니 세상사를 누가 알 수 있으며
악연은 길고 호연은 짧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읍니까
운우무산에 행적이 끊기었으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즐기시나요
월하봉대에 피리 소리 끊기었으니 농옥의 정을 어떤 여자와 나누고 계십니까
잊고자해도 잊기가 어려워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안타깝게도 홍안만 늙어가고
생각치 말자해도 절로 생각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도다 검은 머리 자꾸 쇠해가고
홀로 빈 방에 누우니 눈물이 비오 듯하나 삼생의 가약이야 어찌 변할 수 있으며
혼자 잠자리에 누었으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된들 백 년 정심이야 어찌 바꿀 수 있으랴
낮잠을 깨어 창을 열고 화류계년을 맞아들여 즐기기도 했으나 모두 정 없는 나그네 뿐이고
베게를 밀고 향내 나는 옷으로 춤을 춰 보았으나 모두가 가증한 사내 뿐 입니다.
천리에 사람 기다리기 어렵고 사람 기다리기 이토록 어려우니 군자의 박정은 어찌 이다지도 심하십니까
삼시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문을 나가 바라보기 애처 로운 천첩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오직 바라옵건데 관인하신 대장부께서는 강을 건너 오셔서 구연의 촛불 아래 흔연 히 대해 주시고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가운데서 길이 울지 않게 해 주옵소서
김이양은 83세에 벼슬에서 물러나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두 사람은 즐거운 生을 누리다가 91세에 부용의 손을 꼭 잡고
눈을 감는데 이때 33세 부용은 詩를 하나 남기게 된다.
風流氣槪湖山主 - 풍류와 기개는 호산의 주인이요
經術文章宰相材 - 경술과 문장은 재상이로다
十五年來今日流 - 15년 정든 임 오늘에야 가시는가
峨洋一斷復誰裁 - 끊어진 우리인연 누가 다시 이어줄까 ?
그후 부용은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며 외부와의 인연을 끊고 16년을 더 살았으며
"내가 죽거든 대감님이 묻혀있는 천안의 태화산(광적산줄기) 기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함께했던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이매창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여류 시인 中 한 명으로 불리는 김부용
그녀는 평양감사와 호조 판서를 지낸 김이양(金履陽)의 부실로 들어 갔으며 죽어서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히게 된다
그들의 만남과 애뜻한 사랑이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고 있는데........
김이양이 先祖에게 성묘 갈때 운초는 婦人 자격으로 따라갔던 것으로 사료되며 이곳 광덕산에는
먼저 세상을 떠나 부인묘가 있었다
김이양의 墓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김부용묘 부근에는 반드시 김이양 묘가 있을거라는 추측에
여러 루트를 통하여 확인하고 이곳을 여러번 산행을 해서 드디어 찾아냈다
묘를 찾아도 특별한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그들의 언약을 부러워하며 궁금해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자신에 부모의 墓는 일년에 한 두번 갈까말까 하는데 죽은자의 묘를 찾아 다니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우선 대웅전 뒷쪽에서 올라가는 계곡길 저 산 끝에 제법 큰 묘가 있는데 그것은 김이양 묘가 아니고
그곳에서 다시 30여분을 더 올라 가야 하는데 山속이라서 초행자는 여간 찾기 어렵다
그래서 김이양의 묘를 찾을 요량으로 광덕사 대웅전 뒷쪽 방향의 산으로 무작정 올라 가 보니 약 500미터 지점에
대나무 숲 길에서 큰 바위와 함께 제법 큰 묘가 나타나 김이양 묘로 착각을 하게 했다
하지만 다시 이곳에서 산 길이 없는 소나무 숲속으로 계속 올라가니 능선 방향에 묘가 있다
세월이 오래되었는지 유족이 없는지 산중 깊은 곳에 있는 김이양의 묘는 관리하는 후손이 없는듯 했다
그나저나 男便 김이양과 김부용의 묘와의 거리는 약 3키로 이상으로 山谷을 여러개 넘어가야
만날 수가 있으니 이를 어쩌랴!!
김이양 (1761∼1852) 조선후기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명여(命汝)
1795년(정조19)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급제, 1812년(순조12) 함경도 관찰사로 있을때 김부용을 만났으며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호조판서가 되었으며 1819년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이 되었다
이듬해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에 올랐으며 1844년(헌종 10)에 만 90세가 되어 궤장(几杖)이 하사 되었으며
그 이듬해 봉조하(奉朝賀)로 있다가 죽었으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봉조하 = 전직 관원을 예우 차원에서 70세로 퇴임한 종이품(從二品) 이상의 관리에게 내린 벼슬
궤장 = 임금이 국가에 공이 많은 늙은 신하에게 주는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이르던 말
五言絶句
春風忽태蕩 (춘풍홀태탕) 봄바람은 화창하게 불어오는데
山日又黃昏 (산일우황혼) 서산에는 또하루 해가 저문다
亦如終不至 (역여종부지) 기다리는 님 소식은 끝내없어도
猶自惜關門 (유자석관문) 그래도 아쉬움에 문을 못닫네
七言絶句
垂楊深處依開窓 (수양심처의개창) 수양버들 늘어진 창을 열고 기대서니
小院無人長綠苔 (소원무인장녹태) 님없는 뜰엔 푸른 이끼만 길게 자라네
簾外時聞風自起 (렴외시문풍자기) 주렴 밖에 가끔 바람이 절로 일어서
機回錯認故人來 (기회착인고인래) 님이 오시나 속은 것이 몇번 이던고
2019년 5월봄날 5년만에 다시 찾은 김부용 & 김이양 墓
어느 해 봄 다시 찾은 광덕사 입구
광덕사
김부용묘
*부용(芙蓉)은 연꽃의 이명으로 운초의 이름
이전에는 김부용묘 윗쪽으로 默苗가 있었으나 깜끔하게 정리를 했다
광덕사 뒤에 있는 부도
김이양묘
김부용 묘는 그래도 누군가 관리를 해 주는데 김이양 묘는 여전히 매번 갈 때 마다 잡풀이 무성하다
김부용묘에서 한시간 이상을 더 올라가야 하기 때문일까? 그는 세월을 미워하겠지
매번 광덕산을 올라갈때 등산로를 외면하고 이곳으로 정상까지 올라간다 kns
.
세월이 오래되었는지 유족이 없는지 산중 깊은 곳에 있는 김이양의 묘는 여전히 관리하는 후손이 없는듯 하여
그래서 죽은뒤에도 내 자리가 아름다워야 한다 solsae kns
운초시의 향기
수많은 시 들 중에 몇 편을.......
1) 暮春 出 東門(모춘출동문) 늦은봄에 동문을 나서며
日永山深 碧艸薰(일영산심 벽초훈)
一春歸路 査難分(일춘귀로 사난분)
借問此身 何所似(차문차신 하소사)
夕陽天末 見孤雲(석양천말 견고운)
날은 길고 산은 깊어 풀 향내 짙어졌으니
봄이 가버린 길이 묘연해 찾아내지 못하겠네.
그대에게 묻노니 이내 몸이 무엇 같던가!
저녁노을 하늘 끝에 외로운 구름만 보이네.
2)惜春(석춘)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孤鶯啼歇 雨絲료(고앵제헐 우사료)
窓掩黃昏 暖碧紗(창엄황혼 난벼사)
無計留春 春己老(무계유춘 춘기로)
玉甁聯揷 假梅花(옥병련삽 가매화)
외로운 꾀꼴새 울기를 그치고 실비는 비껴 내리는데
저녁노을이 창에 덮이자 푸른 비단이 따뜻해라
가는 봄 붙잡아 둘 계책이 전혀 없으니
꽃병에다가 매화나 꽂아 두어야겠네.
3)落梅(낙매) 지는 매화
玉貌氷肌 冉冉哀(옥모빙기 염염애)
東風結子 綠生枝(동풍결자 록생지)
纏綿不斷 春消息(전면불단 춘소식)
猶勝人間 恨別離(유승인간 한별리)
옥 같은 얼굴 얼음 같은 살결이 애틋하게 여위었는데
봄바람에 열매 맺고 푸른 가지도 돋았네.
그치지 않고 봄 소식을 알려주니
인간세상의 한스런 이별보다 오히려 나아라.
4)過山村(과산촌) 산마을을 지나다가
花落流水 似天台(화락유수 사천태)
千尺危岩 屹古臺(천척위암 흘고대)
四顧山空 人語絶(사고산공 인어절)
林風吹作 雨聲來(임풍취작 우성래)
흐르는 시냇물에 꽃이 떨어지니 천태산 같아
천 척 높은 바위까지 우뚝 솟았네.
사방을 둘러봐도 산이 텅 비어 말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숲에서 바람이 불어와 비 오는 소리를 내네.
*천태산(天台山)은 중국절강성에 있는 명산이라 한다.
5)香山途中(향산도중) 묘향산 가는 길에
桃花馬上 石榴裙(도화마상 석유군)
一路繁華 四使君(일로번화 사사군)
未入仙區 心已醉(미입선구 심이취)
碧雲蒼樹 査離分(벽운창수 사이분)
복숭아꽃 안장 위에
석류무늬 치마로
한 길에 나서니
네 분의 사군까지 화려키도 하다
신선이 있는 곳
가기 전에 마음이 이미 취해
푸른 구름, 푸른 나무를
분간키 어렵구나.
*향산(香山)은 묘향산을 말하며 영변에서 북쪽으로 130리쯤에 있다.
6)杏花村(행화촌)
輕舟一葉 泊平沙(경주일엽 박평사)
流水靑山 進士家(유수청산 진사가)
未刦村中 名己好(마겁촌중 명기호)
東風紅落 滿庭花(동풍홍락 만정화)
일엽편주를 모래밭에 대니
청산유수가 진사의 집일세
마을에 닿기도 전에 이름부터 좋아서
봄바람에 떨어진 꽃잎들이 뜨락에 가득해라.
부용당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옥구슬 일천 섬을
유리 쟁반에 쏟아 붓는구나.
알알이 동그란 모양이
물나라 신선이 빚은 환약일세.
*행화촌은 살꽃이 피는 마을로 조선에 살구꽃이 안 피는 마을이 어디 있으리오.
한시에서는 주막을 의미한다. 두목(杜牧)이 지은 청명시(淸明詩)에 길손이 주막이 어디 있냐고
물으니 살구꽃이 핀 곳을 가르치네. 라는 시가 유명해지면서 봄경지의 주막을 의미한다.
7)送人(임을 보내며)
春風驛路 雨如絲(춘풍역로 우여사)
日暮西樓 唱竹枝(일모서루 창죽지)
君去試看 淸浿上(군거시간 청패상)
衣冠猶似 井田時(의관유사 정전시)
봄바람 부는 역로에 실처럼 비가 내리는데,
날 저문 서루에서 죽지사를 부르네.
그대 가면서 맑은 대동강 위를 보소
정전을 갈던 그 시대와 옷차림이 비슷하다오.
한국문인협회 천안 지부가 매년 4월말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기행 > 역사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화파의 선구자 홍영식 묘 (0) | 2017.03.14 |
---|---|
김옥균과 갑신정변 (0) | 2017.03.01 |
감은사지 삼층석탑 (0) | 2017.02.23 |
세검정 부암동 나들이 (0) | 2016.12.20 |
홍은동 북한산 자락길 (0) | 2016.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