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세검정 부암동 나들이

시인김남식 2016. 12. 20. 11:36

세검정 부암동 나들이  솔새김남식


탕춘대 성곽(城郭)은 북한산(北漢山)의 지맥(地脈)을 따라 향로봉(香爐峰) 비봉(碑峰)을 거쳐 백운대까지

북한산성(北漢山城)과 연결되는 군사(軍事) 방어용(防禦用) 성곽(城郭)이다.


탕춘대성을 따라 홍제천으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봄이면 개나리가 장관을 이루는 길 이다


내부순환도로 굴속으로 자동차들이 빨려들어 간다


달동네가 오히려 정감을 주는 오르막 골목길 풍경


홍지문에서 홍은동 방향으로 200여미터 하천을 따라 내려가면 포방터시장이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끝나고 외곽을 방어할때 훈련장이 생기면서 포쏘는 연습을 했던 곳이라해서 포방터라고 하는데

 

이후 625 전쟁후 많은 피난민들이 이곳에 모여 살게 되면서 자연히 시장도 생기면서 포방터시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시장입구 건물에는 포졸이 포를 쏘는 벽화 그림이 있다


북한산에서 내려온 탕춘대성(蕩春臺城)은 홍제천변(弘濟川邊) 홍지문(弘智門)과 오간수대문(五間水大門)을 지나서  

한양도성(漢陽都城)으로 이어진다


성곽(城郭) 역할(役割)을 하는 인왕산 기차(汽車)바위를 거쳐 인왕산 정상(頂上)에서 한양도성(漢陽都城)과 만나게 된다


오간수대문(五間水大門)과 홍지문(弘智門)이 1921년 홍수로 유실되었다가 1977년 성곽을 포함하여 복원하였다



홍지문(弘智門) 현판(懸板)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大統領) 글씨라고 한다



부암동(付岩洞)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仁王山)에 포근히 감싸인 도심속 전원마을로

번잡한 도심과는 전혀 다른 산골마을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상명대입구 안내판을 따라 90여미터 오르막 골목길을 들어가면 이광수별장이 있던 곳으로


당시 조선일보 부사장이었던 이광수가 1934년 부터 5년간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곳이다


현재 건물은 당시 가옥이 아니고 1970년 신축된 건물로 향나무와 우물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지만 

주인이 문은 걸어 잠갔다

집이 가파른 언덕길에 있어서 담장으로 내부를 들여다 볼수가 없으나 키큰 향나무는 길에서 보인다


홍제천을 따라 올라가면 세검정이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널리 알려진 이름이어서 정자를 중심으로 해서

그 일대 즉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평창동을 통틀어서 그냥 세검정이라 부른다

.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이귀(李貴), 김류(金瑬) 그 밖의 서인(西人) 세력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光海君)을

폐위할 것을 의논하고 결행을 한후 이곳에서 칼을 씻은 데서 세검정(洗劍亭)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당시 창의문을 부수고 궐내 진입하는데 성공한 반정군은 나중에 계곡에 정자를 짓고 후일담을 나눴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 현실에서는 칼을 씻었다는 어떠한 기록도 없다고 하며 당시 인조반정은 광해군의 패륜 보다는 

서인 세력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일으킨 정변이라고 한

 



세검정 건너편에 있는 소림사는 중국 영화에 자주 나오는 이름처럼 절이 산비탈 막다른 길에 있는 비구니 사찰이다


세검정 상명대앞 사거리에서 세검정 초등학교쪽으로 오르는 월드캐슬 정문앞 암벽아래 탕춘대 표지석이 있는데 

예측건데 이곳에서 100m쯤 되는 산봉우리 소림사 절 위가 탕춘대가 아닌가 추측 된다


당시 이곳은 송림사이로 병풍을 두른듯 기암절벽의 절경으로 계곡 사이로 흐르는 물이 깊고 좋아서 

놀기 좋아하는 연산군이 수각을 짓고 미희들과 세월을 낚던 곳이 바로 탕춘대이다


탕춘대 표지석 위에는 宋 어느 독지가의 은공을 기리는 비석이 있는데   

특이한 것은 1968년 1.21 사태때 총알이 비껴간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 있기에 지나는 길 살펴 보았다  

세검정삼거리에는 높은음자리표 음악쉼터 공원이 있어서 간혹 길거리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있다


이곳은 아름다운 경관과 도심과 가까운 잇점으로 조선 초부터 도성(都城) 밖 경승지로

부암동 명소에 대한 설명이 담긴 둥그런 돌의자가 여러개 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찿거나 아들을 원하는 사람에게 소원을 비는 부침바위가 있다 


세섬정 삼거리에 있는 석파랑은 흥선대원군이 별장 석파정 사랑채를 고스란히 옮겨와서 1958년 손재형 선생이

지은 곳으로 1993년에 개업한 최고급 궁중 한정식 레스토랑으로 가격은 5만원에서 15만까지 이다


석파정 정문은 굳게 닫혀있다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부대시설로 유로 관람후 미술관 3층을 통해서만 입장을 할 수가 있다

서울미술관의 전시 시설을 구경하고 3층 옥상을 통해서 석파정으로 나가야 한다



석파정은 원래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로 안동 김씨의 세도가로 영의정을 지낸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의

소유였으나 흥선대원군이 섭정의 자리에 오르자 김흥근이 흥선대원군에게 상납했으며 

자신의 호를 본따 석파정으로 바꿔 불렀다.


후원으로 나 있는 산책길을 따라 가면 도시속의 산골이 연출되어 아늑한 분위가 연출된다


석파정안에 있는 코끼리바위


석파정 정문은 굳게 닫혀있다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골목길을 2분 정도 들어서면 새로운 명소로 주목 받는 무계원이 있다

이곳은 안평대군 별장 무계정사가 있었던 곳으로 무계원은 한옥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서 겉으로 보면 최근에 지어진

집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100년 이상 묵은 한옥이다


이 무계원 한옥은 원래 종로구 종로구 익선동(益善洞, 종로3가 북쪽)에 있었던 고급요정 오진암 건물을 이쪽으로

이전하여 새로 지은 집으로 오진암의 원주인은 서화가(書畵家) 송은 이병직(松隱 李秉直, 1896~1973)이

1910년에 지었던 집으로 당시 700평 규모로 여기서 글씨와 그림을 그렸는데 사군자중 난과 죽을 잘 그렸다고 한다



그후 1953년 조모씨가 이집을 구매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요정인 오진암(梧珍庵)인 열게 되는데 
오진암이란 이름은 큰 오동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어서 서울에는 청운각과 대원각, 삼청각등 요정이 생겨서 과거 요정 정치의 악명을 떨치게 된다.
특히 오진암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 낸 역사의 현장이다



서민들은 얼씬도 하지 못한 그야말로 있는 있는 자와 권력층의 폐쇄된 공간이었던 요정들이 하나둘 시대변천으로

사라지고 매상이 줄자 주인은 집을 내놓게 되자 이곳을 사들인 사업자는 관광호텔을 짓고자 오진암을 철거 하는데 ~~


오래된 한옥이고 풍류문화가 깃든 현장이라 보존가치 여론도 적지 않았으나 지정문화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구청에서 방관하다가 다행히 늦게나마 호텔 사업자와 협의를 벌여서 2010년 오진암을 다른 곳으로

이건(移建)하기로 하고 철거된 목조를 모아 두었다가 2012년 2월 복원 공사를 벌여 2013년 11월 완성했다


공사가 완료되자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곳이 무계정사터의 일부임을 내세워 고심 끝에 무계원이란 간판을 걸고, 2014년 3월 20일 개관하였다. 이곳은 안평대군의 별장인 무계정사터 아랫쪽이다 


대문에 걸린 파란색 무계원 현판의 위엄글씨가 마치 살아서 율동을 부리는 것 같다.

'武'자는 꼭 칼질을 하는 것 같고,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로 인도하는 계단이 나온다.


다시 태어난 무계원은 전통문화체험 공간으로 개방해 인문학강좌, 서당체험, 다도교실, 국악공연, 기획전시 등

다양한 전통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입구에 있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1447년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을 꿈꾸고 그 내용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그리게 한 것이다


현진건(玄鎭健, 1900년~1943년) 일제 강점기 조선(朝鮮)의 작가, 소설가 겸 언론인, 독립운동가 본관은 연주 현씨 호는 빙허(憑虛)
일제 지배하의 민족의 수난적 운명에 대한 객관적인 현실 묘사를 지향한 리얼리즘의 선구자로 꼽힌다.


대표작 〈빈처〉(단편소설,1921년) 〈B사감과 러브레터〉(단편소설,1925년) 《무영탑》(無影塔,장편소설,1938년)

《적도》(장편소설,1939년) 《흑치상지》(黑齒常之,연재소설,1939년)








대한제국 시기에 법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지낸 반계 윤웅렬이 도성 밖 경승지로 첫 손에 꼽히던 창의문 밖

부암동에 조성한 별장이다



안에는 출입이 금지




등산로라는 이정표를 따라 올라 가본다

무계원에서 인왕산으로 오르는 또하나의 길목이 있다


다시 내려와 창의문을 거처 광화문까지 풍객은 길을 따라 내려온다


인조 반정군은 이곳을 통과하여 도성에 진입했던 창의문 그러나 이후 역모 노이로제에 걸린 인조는 문을 폐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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