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선대통령 생가 (尹潽善大統領生家) 솔새김남식
평택에서 둔포를 지나는 45번 국도를 따라 아산시로 내려가다 보면 길가에 윤보선 대통령생가 이정표가 있다
약 1키로정도 들어가면 이곳이 윤보선 대통령이 태어난 생가로 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이다
이곳 둔포지역은 평야지대로 안성천이 아산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지역이다.
윤보선 전대통령의 일가는 이곳에서 만석군으로 불리던 집안이며, 외가 역시 아산지역 만석군 집안의 딸이었다.
그의 집은 서울에서도 가장큰 민간주택으로 불리는 안국동 99칸 대저택이며, 이곳 아산 또한 상당히 넓은 저택 규모를 자랑한다.
윤보선 전대통령생가 주변은 해평 윤씨 집성촌으로 남아 있는 여러채의 고택중에 제일 규모가 큰 건물로 솟을대문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행랑채, 안채로 구성되었으며 양반 저택 중 그 규모가 상당히 큰 건물이다.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로 당시 윤보선가의 경제력을 보여주듯이 붉은 벽돌을 많이 사용한
특이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중부지역 한옥의 특징으로 건물들 약간씩 떨어져 있고, 넓은 마당에 'ㄱ'자 또는 'ㄴ'형 건물이 들어서 있다.
현관에 안내판만 있을뿐 누구하나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것 같다
윤보선 대통령묘소는 충남 아산시 동천리 비룡산에 있는 가족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아산시에서 둔포평택방향 45번국도 6km 지점에 봉덕사로 진입하는 비보호좌회전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
왼쪽 숲속에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가로수 길을 따라 산을 안고 계속 직진해 들어가면 된다
윤보선 대통령 묘소 입구에는 비각이 세워져 있으며 敬天孝親(경천효친) 國泰民安(국태민안) 이란 편액이 걸려있고
비각안에는 윤보선 대통령의 조상님들 공적비가 모셔져있다.
[國泰民安(국태민안)]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평안함
[敬天孝親(경천효친)] 하늘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
초입에 있는 산소의 위치 안내글을 읽어보니 조부와 증조부는 이곳에 있지 않다
돌계단이 가파르고 제법 길어서 좀 쉬었다 올라가야 가족묘를 만날수 있으며 맨 윗쪽에 윤보선 대통령 묘소가 있다
윤대통령 묘소로 부터 3번째 아래쪽에 있는 부친 윤치소선생과 모친 전주이씨 묘소이다.
이어서 큰(大)증조부와 고조부묘가 있고 아랫쪽에는 큰증조모와 동생 윤형선의 묘이다
도로 중앙분리면에 많이 심겨져 있는 관상용 실유카꽃이다
여기서 다시 한참 돌계단을 올라가야 윤보선대통령의 묘소가 있다.
국립묘지를 마다한 채 이곳 선영에 본인이 직접 준비해 두었다고 하는데 조상들 묘소보다 더 위쪽에 자리 잡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어깨에 무등 태우고 계신 모습과 같지 않냐고 평소 말씀하셨다고 한다.
1960년 6월 제2공화국 헌법에 의하여 대통령제 권력구조는 내각제로 변경되어 그해 8월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치러졌다 제4대 대통령 선거는 12명의 후보가 난립이었으나
참의원과 민의원 양원합동회의에서 윤보선은 1차 투표에서 82.2%로 무난하게 당선이 되었다.
비석은 1990년 돌아가시고 난 10년 후인 2000년에 자손들이 세운 것이다
윤보선(尹潽善) 대통령 (1897년 ~ 1990년) 호는 해위(海葦).
1912년 일출소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게이오 의숙[慶應義塾] 의학부에서 공부하다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로 옮겼지만, 2년이 채 못 되어 중퇴하고 귀국했다.
20세 되던 해에 독립운동을 위해 여운형을 따라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해오라는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일본 도쿄에 잠입하여
그곳에 체류중인 동생 윤완선을 시켜 고국에서 자금을 가져오도록 했다.
도쿄에 머무르는 동안 백관수·김도연 등과 함께 이월회(二月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했고
상하이로 돌아온 후 최연소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1921년 6월 영국 유학길에 올라 1930년 에든버러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8·15해방이 될때까지 은둔생활을 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정계에 투신,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46년 민중일보사 사장과 미군정청 경기도지사 고문직을 맡았다.
1948년 5·10총선거 때 고향인 아산에서 제헌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서울시장에 임명되었으며, 1949~50년 상공부장관, 한영협회(韓英協會) 회장직을 맡았다.
같은 해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정위원, 대한적십자사 총재, 1951년 상이군인신생회 회장,
1952년 한정협회(韓丁協會) 회장 등을 지냈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고 야당의 대열에 들어서
1954년 제3대 민의원(종로갑, 민주국민당), 같은 해 민주당 중앙위원, 1957년 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1958~60년 제4·5대 민의원(종로갑, 민주당), 1959년 민주당 최고위원 등을 거치면서
야당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붕괴된 후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 당시 정변주체세력들의 계엄령 사후 추인과 정변지지성명 발표 요구를 모두 거절했으며,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그린 미국 대리대사의 군사정변 진압을 위한 병력 동원에 대한 요구 역시
국군간의 교전과 이로 인한 북한의 남침을 우려해 거절했다.
5·16군사정변 이후 민주당정권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했으나,
정변주체세력과의 의견 차이로 결국 1962년 3월 하야했다.
1963년 범야(汎野)세력을 규합하여 5·16군사정변 주체세력이 결성한 민주공화당에 맞서기 위해
민정당(民政黨)을 결성한 후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같은 해 11월 민정당 전국구 후보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5년 5월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위해 민주당과의 통합을 이룩하고,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66년 3월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신한당(新韓黨)을 창당
1967년 2월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민중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여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한 후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다시 낙선했다.
1971년 국민당(國民黨) 총재를 지냈고,
1972년 유신체제가 들어선 후 반체제운동과 민주화투쟁에 앞장서
1976년 3·1 명동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9년 신민당 총재상임고문을 지내다가 정계에서 은퇴
은퇴 이후인 1985년 사회복지협회 명예회장직을 지냈고,
같은 해 경희대학교와 미국 국제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6년 민족사바로잡기국민회의 의장으로 활동하다가 1990년 노환으로 종로구 안국동 자택에서 서거했다.
인촌문화상을 받았으며, 저서로 "구국의 가시밭길" 이라는 자서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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