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별서 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 정리 솔새김남식
주소 ; 은평구 역촌동 8 - 12
위치 ; 구산역 2번 출구에서 100미터 지점
인조별서유기비의 표제는 조선 19대 숙종(肅宗)의 어필(御筆)로
「인조대왕용잠지시별서유기비(仁祖大王龍潛之時別墅遺基碑)」라고 쓰고 뒷면 음기(陰記)는
숙종의 어제(御製)를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썼다
인조(仁祖, 1623~1649)가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에 머물렀던 별서(別墅)를 기념하고자
숙종 21년(1695)에 세운 것으로 인조 반정에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과 그 현장을 글로 증명해 주는
사료로써 '인조반정비(仁祖反正碑)'라고도 불리는데 손자(숙종)가 증조 할아버지(인조)의 혁명비를 세운것이다.
이비는 인조반정 유적지로써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조선시대 가치있는 기록 유산으로
후손에게 널리 알려야하는 문화재이기에 서울시에서 24시간 관리 운용하고 있다.
인조별서유기비의 비문을 요악 해석하면 아래와 같다
광해군의 혼란이 극에 달하여 종사(宗社)의 위태로움이 턱앞에 닥쳐 있었기에 인조대왕께서 하늘의 뜻에 응하고
백성의 믿음을 얻어 어지러움을 바로 잡아 흐트러진 기강을 밝히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지셨다.
계해년(1623) 3월 11일은 두세 명의 측근 신하와 함께 이 정자에 머물러 쉬었는데 성조가 중흥시킨 왕업이
실제 여기에서 시작되었으니 불행히도 세월이 많이 흘러 정자도 모두 무너지고 주춧돌만 홀로 남은 채
잡초만 무성하여 성조께서 새롭게 일어났던 땅이 한갓 황폐한 곳이 되어 버렸기에 내가 문헌으로
남기지 않으면 세대가 내려 갈수록 사적이 더욱 없어질 것이라 염려하여 속히 내신(內臣)에게 명하여
유지(遺址)를 보수하고 주위에 담을 쌓으며 굳은 돌에 사실을 기록하여 그 성대한 뜻을 후세에
전하도록 했으니 억만년 끝이 없으리라. 을해년(1695) 가을 7월 임오일 삼가 적다.
인조가 아직 왕족인 능양군으로 있을 당시 임금인 광해군은 이미 정치가 극도로 문란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고 왕은 동복형 임해군과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는가 하면 계모인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西宮, 덕수궁)에 유폐하는등 패륜(悖倫)을 자행하며 기강이 문란해지자
당시 정권에서 소외된 서인 세력인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김류(金瑬)․이괄(李适)등은 비밀리에 왕을 폐위하고
새왕을 추대할 반정을 모의하고 1623년(광해군 15)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반정 하루전인 3월 12일(비문의 11일은 12일의오기)능양군은 자신과 뜻을 함께한 반정의 핵심 인물 최명길을 비롯한
여러명과 일부 가병(家兵)만을 이끌고 장단부사 이서(李曙)의 군사를 이곳에서 밤이 깊어 갈때 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이 한참을 지나도록 이서의 군사가 나타나지 않자 실패로 돌아간줄 알고 절망에 빠져있을때
7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자 기다리던 일행은 환호성을 울린다.
어찌됐든 연서역에서 이서의 군사와 합류한 인조의 반정군은 또 다시 홍제원(弘濟院)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7백여명의 군사와 합류하니 군사의 총수는1.400을 헤아리는 대병이었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12일 밤에 창의문(彰義門)으로 진군하여 창덕궁에 당도하는데
이때 궁을 지키던 훈련대장 이흥립과는 미리 내통이 있었기에 별 저항없이 궁에 입성하게 된다.
사실 하루 전날 이이반(李而頒)의 고변으로 무산될 위기에 놓였으나 (광해군은 조사를 지시하지않았다)
예정대로 단행하여 반정군은 무난히 궁궐을 점령하고 왕대비(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오른다.
인조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서인들에 협조로 왕위에 오른 것으로써 인조의 나이 28세였고
연산군은 48세이며 인조는 어미가 다른 연산군 조카이다.
즉 배다른 동생의 아들이니까
세조는 조카 단종를 밀고 왕위에 올랐지만 인조는 백부 연산군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하극상(?)이다
그리고 중종 반정은 박원종 일당이 탐욕으로 연산군을 몰아 내고 왕을 옹립한 것이지만
인조반정은 인조가 직접 반정에 가담하여 군데를 동원해서 앞장 선 성공한 구테타이다.
역사적 사실 (歷事的 事實)
인조(능양군)의 아버지 정원군은 1580년(선조 13) 6월 22일 선조의 다섯번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용모가 남다르고 태도가 신중 했으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와 우애가 남 달랐다고 한다.
그러나 정원군은 선조의 잘못된 자식 농사로 생겨난 임해군과 순화군등과 함께 세간에 악평과 원성이
자자했던 불량 왕자 3인방의 한명이었으며 그들은 살인과 폭행을 일삼고 남의 재산 탈취를 예사로
해댔다고 전하는데 정원군에 대한 기록은 아들 인조때에 쓰여진 것으로 미사여구 일색이다
1608년에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난 7년후 능창군을 황해도 군수가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로
인하여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綾昌君 1599년~1615년)은 강화도로 유배당 한후 자진하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인조의 집안은 풍비박산 났으며 그후 아버지 정원군이 몸져 누워 1619년(광해군 11) 4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때 부터 능양군은 동생 능창군을 유배 보내고 죽인 광해에 대한 원한이 깊어서
음모 초기부터 가담했다고 하며 광해군의 실수 하나는 그의 정치적 야망을 너무 과소평가 했다고 하며
그래서 반정이 성공하지않았나 사료된다
인조는 살아 생전에 2번의 큰 전쟁을 겪었고, 자신을 임금으로 만든 반정공신이 불만을 품고 일으킨
'이괄의 난'으로 한양을 버리고 공주까지 피난 가는등 임금 노릇을 평탄하게 하지 못한 왕이다.
특히 반정으로 삼촌 광해군을 내쫓고 왕이 되었으며 광해군이 중립정책을 펴오던 것을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전환하여 후금(청)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외교적 실패를 겪었고
큰아들 소현세자 독살설과 며느리 사사, 손자들을 귀양에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등
'용렬한 임금' 이라 불리운 인조는 중국황제에게 항복 의식을 치루어야 했던 어리섞은 임금으로 낙인되었으며
특히 이괄의 난은 인조가 등극하고서도 광해군에 대한 여러가지 사유로 불안한 세월을 보냈으며
1624년 등극10개월만에 반정공신에서 홀대를 받은 이괄이 난을 일으켜 공주로 피난가고 한양이
점령당하고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새로운 체제를 펼쳤으나 결국 이괄은
반정에 실패를 하게 된다.
재위내내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태안으로 이배 시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로
이배 시켰으며 그리고 1636년 청나라가 처들어 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다시 교동으로 안치 시켰으면 이듬해 청에게 굴복한뒤 그의 복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광해군을 다시
제주도로 귀향 보냈으며 인목대비가 여러번 사사를 원했으나 그를 살려 두었다
왜냐면 광해군을 여러번 힘들게 유배 시키면서도 그를 사사하지 않은 까닭은 그를 죽이면 반정에
대한 명분이 서지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특히 소현세자 죽음 이후, 인조는 세자의 장례를 크게 간소화했고, 무덤 역시 ‘원’(園)으로 부르지 않고
묘로 명명하였으며, 인조는 한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한다.
능원은 원래 소현묘라 불렸으나 고종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다
한편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은 선조의 5번째 아들로 아들 능창군이 역모의 무고로 유배지에서 죽은후에
자기 집터(경희궁터)도 빼앗긴 후 이복형 광해군의 핍박을 받아 술로 세월을 보내다 40세로 양주군 처갓집 선산에
대충 묻히고 마는데 그러나 4년이 지난후 광해군이 쫓겨나고 정원군의 큰아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으로 봉해졌고 1626년(인조4년)년에는 정원군의 어머니 인헌왕후가 49세에 세상을 뜨자
김포에 안장하고, 원호를 육경원이라 하였다.
그로 부터 1년후 부친의 묘를 이장하여 쌍릉을 조영 하면서 원호를 흥경원이라 하다가 1632년(인조10년) 인조는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존하여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석물을 왕릉제로 개수하는데 그 당시 조정에서는
반대 논란이 많았지만 인조는 뜻을 굻히지 않았다
이는 할아버지 선조가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려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것과 대조가 된다
그것은 인조가 반정을 통하여 왕위에 올랐기에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왕으로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엄밀히 따지면 국왕 스스로가 국법을 어긴 행위이다.
즉 대원군은 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었을 때 종친 가운데서 왕위를 계승하게 될 경우에
새로운 왕의 생부(生父)에게 주는 작호인데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대원군으로 추존(追尊)한 것이
조선 역사에서 처음이기에 선조는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부친을 왕으로 추촌 할 수 있었지만
대신들에게서 거부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인조 가계도
선조 = 인빈김씨
父 => 5남 원종(정원군)-인헌왕후 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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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치사
1. 무력 정변으로 광해군 폐출시킨 능양군
2. 굴욕의 왕 인조의 등극과 조선의 끝없는 수난
3. 인조시대의 변란들 : 이괄의 '삼일천하' / 정묘호란 / 병자호란
인조의 릉은 파주 장릉(長陵)에 있으며 현재 아직 미개방 지역이다.
연서역터 (延曙驛址)
은평구 대조동 49-24 일대에 있었던 연서 역터는 조선시대 관서지방을 왕래하는 공무여행자에게
말(馬)과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이와 같이하는 곳이 역촌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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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는 구산역 1번 출구에서 역촌역 방향으로 200미터 올라가면 연서역터 표지석이 길가에 하나 있다
이곳은 능양군이 반정참모들과 친히 인조별서를 출발하여 나와서 장단부사 이서를 만나 홍제원에서 기다리던
증원군과 합세하여 경복궁으로 출발 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