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폐비윤씨와 회묘

시인김남식 2012. 9. 23. 21:45

폐비윤씨와 회묘  솔새김남식

 

폐비윤씨 (1455-1482년)의 회묘는 서삼릉 비공개 지역에 있다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 한명희 딸)가 소생없이 승하하자 숙의에서 연산군을 낳고 1476년 왕비로 책봉되어 

3년만에 1479년 폐위되어서 사가에서 자숙 하던 중 1482년 성종의 사약을 받았다. 

 

폐비 윤씨는 동구릉에 능참 갈때 먼발치에서도 남편 성종과 아들 연산군의 모습을 보겠다는 유언을 했지만 

경기도 장단에 묻힌 후 16년을 무명묘로 있다가 1498년(연산군5년) 양주 천장산(지금 경희대)으로 이장하게 된다

그래서 폐비 윤씨가 묻히고 난 뒤 이 일대는 회묘(懷墓)’ 라는 지명을 갖게 되는데 ......... 

 

그리고 연산군 10년(1504 년) 갑자사화가 일어나면서 회묘는 

회릉(懷陵)으로 복원되지만 연산군이 폐위 되면서

다시 ‘회묘’로 돌아 오게 된다

 

그리고 몇백년이 흐른 20세기초 ‘회묘’ 란 지명이 좋지 않다고 하여 회묘 대신 회기(回基)로 지명을 바꾸게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 경희의료원이 생기면서 1969년 10월 서삼릉으로 천묘(遷墓)하면서 회기동과 폐비 윤씨와 인연은 완전히

끝이 나게 되는데 경희대가 자리한 동대문구 회기동이란 지명은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 지명에서 유래 되었다 

 

회묘는 조선전기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석물은 웅장한 무인석과 문인석, 석호와 석양도 뛰어난 모습을 갖추고 특히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를 생각해서 아들 연산군의 정성 때문인지 겉 모습은 왕릉과 다름이 없다

오히려 웬만한 왕릉보다 외관상으로는 더 훨씬 훌륭하다고 한다.

폐비 윤씨의 회묘는 연산군이 능을 '품을 회(懷)', '돌이킬 회(懷)'를 써서 회릉(懷陵)이라 한 것은 그리운

어머니의 포근한 품에 다시 안기고 싶었던 사모곡이라고 한다

1482년 성종에게 사약을 받고 한삼에 피를 쏟고 죽은 뒤 묘비조차 없던 윤씨에게 연산군의 즉위 후를 생각한 성종은

그녀가 죽은뒤 7년이 지난 후 1489년 '윤씨 지묘'라는 묘비를 세우도록 겨우 허락을 하는데 ............

 

폐비가 죽은지 6년후 1488년 (성종19년) 당상관 김석산이 폐비 윤씨묘가 ‘흉지’ 라는 한장의 상소가 조정을 발칵 뒤집는다.

성종 자신이 죽은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에 대한 논의를 금하라는 엄명을 내렸는데도 김석산이 어명을 어기고 상소를 올렸으니

성종은 노발대발 했고 대신들은 벌벌 떨면서 성종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벌어진다 김석산을 의금부에 넘긴 성종은

윤씨 때문이 아니라 윤씨가 낳은 세자(훗날 연산군)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였다. 
그래서 당시 풍수에 조예가 있는 최호원등 대신들을 부른 성종은 폐비묘를 다시 한번 살피게 한다.

 

 "폐비 윤씨 무덤 터가 보통 사람이 쓴다면 몰라도 나라에서 쓰기에는 합당하지 못합니다” 라는 상소를 올린다.

보고를 받은 성종은 이장을 지시한다. 그러나 대신들이 본격적으로 이장을 논의하자, 무슨 까닭에서인지 성종이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 함으로써 참으로서 이상하게도 윤씨묘 이장은 진행 되지 않는다.

고 16년을 무명묘로 있다가 1498년(연산군5년) 양주 천장산으로 이장 하게 된다 훗날 김석산과 최호원이 예언한 대로 끔찍한

사건이 연산군으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는 이미 성종이 죽은 뒤였다.

 

지금까지 회묘가 그대로 보존되게 된 이유는 무덤을 건드리면 화를 입는다는 설을 조상들이 굳게 믿고 있는 덕분에 연산군은

폐위되고 회묘로 격하 되었지만 묘는 화를 입지 않았다고 하는데 만약에 인수대비가 살아 있었다면 그냥 두지 않았을것 같다.  

 

 

폐비윤씨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고부간 갈등의 희생자가 폐비 윤씨였고 권력에 희생된 여인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의 딸인 함안 윤씨는 아버지 윤기무가 죽자 집안이 궁핍해 어머니에 의해 궁에 들어온다

폐비윤씨의 어머니 신씨는 신숙주와 사촌지간이다

빼어난 미모로 성종4년(1473) 숙의에 봉해졌던 윤씨는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 자리에 오른다.

성종이 13세 소년왕으로 왕위에 올라 7년간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을 받던 시절이 끝나고 친정으로 들어선

성종7년(1476)년에 성종은 어머니 인수대비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상의 여인이자

집안이 별볼일 없는 윤씨를 왕비로 책봉했고 그해 연산군이 탄생한다.

정희대비(세조), 인수대비(덕종), 안순대비(예종)의 세과부 대비들의 비호 아래 성종의 여성섭렵은

조선조 제왕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화려하다.

힘이 되어줄 마땅한 배경이 없는 윤씨는 명문가를 등에 업은 여성들과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희생 되어야 했다 

성종이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으나 지아비에 의해 죽음을 당한 윤씨는 오직 한 남자의 사랑을 갈구했던 불행한 여인이었을 뿐이다.

 

숙의에서 단숨에 왕비로 오를 정도로 왕의 사랑을 입었지만, 훈구세력의 막강한 명문 집안이었던 시어머니

인수대비(1437-1504)와 명문 출신이었던 후궁들이 손잡은 세력 다툼에서 밀려나고 만다

성종이 많은 후궁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윤씨와 부부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며 

1479년에는 규방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한다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일로

(오히려 성종이 부부싸움 하는중 윤씨의 뺨을 때렸다고도 합니다)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진노를 사

폐비가 되어 사가로 쫒겨났다.

친정으로 간 뒤에는 바깥 세상과 접촉이 금지 되었다.

세자의 친모를 일반 백성들과 같이 살게 해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이어져 내시와 궁녀들을시켜 동정을 살펴보라 했으나

인수대비와 여기에 역시 윤씨를 시기하던 후궁들의 음해까지 더해져 결국 윤씨는 

왕에게 전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여 사약을 내리게 된다. 

사사한 다음날 윤씨의 모친 신씨와 윤씨 형제들도 모두 귀양 보냈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성종이 1494년 12월24일 창덕궁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자 29일 연산군이 19세의 젊은 왕으로 즉위한다.

국장 기간이던 1495년 3월16일 성종의 능에 묻을 지석(誌石)의 초안이 발단이 되어

연산군은 비로소 자신이 폐비 윤씨의 자식임을 알게 되지만 정작 폐비 윤씨가 아들 연산군에 의해

회릉(懷陵)으로 복원된 것은 그로 부터 10년이 지난 연산군 10년(1504년) 이다. 

 

 

성종이 사후 1백년간 폐비 윤씨 사건에 대해 거론하지 말라한 유명을 깨고

연산군에게 밀고 하면서 유래없는 사화가 벌어졌다. 

그때까지 연산군의 폭정을 묵인하면서 자신들의 배를 채우던 권신들은 태도가 돌변하여 

연산군과 대신들의 대립을 이용해서 사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으려는 임사홍등이 갑자사화를 만들어 

모든 세력들이 화를 당하면서 중종반종이 일어난 계기가 된다.

이 과정에서 인수대비는 손자에게 머리를 받혀 죽고 시어머니에게 쫓겨나 죽음을 당한 폐비 윤씨는

제헌왕후로 추존되고 회릉으로 격상하게 되지만 고작 2년 후에 중종반정으로 인하여

1506년 연산군이 폐위되자 회릉은 다시 회묘로 격하된다.

당시 연산군은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이 얼마나 깊었으면 인수대비 할머니 장례는 뒤로 미루고 회릉 복원을 먼저 하게 된다. 

  

에필로그     솔새김남식

 

회묘懷墓, 그 이름조차 심란하다. '懷'자는 품을 회, 돌이킬 회이다.

품을 것은 무엇이고 돌이킬 것은 무엇인가.

국모의 자리와 애정의 자리를 구분 못하고 공덕 쌓는 일에 소홀히 하였던 여인이 폐비윤씨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고부 갈등의 희생자가 바로 폐비 윤씨이다.

그의 죽음을 막아내 줄 뒷 배경도 없는 여인이 혼자서 질투 많은 후궁들과 인수대비의 야심과 고약한 성격이었고

여성 편렵의 성종이 자신에 위치가 불안한 폐비 윤씨를 수렁속으로 매일 깊이 들어서게 만들었다 

폐비윤씨와 성종의 만남 다시 말해서 서로가 만나지 않았어야 할 사주 였다

 

세조의 큰아들 덕종이 왕위를 이어받지 못하고 단명하자 인수대비는 어린 둘째아들 성종을 데리고 사가에 머물게 된다 

이때 사가에서 자라고 있던 어린 성종을 업어 주고 달래주며 누이로써 의지했던 여인이 한 마을에 살던 여인이

바로 폐비 윤씨이다. 세월은 흘러 시동생 예종이 단명을 하자 한명희와 합작을 하여 인수대비는

둘째아들 성종을 왕으로 보위를 세우는데 성공을 한다.

폐비 윤씨는 가세가 빈곤하여 어머니에 의해 궁에 들어와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눈에 띄어 성종을 보필하게 된다. 

즉 할머니 정희왕후를 뵈러 갈때 재회를 하게 된다  

역사는 강자에 의해 쓰여진다고 하는데 제일 궁금한 것이 폐비윤씨의 나이이다

성종(1457~ 1495년)과 폐비윤씨(1455~1482년) 는 2살 연상이다

최근 자료는 2살 차이라고 하는데 나이가 많은 것은 확실하지만 정확한 자료는 없다

 

그런데 아무리 궁에 널린게 여자라지만 첫사랑이였던 여인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성종이 나쁘다.

폐비가 될 무렵, 연산군은 겨우 4세의 유아에 불과했는데 연산군이 조금씩 자라자 인수대비는 연산군이 왕위에 오를 경우

윤비가 다시 권력을 잡게 될까 염려하여 아들을 수차례 구슬린 끝에 결국 폐비윤씨를 사사하고 말았다.

만약에 뒷 배경이 든든 했다면 사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삼릉에 있는 폐비윤씨의 회묘는 불과 50미터 전방으로 서울외곽 고속도로의 차들이 세상을 달리고 있어서

자동차 소리에 좀 시끄럽다.

아뭏튼 권력암투의 대비와 왕대비 사이에서 그리고 수많은 후궁들 틈속에서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서 몸부림첬던 그녀

나는 그녀를 동정하며 명복블 빌뿐이다 정리 솔새김남식

 

폐비윤씨의 넋두리 (恨詩) 

 

돌담 둘러처 발길 끊어진 산기슭에

이름 모를 새들 솔바람 따라 들락거려도

발치 아래 시앗들 치켜뜬 눈 감을 줄 모르는 구나

말없이 지내는 처소를 옮기고도 모자라

후궁들마저 따라오게 했는가

.

세상 여인네들이여 열두살 어린 지아비를 받들어

왕자를 생산하고 여덟살 많은 시어머니 발아래 숨소리도 못낸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졌다고 사약 받아야 하는가

명문세가 여식들이 열둘이나 들어와 밤마다 혼자 지내야 했던 고통을

그대들은 알리오

보잘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나인으로 지내다 만난 어린 임금

사랑을 독차지 하려 했다고 죽어야 하는가

 

금삼에 쏟아낸 피 식기 전에 넋은 궁궐 담장 밑에 떠 돌았다가

아들에 의해 능을 얻었지만 두해도 못되어 다시 버림받은 몸

낯선 땅 서삼릉에 묻혀 잠들지도 못하는구나

누명 벗어 낼수 없어 흐느껴도 눈 앞에 엎드린 후궁들이

아직도 눈을 번뜩이며 질투한다네.

 

금삼의 피 ( 박종화소설 소설일부 내용)

이날도 폐비 윤씨는 그의 어머니 신씨와 함께 적막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절은 때마침 녹음방초 승화시의 양춘가절인지라 황폐한 정원에도 녹음은 제대로 우거져 갔다.

한번 폐서인으로 전락한 몸에는 행운의 봄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기약조차 아득하건만 폐비 윤씨는 방문을 열고

정원에 무성한 녹음을 내다볼수록 마음이 처량하여 그는 옆에 앉아 있는 어머니 신씨를 돌아다보며,

"어머니! 겨울만 가면 자연의 봄은 저렇게도 어김없이 찾아오건마는 궁중에서 축출된 이 몸에는 아직 봄이 찾아오지 않으니

이 일을 장차 어찌했으면 좋단 말이오!" 하고, 한숨을 쉬어가며 탄식을 마지않았다.

폐비 윤씨의 탄식하는 소리에 신씨의 눈에는 눈물이 어렸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삼키면서 이렇게 위로하는 길밖에 없었다.

"상감께서 그런 분부를 내리시기만 하면 작히나 좋으리오마는 금년 들어서 밤마다 꿈자리가 하도 사나우니 ..."

폐비 윤씨는 꿈 이야기를 하다 말고 그냥 끊어 버린다

"어젯밤 꿈자리는 어떠하였사옵기에?"

"어젯밤 꿈에는 염라대왕이 난데없이 나타나더니 나를 억지로 끌고 가더란 말이오.

하도 무서워서 힘을 다하여 몸부림을 치고 고함을 지르다가 놀라 깨어 보니 남가일몽이 아니겠소"

 

"옛날부터 꿈에 불길하면 생기에는 반드시 길하다 하였으니, 대궐에서 좋은 기별이 있을지 아옵니까?" 하고,

자기 자신도 믿기 어려운 말을 꾸며대었다.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을 때였다.

문득 어디선가 벽제 소리가 아득히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그 소리는 시시각각으로 가까이 울려왔다.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오는 것을 보면 이 집을 찾아오는 소리가 분명해 보였다.

두 모녀는 꼭같은 불안에 가슴 설레임을 느끼면서도 아무도 말을 못하였다. 그러나 벽제 소리는 담장 밖에서

요란스럽게 나더니 내시가 대문을 밀고 들어서며, "어명이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명! 하루같이 고대하던 어명이었다. 그런 무서운 어명일 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한 폐비와 심씨는 어명을 받들기 위해서

부랴부랴 옷을 갖춰 입었다. 오랫동안 옷치장을 잊어버렸던 폐비도 이때 만은 원삼에 족두리를 쓰지 않을 수 없었고,

신씨 역시 장롱 깊이 간직했던 새옷을 부리나케 꺼내 입었다. 

 

이윽고 의금부도사 이극균은 백지에 기록된 사사전지를 읽어 내려가면 읽어 내려 갈수록 무서운 전지였다.

설마 그렇게까지 무서운 전지가 내릴 줄은 몰랐다. 전신을 신장대같이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엎드리며, "상감께서 나에게 사약을 내리시다니 어머니 이게 웬일이오? 아이구, 억울해라.  동궁을 낳았건만 내게

사약을 내리다니 천지 신명도 무심하시지 이렇게도 억울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이오." 하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고

신씨 역시 폐비를 와락 껴안고 방성 통곡을 하면서,

"아이구, 내 딸에게 사약을 내리다니! 동궁의 생모에게 사약이 웬 말이냐! 아이구, 이 일이 웬 말이냐!" 하고, 넋두리를 하였다.

참으로 비참한 광경이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누구나 한 줄기 눈물이 없을 수 없었다.

의금부도사 이극균과 대방승지 이세좌도 여러 내시들과 함께 동정의 눈물을 금치 못하다가 마침내 의금부도사 이극균이

"속히 분부 거행할 준비를 하시옵기 바라옵니다." 하고 엄숙히 말하였다. 의금부도사의 명령이 내리자 내시들은 목욕물도

데울 겸 방안도 뜨겁게 하기 위하여 부엌으로 들어가 가마솥에 물을 듬뿍 부어넣고 아궁이에 장작을 지피기 시작하였다.

옛날부터 사약을 받드는 데는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 즉 약사발을 받는 자는 그 약을 마시기 전에 반드시 목욕 재계를 하고

의관을 정제해야만 하였고, 그런 뒤에는 약사발을 상에 받아 놓고 임금 계신 방향을 향하여 세 번 절하고 마셔야 한다.

그리고 그 방에는 방바닥에 발을 대지 못하도록 불을 미리 뜨끈뜨끈하게 때야만 한다.

 

 

왜냐하면 방안이 그처럼 뜨거워야만 약기운이 몸에 쉬이 퍼지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폐비 윤씨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목욕을 끝마쳤을 때에는 방안은 이미 후끈후끈 달아 올랐다. 폐비가 새 옷마저 갈아 입고 방안에 단정히 앉자,

그의 앞에는 약사발이 놓여 있는 자개식상이 놓이게 되었다. 폐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지만

그는 이미 각오한 바 있음인지 겁내는 빛은 별로 없었다. 이제는 치를 떨기는 커녕 오히려 놀랍도록 침착하기까지 했다.

그는 약사발을 앞에 단정히 꿇어앉아 서릿발 같은 시선으로 대방승지 이세좌를 바라보며 낭랑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승지야, 말 듣거라. 내가 전생에 무슨 업원이 있었던지 일찍이 지존을 모시는 몸이다가 오늘날은 사약을 받게 되었다마는,

동궁은 내 혈육을 받으신 분이시니, 등극하시는 날 나를 모함한 자들에게 반드시 천벌이 있으리라는 것 부디 전해 다오"

예로부터 여인의 요언에는 오뉴월 염천에도 서리가 맺힌다 하거니와, 죽음을 목전에 바라보는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무서운 악담이기에 대방승지 이세좌는 부지중에 몸서리를 쳤다. 폐비 윤씨는 유언으로 무서운 악담 한 마디를 남긴 뒤

대궐을 향하여 세 번 절하고 조용히 약사발을 들여 마셨다. 부자탕의 마지막 한모금을 들여마셨을 때에는 이미 그의 얼굴에는

묽은 핏기운이 확 내솟았다. 잠시 후에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여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신씨 마누라가 와락 달려들어

폐비를 부둥켜 안으며 절통하게 울부짖었다. 그때, 폐비의 원삼 소매 끝에 달리 한삼을 부욱 뜯어내더니

입과 코에서 흘러 나는 비를 한삼 조각에 한웅큼 받아 그대로 움켜잡고 신씨에게 내밀어 주면서

 

 

"어머니! 나는 죽소. 어머니는 이 피 묻은 한삼을 소중히 간직하셨다가 후일 동궁이 등극하시거든 부디 이것을 전해 주오

비통 망극한 이 에미의 원한을 풀어주도록 부디 이 한삼을 전해 주오" 마지막 말은 입 속에서 웅성거릴 뿐이었다.

신씨 마누라는 목을 놓아 통곡하면서, "중궁마마, 염려 마오 이 늙은 어미인들 고혼이 되어서라도 생모의 망극한 원한을

모르신다 하시리오." 하고 넋두리를 하였다. 이리하여 폐비 윤씨의 한많은 생애는 슬픔 속에서 막을 닫었다.

일찍이 중전마마였던 윤씨는 용안에 손톱자국을 하나 내었다 하여 폐위와 아울러 궁중에서 축출을 당했다가 마침내는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한삼에 묻은 한 줄기 원한의 피가 장차 얼마나 처참한 피의 비극을 요구하게 될지

그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아는 장래지사인 것이다.

 

 

금삼의 피 (錦衫)

박종화(朴鍾和)가 지은 장편 역사소설

1936년 3월 20일부터 12월 29일까지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되었고

1938년 박문서관에서 단행본 상·하권으로 간행하였으며 1963년 연산군이란 제목으로 영화가 만들어젔다

 

성종은 지하철 2호선 역 이름인 선릉에 묻혀있다

 

서삼릉 가는길

지하철 3호선 원흥역에서 마을버스 또는 택시 10분 거리에 있다

부근에 경주마를 키우는 종마목장과 허브농장이 있어서 나들이에 더욱 좋다 

회묘 부근에는 소경원과 후궁 왕자 공주묘와 그리고 태실이 있다

여성섭렵- 치미폭에 쌓여 이곳저곳 돌아 다니며 성종이 대비들 눈치를 보았다는 표현 

 

 

여행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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