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서/야담설화

사의찬미 윤심덕

시인김남식 2018. 3. 15. 14:52
윤심덕尹心悳(1897∼1926)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솔새김남식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가수 윤심덕의 애절한 사랑이야기
이루 말할수 없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 그시대의 신여성이였지만 일생은 화려하고도 비참했고

행운과 수난이 엇갈린 삶이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하에 있던시기 더군다나 여성의 사회 참여가 막혀있던 시기에

그 명성을 남긴 인물이기에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녀는 평양 남산재교회의 권사부부의 1남 3녀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남동생인 윤기성은 오늘 날까지 불리워지는 {들장미}의 가사를 번역했고
여동생인 윤성덕은 미국에 유학한 피아니스트로 형제들 모두가
음악적인 소질이 있었으며 그녀는 경성여고 사범과를 나와 강원도 원주의 보통학교

음악 선생으로 재직했으며 윤심덕은 성악가의 재질을 인정 받아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에
한국 최초의 여성관비 유학생으로 떠난다
그 당시 유학 동료인 홍난파도 역시 그녀에게 각별한 감정을 갖게 되며 무엇보다도
그를 통해서 극예술협회에서 김우진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녀를 유명하게 한것은 무엇 보다도 그녀가 택한 죽음이였다.
윤심덕은 일본에 다녀오던 길에 애인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이루지 못한 사랑을

죽음으로 끝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재능보다 이러한
비극적인 죽음을 기억하게 된것이다
김우진 호남 대지주의 아들은 니체와 마르크스의 사상과 스트린드베리의 표현주의 기법을 도입했다

윤심덕은 언제나 대중의 관심속에 있었으며 극예술협회 활동할 때 서울에 극장을 세우고

신극운동에 앞장설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윤심덕과의 동반 자살로 계획이 물거품이되고 말았으니,

 

1969년제작된 영화 윤심덕


윤심덕은 김우진의 충실한 애인 이었을까?
석죽화에서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랑은 서로에게 충실한 것 이었으며,
한점 부끄러움 없이 순수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김우진이 유교적 전통 명가의 장남에다 자식까지 둔 기혼자 였으니

미혼의 윤심덕으로 서는 그로 부터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랑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름대로는 그와의 관계 청산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자기 자신과 주변으로 부터

느껴야만 했을것이다

다른 이성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홍기, 이용문등과 관련된 구설수는 그러한 사정을 시사하는 듯하다

.

사진 윤심덕      

                                      

김우진과의 관계를 알아 차린 윤심덕의 부모가 윤심덕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강권하던 사람이 부유한 청년 김홍기였다

그런데 김홍기와의 관계가 알려지던 즈음에 윤심덕은 또 서울의 부호 이용문과의

스캔들에 휘말렸고..
윤심덕은 동생 윤기성을 유학 보낼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고 평소에 호감을 품고 있던

많은 부자들로 부터 추파가 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 이용문은 윤심덕에게 무조건적인 도움을 주겠다는 제의를 해왔고
윤심덕이
그를 방문하게 되면서 두 사람과 관련된 추문이 항간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밖에서 만나다가 만남이 잦으면서 핑계를 대서 윤심덕으로 하여금

밤에 찾아 오도록 하는 식의 수작을 부렸다고 하며

윤심덕이 그의 첩이 되었다는둥 윤심덕이 돈에 환장했다는 등의 소문들이 퍼졌다고 한다
이용문과의 추문이 돌자, 김우진은 윤심덕에게 절교를 선언했고 윤심덕이 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부당한 추문으로 받고 있는 마음에 상처를 김우진은 달래주지 않았기에

그녀가 택한 것이 만주행 이었다
윤심덕이 1925년 6월에 귀국 했을 때 김우진은 오해를 풀고 다시 따뜻하게 그녀를 받아 들이고

토월회에 들어가 연극 활동을 하게 되지만 성공하지 못 했다
그래서 복잡한 지난 날 때문에 그녀는 무척이나 고뇌 하였으리라

 

 

어찌어찌해서 두사람이 도쿄에서 재회 했을때 윤심덕은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윤심덕의 自作詩에 이비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 멜로디를 얹어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부른 것이다
사의찬미 녹음을 마치자 동생 윤성덕은 미국으로 유학길을 떠났고

그리고 1926년 8월3일 저녁 11시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관부 연락선에 윤심덕은
사랑하는 남자 김우진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탑승한다

.

  

그러나 몇 시간이 흐른뒤 1926년 8월4일 새벽4시 동이 틀무렵
물살이 빠르기로 유명한 오키노시마 섬을 지나 갈 때 쯤 두 남녀가 차거운 물살위로 몸을 던진다.

바로 김우진과 윤심덕의 동반투신
세상 모든 복잡한 관계를 한 순간에 정리 하고저 한듯 물속에 잠들어 버린다
배는 멈추고 수색했지만 비련의 주인공 처럼 끝내 흔적을 찾지 못하고 만다
그 당시의 신문은 청춘 남녀의 경솔한 최후라고 점잖게 나무랐다

.

 

세상의 모든 복잡한 것을 일순간에 정리하고 갓 서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의 이목을 두려워 하기에 앞서 예술에 대한 정열을 불태웠던 그녀는 노래와 연극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방송에 까지 출연 함으로써 대중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사회에 당당했던 윤심덕 그녀는 예술가를 진실로 사랑할 줄 모르는 시대에

태어난 비극적 여인이었다
그녀의 애뜻한 사랑이야기는 연극..드라마...영화.... 책으로 출간이 되었다
윤심덕과 유뷰남 김우진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고뇌하며 사회의 시대 배경과 그리고

그의 음악 생활에서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이다
두사람은 정말 모모한 짓 이였을까?

 

                                                   - > 2018년12월 6부작으로 방송된 SBS의 사의찬미


尹心悳(1897∼1926)의 생애

윤심덕의 일생은 화려하고도 비참했고 행운과 수난이 엇갈린 삶이었다.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였던 윤심덕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하에 있던시기
더군다나 여성의 사회 참여가 막혀있던 시기에 그 명성을 남긴 인물이기에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녀는 평양남산재 교회의 권사부부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남동생인 윤기성은 오늘날까지 불리워지는 {들장미}의 가사를 번역했고
여동생인 윤성덕은 미국에 유학한 피아니스트로 형제들 모두가 음악적인 소질이 있었다
그녀는 경성여고 사범과를 나와 강원도 원주의 보통학교 음악선생으로 재직했다


소질이 인정되어 일본 우에노음악학교에 한국 최초의 여성관비 유학생은 윤심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를 유명하게 한것은 그녀가 택한 죽음이었다.
윤심덕은 일본에 다녀오던 길에 애인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이루지
못한 사랑을 죽음으로 끝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재능보다 이러한
비극적인 죽음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김우진 호남 대지주의 아들은 니체와 마르크스의 사상과 스트린드베리의 표현주의
기법을 도입했다. 윤심덕은 언제나 대중의 관심속에 있었으며 극예술협회 활동할 때
서울에 극장을 세우고 신극운동에 앞장설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윤심덕과의 동반자살로 계획이 물거품이되고 말았으니

윤심덕은 김우진의 충실한 애인이었을까?

 

 

윤심덕이 귀국했을 때 어찌어찌 두사람이 도쿄에서 재회했을 때도
그녀는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기에
김우진은 다시 따뜻하게 그녀를 받아 들였고
그후 극단
토월회에 들어가 연극 활동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결정은 김우진의 후견에 의한 것이라고 연극 사학자들은 이야기를 한다

시대를 치열하게 고뇌하던 선각자들이 그저 비련의 주인공으로 묻히고 말았다

 

세상의 이목을 두려워하기에 앞서 예술에 대한 정열을 불태웠던 그녀는 노래와 연극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방송에까지 출연함으로써 대중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사회에 당당했던 윤심덕, 그녀는 예술가를 진실로 사랑할 줄 모르는
시대에 태어난 비극적 여인이었다

 

그녀의 애뜻한 사랑이야기는 연극,드라마 책으로 출간이 되었다

윤심덕과 유뷰남 김우진과의 이룰수 없는 사랑을 고뇌하며 사회의 모순 일제의 시대배경과
그리고 그의 음악 생활에서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이다

김우진의 집안은 그야말로 천재집안이며 김우진의 아들 김방한은 서울대교수를 지냈다한다

 

 

"사의찬미"

소프라노의 성악식 발성법이라 가사를 잘 알아 듣지 못할 것 같아 옮겨봅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적막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위에 춤추는 자 도다.


눈물로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 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너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허무.      

 

                             

SBS 사의찬미

 

                                                                    -- >SBS 사의찬미에서 출연한 배우 이종석·신혜선   

 

 

조선일보기사

美聲의 주인 윤심덕과 청년文士와 투신 情死

주인을 기다리는 寂寂攻防에는 고가의 축음기와 차가운외투

그리고 다음과 같은 본문 기사를 실어 세상 사람들을 충격과 슬픔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관부연락선이 사일 오전 네시경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는데 

남자는 김우진(金祐鎭) 여자는 윤심덕(尹心悳)이었으며 연락선에서 조선사람이 정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1926년 8월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현해탄 激浪中 청년남녀의 정사" 라고 사회면을 전부기사화 했다 / 발췌 동아일보DBDPTJ

 

 

관련글 -> 아래를 크릭하세요

->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3Ou5&articleno=16056285&admin=&refequery=%EA%B9%80%EC%9A%B0%EC%A7%84

 

 

 

 

 

 

 

 

'필서 > 야담설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종과 정순왕후  (0) 2018.05.03
김래성 애인 영화  (0) 2018.05.02
나혜석과 김일엽 그리고 수덕사  (0) 2017.12.21
신숙주 묘   (0) 2017.10.18
그대가 내꿈을 그려줘야겠어  (0) 2017.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