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書/生活수필

결핵성 늑막염

시인김남식 2005. 12. 27. 13:44

결핵성 늑막염

 

                                                                         김남식

일 하기도 좋고 편해서 오랫동안 있으려고 했으나 공장 사정이 좋지 않아 홍제동 공장을 나왔다. 다행히 몇몇 사람과 함께 신촌에 있는 경서전축으로 출근하기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어느덧 신촌 공장으로 옮긴지 한 달이 넘었다.

전축에 걸터앉아 지나가는 여자들에게 말장난하는 재미로 시간 보내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

당시 공장들은 빈 공터에 베니어판으로 어설프게 건물을 지어서 사용하였다. 그래서 작업환경과 기숙생활이 너무도 빈약하였다. 특히 겨울철은 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생을 해야 했다. 하루 종일 먼지 속에 있던 공장 내부가 기숙사가 되는 것이다.

연탄난로 위 베니어판은 고참(古參)들이 사용하고 시공(始工)들은 날바닥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추위를 이기며 잠을 자야했다. 떨어진 문틈으로 흙먼지와 찬바람이 들어오고 자리에 누우면 지붕의 구멍에서 하늘이 보였다.

냉방에도 아랫 몫이 있었으니 찬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내가 잠을 자고 그렇지 않은 곳은 선배가 잠을 잤다. 몸을 웅크리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보지만 아직 아침은 멀다.

영하 20도 겨울밤이 상당히 추워서 잠자리는 달팽이처럼 구부려서 잠을 자니 올 겨울밤도 지루한 것 같다. 새벽 5시가 눈곱을 띠면 온몸이 뻐근하고 의시시하여 추운 곳에서 잠을 자며 일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이것이 내가 가야 하는 길인데 하며 마음을 굳게 먹지만 언제나 신세타령으로 아침을 맞는다.

정말 겨울바람이 어찌나 추운지 동상이 걸릴 정도이다. 발끝 이 가렵고 따갑다. 그래도 풍족한 사람들은 극장이나 빵집에 가서 추위도 녹이고 하지만 난 오늘도 선배 형들 비위나 맞추며 지내야 했다. 외양간보다도 더 지저분한 곳에서 새우잠을 자고 나면 언제나 몸은 편치 않다. 언제 이 신세를 면하게 될지는 아직은 모른다.

찬물로 작업을 하다 보니 손발이 트고 온몸은 추위에 얼어 있었다. 일을 마치면 따스한 물은 선배에게 주고 찬물로 대충 씻고 식당으로 내려가면 선배들 때문에 반찬도 제대로 먹지 못 했다. 더 어려운 것은 선배들 옷까지 빨아 주며 용돈까지 뺏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은 폭력이었다.

자기들 마음에 안 들면 하루에도 몇 번씩 얻어 막아야 했다. 그것이 싫으면 공장을 나가야 한다. 그런데 다른 공장에 가도 그 모습은 그냥 그대로 재현이 되기 때문에 기술 배우며 돈 벌겠다고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무조건 견뎌야 했다. 당시 여건은 매우 힘들었다. 돈이 없는 가난한 것을 생각하면 이를 악물고 헛된 꿈에 빠지지 말고 앞을 바라보고 모범적인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는 고난을 이기는 자력이 필요했던 때였다. 그렇게 한겨울에 추운 공장 바닥에서 잠을 자고 제대로 먹지 못해서 결국 내 몸은 사회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육체적으로 힘들게 만들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한다. 남들도 어려운 역경 속에서 일 하는데 나라고 못 하겠느냐 하며 즐겁게 일을 했다. 태어 날 때부터 내 몫이 이것 이라면 어쩔 수 없다. 훗날을 위해서 내 몫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며칠 전 부터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느꼈지만 이기며 지내왔다. 그런데 오늘 막상 출근해서 일 하려 하는데 어쩐지 하기가 싫었다. 몸이 아파서 하루 쉬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할 수도 없다. 저녁때 갑자기 춥고 머리가 아프기 시작 했다. 열이 오르면서 정신이 몽롱해지더니 기운이 없다.

돈이 없어서 약을 사먹지 못하고 이불을 쓰고 누웠으나 아픔이 더 밀려왔다. 객지에 와서 몸이라도 건강해야 하는데 왜 이러지 하고 자꾸만 약해지는 것 같았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자꾸 떠오른다. 강문이라는 친구가 용돈을 아껴둔 200원으로 약을 사왔다. 얼마나 고마운지 눈물이 나오려 한다. 정말 착한 친구였다. 따듯한 봄인데도 추위 때문에 공장 한편 양지쪽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밥도 먹기 싫고 며칠을 공장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하루 쉬겠다고 했다. 터벅머리에 생쥐처럼 핼쑥한 모습은 누가 봐도 양아치였다. 그때는 양아치 거치들이 서울 거리에 참 많았다.

건강하지 못해서 내 자신이 나를 걱정해야 했다.

저녁을 먹기 싫다고 하니까 강문이가 이번에는 빵을 사와서 먹으라 했지만 먹을 수 없었다. 친구는 먼 식당까지 내려가서 밥을 끓여서 가져 왔다. 먹어야 산다. 먹어야 산다. 친구가 자꾸 말 하지만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몸이 아프니 아무 것도 먹기 싫었고 그냥 자고 싶었다. 공장에 있을 수가 없어서 영등포 누나 집으로 왔다. 기운을 차려 버스에 오르니 정신이 없고 차속에서 몸이 마구 흔들렸다. 약을 사오고 밥을 끓여 주지만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따뜻한 집에 왔으니 편히 그냥 자고 싶었다. 기운이 없어 그런 것 같다며 닭을 사다가 닭죽을 해주었지만 처음 몇 번은 먹었으나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입에서 받지 않고 냄새도 맡기 싫었다. 특별히 해 준 것을 감사하게 먹어야 했는데 입에서 받지 않는다. 저녁부터는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기운 내라고 고기를 해주었더니 그런다고 누나가 속상해서 화를 낸다. 아무 말도 못한 채 화장실로 다시 방으로 이제는 기진맥진해서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설사약을 먹고 이불을 쓰고 소리 없이 울고 또 울었다. 정말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무슨 병인지 먹지도 못하고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른다. 더구나 이제는 가슴까지 아프다. 누나에게 이야기 하니 닭고기 먹고 체한 것 같다고 하며 60대 노파 할머니에게 체 내림 까지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날 밤 새벽 2시 가슴이 몹시 아프고 숨이 답답해서 금방 죽을 것 같았다. 앓는 신음 소리에 결국 이른 새벽 병원을 찾아 헤맸다. 이른 새벽 병원 문을 두드려서 잠자고 있는 의사를 깨웠다. 고기 먹고 체 했다고 했더니 그 처방을 하는 것 같다.

주사를 맞고 약을 가지고 돌아와서 편히 잠이 들었다. 병원에 다녀 온 것이 조금 낳은 것 같지만 식사도 못 하고 아픔은 여전했다. 왜 나를 또 이렇게 만들고 있는지 세상이 갑자기 미워졌다.

여전히 소변이 노랗고 설사 때문에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렸다. 몸이 많이 지친 것 같았다. 빵과 떡, 사과 조금이라도 먹으라고 애들 몰래 갖다 주었지만 먹을 수 없었다. 먹기 싫다고 짜증을 하면 누나가 죽으라고 까지 화를 낸다. 왜 아무 것도 먹지 못 하는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무슨 병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죽고 싶은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라디오 에서는 어린이날 기념식 행사를 하고 있지만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누워만 있지 말고 시골에 연락해서 죽든지 말든지 하라고 버럭 화를 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이제는 가슴도 쓰리고 아파서 엎치락뒤치락 앓다가 나중에는 파스까지 가슴에 부처야 했다. 도대체 무슨 병인지 죽고 싶은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객지에서 고생하는 내게 이토록 가혹한 벌을 주고 있으니 이제 어쩌라고 하나님이 정말 미웠다. 아주 어렵게 서울에 올라 온지 이제 일 년이 조금 넘었다. 객지생활에 조금 적응하여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 했는데 그만 탈이 나고 병이 났다.

시골에 가도 반가워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수렁 속으로 자꾸 밀려가는 것 같아 마음이 괴로웠다. 아프다고 누나 집에 무작정 있기에는 미안했다.

시골에 연락을 해서 큰형과 함께 청주로 내려왔다. 장내과에 들려서 진찰만하고 병원을 나왔다. 그리고 작은 형 집에 나를 남겨 놓고 말없이 돌아서 시골로 내려가는 큰 형의 뒷모습을 보다가 눈물만 한없이 흘렸다. 다음날 어머니가 청주로 나왔다. 가슴이 아파서 죽을 지경인데 어머니는 닭고기 먹고 체 했다는 말을 들었는지 연탄불 위에 솥을 얹어 놓고 앵두나무를 삶고 있었다. 정신 차려서 밖으로 나와 보니 어지럽고 머리가 핑 돌았다. 파릇파릇한 보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생기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내 몸은 이렇게 시들어 가고 있으니 정말 잔인한 봄 이었다. 어쩌자고 어린 몸에 또 이런 몹쓸 병에 걸려서 가족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을까 또 그 생각을 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혼자 죽을 수만 있다면 죽고 싶었다. 다음날 석내과에서 사진을 찍고 초음파 피검사 소변검사까지 했다. 진찰결과 심장병으로 간과 쓸개가 부어서 서둘러 입원해야 한다며 삼주 입원 하는데 30,000원 있어야 하다고 한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그냥 쓸쓸히 또 병원을 나서는데 진찰비 1,700원이 모자라 다시 집에 가서 돈을 갖고 올 때까지 3시간을 병원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파도 돈이 없으면 죽는 다는 말이 꼭 맞았다. 그래서 부자들은 오래 살고 가난한 사람들은 일찍 죽는다 했다.

가족들 눈치를 살펴야 하는 환자 본인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해 보자. 지금은 건강보험이 잘되어 있어서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그때는 아프면 가족들에게 짐이 되었다. 다음날 집으로 오라는 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시골로 내려왔다. 누워 있으면 숨이 차고 기침이 나고. 갈비뼈 밑으로 아프고 정신은 몽롱해서 똥도 오줌도 모두 옷에 그냥 싸야 했다. 양쪽 어깨 등 쪽으로 노근하게 아프다. 병석에 누운 지 어느덧 한 달이 넘었건만 치료도 하지 않은 채 약하나 먹지 못하고 그냥 방치한 상태이다. 명줄이 길면 살아서 저절로 낳겠지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십년 전 얼음판에서 넘어져 궁둥이에 피고름을 가득한 채 변변히 치료도 하지 못하고 3개월 동안 생명을 유지한 전과가 이번에도 그 신세는 변함이 없었다.

고통을 받느니 차라리 죽는 게 편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이불속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것만도 정말 다행인 것 이다. 이번에는 정말 앓다가 그냥 죽는 게 아닌지 나쁜 생각도 들었다.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며 기운을 내야 했다. 그 옛날 가난한 민초들은 사람이 아프면 명이 길면 스스로 일어 날 것이고 그러지 않으면 그냥 죽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래서 환갑을 넘긴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었다. 증평 메리놀 수녀병원에 가기로 했다. 예전에 다리 아팠을 때 몇 번 갔던 곳이다.

이번에도 길게 줄을 서서 진찰권 받아서 진찰 하였다. 이번에도 미국수녀가 환자의 상태가 아주 나쁘다며 서울로 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발병 초기에 와야 했는데 너무 많이 진행했다는 수녀의사의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목 메여 사정을 하고 약을 타 가지고 집으로 왔다. 내수에서 한 시간을 걸어야 하는데 숨이 차서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먼저 집에 가서 작은집 조카를 보내겠다고 하여 혼자 앉아서 두 시간을 기다렸다가 오토바이 타고 집에 왔다. 집에 오니 서울 매형에게 편지가 왔다.

아픈 사람에게 짜증내고 잘 해주지 못해서 무척 섭섭할 것 이라며 얼른 낳기를 바란다는 편지였다. 내 자신이 너무 서러워서 편지를 읽는데 눈물이 마구 흐른다. 다음날 사진을 찍어 보더니 허파에 물이 있다면 물을 빼야 한다고 했다. 폐에 고여 있는 물은 3일에 한번씩 3번 주사기로 빼는데 많이 아팠다. 그렇게 수녀병원에서 치료를 한지 어느덧 3주가 되었다. 서울에서 내려 올 때는 죽는 줄 알았는데 조금씩 차도가 생기고 몸이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2주후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다시 하고 나더니 병이 차도가 많이 있다고 외국인 수녀의사가 좋아하고 어머니도 한결 좋아했다. 이제는 숨이 차던 것도 멎고 힘이 솟는 것 같아 천천히 산책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아주 기분이 정말 좋았다. 입맛도 원래대로 돌아오고 가벼운 집안일도 할 수 있었다. 나를 치료해 주는 수녀님에게 감사를 드렸더니 아직 6개월은 더 치료해야 한다고 한다. 이제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병원에 가니 마음에 여유까지 생겼다.

그해 여름 벌써 두 달 채 비가 내리지 않는다. 가뭄으로 농사일이 걱정이라는 아버지의 잔소리는 오늘도 여전했다. 와가리골 논에 호미모를 한다고 식구들이 아침부터 부산했다. 일꾼까지 얻어서 모내기 하러 논에 간다고 하는데 아프다는 핑계로 그냥 누워 있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집에서 쉬고 싫었지만 식구들을 따라 가기로 하였다. 몸이 아프고 좀 힘들어도 아직은 움직일 수 있으니 논에 가서 무엇이라도 도와줘야 했다. 천수답 논에 도착 해 보니 거북등처럼 갈라져 있었다. 잔일을 도와주는데도 땀이 나고 힘이 부처서 여간 힘들지 않았다. 집에 가서 쉬고 싶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식구들은 내가 힘들어 하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일만 하고 있었다. 호미로 마른땅을 파고 볏모를 일일이 심는 일이라 잔 일이 많았다. 식구들 모두가 열심히 하루 종일 했지만 모를 다 심지 못했다. 내일 다시 하기로 하고 집에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 왔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아팠다. 몸이 무거워서 집에 누워 있고 싶었지만 식구들과 어제 미처 다 심지 못했던 호미모를 심어야 했다. 약을 먹고 아픈 것을 꾹 참고 일을 했다. 땀이 어찌 많은지 마치 물속에 빠진 것처럼 온몸이 흥건히 젖어 있다.

칠월의 뜨거운 태양이 후끈거리며 하루 종일 내리 쪼고 있다. 땀을 닦으면 흐르고 또 딲 으면 흐르고 한다. 모내기는 오후 3시경에 마쳤다. 몸이 어찌나 노근한지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그냥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또 아프다. 조금 누워 있으려 했으나 아버지의 고함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을 먹고 청주병원에 가려고 옷을 입고 있었다. 아버지의 역성에 눈물이 자꾸만 핑 돈다.

네가 벌어 온 돈이야! 병원에 가지마.”

그냥 하시는 소리겠지 하면서도 서운했다. 기다리던 단비가 이른 아침부터 내리고 있었다. 이제야 여름 장마가 시작 된 것 같았다. 아버지는 호미모 한 것이 모두 죽어서 새로 심어야 한다고 오늘도 역성이다. 안방에 누웠다가 마음이 불안해서 얼른 일어났다.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식구들 모두 굶어 죽어!”

아버지는 비가 와서 오늘은 그냥 집에 있으라고 한다. 모두들 논에 나가고 혼자 집에서 비가 내리는 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우울했다.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보았다. 그리고 뒷마당에 흩어진 나무 조각으로 토기 집을 만들기로 했다. 힘을 내서 나무를 자르고 못을 박아서 저녁때쯤 토기 집을 완성했다. 아랫마을에서 토끼 3마리를 분양 받아 토끼집에 넣으면서 이미 내 마음은 새끼를 많이 낳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내수 장에 팔아서 약값이라도 보태야 한다며 저녁을 먹고 자리에 누웠다.

시골에 처음 내려 왔을 때 보다는 몸이 좋아졌지만 아직 많이 피곤하다. 희미한 등잔불에 비친 지금에 내 모습은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바람이 불면 금방 이라도 날라 갈 것 같은 가냘픈 몸이었다. 정말 이렇게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내가 지고 갈 삶이지만 참으로 지지리도 못난 삶이다. 왜 남처럼 건강하지 못할까 늘 걱정을 하면 눈물이 난다. 지루한 여름장마에 혼자 누워 있으니 고민과 괜한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게 또 하나의 걱정이 생겼다.

가슴이 아픈 것 치료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옆구리를 보니 이상한 종기가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하며 이것이 또 무엇일까 걱정 하며 여기저기 도깨비 혹이 몸에 생기는 것 같았다. 담배 침에 밀가루를 개어서 종기부위에 부쳤더니 일주일 후 다행히 상처가 아물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또 몸이 좀 이상했다. 이번엔 수술한 왼쪽 다리에 이상하게 약간 부어올랐다. 수술을 해야 되는 것 인지 또 걱정도 해 보고 식구들에게 알려야 하는지 혼자 속을 바글바글 썩고 걱정하고 있었다. 야윈 두 뺨에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한강을 이루고 있었다. 심장병이 다 낳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병이 생겼으니 왜 이런 시련이 끊임없이 오는지 신세가 참 불쌍했다. 예전에 아팠던 다리 일 년이 멀다않고 재발한 것이다. 오늘은 증평 수녀병원에 갔다가 오후에 청주신병원에 들렸다.

사진을 찍어 보더니 뼈에는 이상 없으니 약과 주사로 치료하자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래서 폐와 다리 내 몸은 두 곳을 동시에 치료하게 되었다. 그래서 먹는 약이 너무 많았지만 아프지 않기를 바라며 열심히 치료 하였다. 어느덧 7월 마당에서 보리타작을 하고 있었다. 농사가 부실하다고 걱정하는 아버지가 요즈음 내게 친절하다. 전에는 무조건 야단하고 잔소리 하더니 지금은 그렇지를 않다.

네가 아프다고 야단하는 것 아니다 일이 잘 안돼서 그러니 네 병만 빨리 낳아라. 너는 나 보다 먼저는 보내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방안에 누워 있으면 아버지가 찾아 와서 위로를 해주니 고마워서 눈물이 날 것 같다. 달라진 아버지의 모습에서 가슴이 뭉클 해지고 식사 시간엔 꼭 같이 먹게 하였다. 자상한 모습은 아버지의 연세가 80이 가까워지니 이제는 많이 외로운 신 것 같았다. 주마담은 두 달 치료를 하고 완쾌가 되었지만 심장병 치료는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 여름의 더위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병원을 다녀오니 어머니가 점쟁이에게 물어봤더니 형부모를 해야 좋다고 한다. 그리고는 풍각쟁이 노파인 어떤 사람을 내게 인사 시킨다.

어머니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싫다는 표정도 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다. 나를 무탈하게 기도해준다고 하여 형부모라 부르고 수름재에 있는 법당에서 보름동안 먹고 자며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미신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왠지 내 적성에 맞지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1217일 퇴원 수속을 하였다. 4월에 발명하여 치료기간이 9개월 걸렸다. 얼굴이 아직은 볼품없지만 그래도 건강상태는 양호 했다. 이제 몸이 원래 예전과 같았다. 그래서 서울에 올라가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몸도 성치 않고 날씨도 이제 추워지는데 갔다가 몸에 이상 생기면 힘들다고 못 가게하며 설 명절이 지나거든 가라고 한다.

건강도 예전처럼 되어가고 있어서 마음에 여유가 있는 것 같아서 내수에 있는 성당에 나가기로 했다. 하나님에 힘을 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너무 외로운 것 같다. 주위에 누구하나 내편에 서있는 사람도 없고 지금 것 아파온 몸뚱이 때문에 마음에 안정이 필요 했다. 이제는 내 몸에 평화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무엇보다도 성당에 다니게 된 동기는 수녀병원에서 참 좋은 임데레사 간호사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가 처음 병원 갔을 때부터 특별히 잘해주었다. 간호사 일이 바쁘지만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특히 내가 책을 좋아하는 것을 안 그녀는 진료를 마치고 돌아 갈 때는 읽을 책이나 잡지를 내게 들려주었다. 그녀는 성당에 다니라고 조언 해주며 성경책도 주었다.

그녀를 보기 위해서 병원 가는 것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그녀가 보고 싶어서 일부러 그 먼 곳까지 가기도 했다. 가족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지 못한 나는 따뜻한 그녀의 호의에 감사했고 무척 고마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기대서고 말았다. 그녀에게 정식으로 사귀자고 제의 했지만 그녀는 성직자의 길을 가겠다며 거절 하였다. 그냥 친구이길 원했던 그녀와 2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녀는 책과 신문을 꼭 빠지지 않고 우편으로 보내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충주에 있는 수도원에 입소했다는 연락을 받고서 부터는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안부가 궁금해서 수녀병원을 찾았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나이팅게일 같은 천사의 마음을 가진 간호사로 내가 건강하도록 친절하게 보살펴준 은혜의 女子로서 늘 감사한 마음을 평생 잊지 않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꼭 한번은 보고 싶은 그녀 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내 병명은 결핵성 늑막염이었다. 나뿐 환경에서 작업을 하며 제대로 먹지 못해서 체력이 약한 사람들에게 발명하는 병으로 그 당시는 죽는 사람들이 많았던 나쁜 병이다.

천만다행으로 우여곡절 끝에 수녀병원에서 건강을 찾았다. 이제 내가 가야 할 곳이 있다면 고향을 다시 떠나야 했다. 슬픔의 언덕 역경의 강물 저쪽에 펼쳐진 희망찬 들녘은 너무나 멀다.

먹장구름이 많은 폭풍우를 몰고 오는 어려운 삶의 길이 힘들고 어렵지만 내 자신을 위해서 언젠가는 웃을 수 있는 그날이 위해서 꿋꿋하게 지켜 나가야 한다. 한편 신촌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집이 인천이라 했던 강문(姜汶)이란 친구도 잊을 수가 없다.

25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그 친구가 생각나서 여러 방면으로 찾아보려고 했지만 내 힘으로는 찾을 수 없었다. 얼굴이 좀 넓적한 그 친구에게 당시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지만 영영 소식을 알 길이 없다. 정말 보고 싶은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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