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書/生活수필

골수염의 고통

시인김남식 2004. 6. 12. 17:31

골수염

                                                                                        김남식

초등학교 3학년 때 얼음판에서 넘어진 후 6년 동안 일 년에 두세 번씩 몸을 괴롭혔다. 그래서 항상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해도 가뭄이 지독했다. 모내기를 해야 되는데 논에 물이 없었다. 비가 온지가 오래 되었다. 그래서 새벽부터 논에 물을 대는 게 큰일이었다. 모내기 한 논에 물이 마르고 있으니 아버지는 더욱 역정으로 식구들을 볶았다. 농사짓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가족의 일원으로써 그런 것들이 정서적으로 어린 시절을 불안하게 자라게 되었다.

그러니 몸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가 아니었다. 만약에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가서 죽으라는 말이 분명히 나올 것을 모르는 내가 아니었다.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지만 크게 걱정 하지 않았다. 가끔 춥고 어떤 때는 몹시 열이 나기도 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작년 가을에 수술 했는데 또 무슨 일이 있으려니 했다. 몸이 피곤해서 몸살 좀 난 것 이라 생각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교실에서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가 책상 모서리에 다리의 정강이가 닿았다.

그런데 몹시 아픈 것을 느꼈다. 심상치 않은 것을 직감에 알고 바지를 걷어 보았다. 그런데 다리에서 이상한 것이 만져지고 있었다. 정말 무관심해서 그런지 다리 아픈 것을 처음 알았다. 갑자기 내 얼굴은 어두운 그림자를 하고 있었다. 저녁 막차를 타고 집에 오는 길은 무척이나 멀고 지루했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서 해를 보면서 집에 가니 좋았다. 마을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천천히 혼자서 십리 길을 걸어오다가 고갯마루에서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지를 다시 걷어 올려서 보니 계란 크기 모양으로 빨갛게 부어 있었다. 내 몸이 아픈지도 모르고 무관심 하게 보낸 것 같다. 손끝으로 눌러 보면 물컹하게 살이 들어갔다. 느낌에 고름이 이미 살 속으로 가득 들어 있었다. 아프지는 않지만 주먹으로 치면 통증이 왔다. 나도 모르게 덜컹 겁이 난다. 지금 가물이 들어서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다. 어떻게 식구들에게 알려야 할지 고민 이었다.

작년 가을 엉덩이 생긴 상처를 수술 한 지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또 이런 것이 생겼으니 걱정이 가득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이 계속 되는지 자신을 원망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내가 복이 없는 내 탓이려니 하면서 시련을 이겨야만 했기에 걱정스런 한숨을 쉬는 지푸라기 인생 이었다.

아무리 울어 봐도 소용이 없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넘어갔고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내 아픈 맘을 달래 주는 이 없는 고갯마루에는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어둠이 밀려오는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산을 천천히 내려오면서 또 어찌해야 되는지 걱정이 앞섰다. 평화스런 시골 들판으로 저녁 안개가 자욱이 내리고 있었다. 내일은 일요일이다. 어떻게 되겠지 하고 체념을 하며 집으로 왔다. 집에서는 보리타작을 하느라고 식구들이 마당에서 분주하게 일 하고 있었다.

“왜 이제 오니 일찍 와서 집안일을 거들지 않고”

아버지가 일을 하다 말고 토요일인데 늦게 온다고 내게 야단을 한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못들은 척하고 배가 고파서 부엌에 들어가 밥을 먹고 있었다.

“남식아 와서 마당 쓸어라”

내 걱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우리 아버지는 일 하라고 주문한다. 아버지의 고함 소리에 밥을 먹다 말고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 설거지를 도와야 집안이 편했다. 다음날은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어찌된 일인지 다리가 힘이 없고 절룩거리고 있었다. 식구들에게 들킬까봐 아침을 먹고 혼자 바람을 쐬고 싶어서 뒷동산에서 바지를 걷고 아픈 곳을 또 만져 보고 문 질어 보고 다시 눌러 보았다. 다리에 커다란 고름집이 생긴 것이 틀림없다. 정말 환장 할 노릇이고 미칠 지경이었다. 그냥 울고 싶었다.

먼 산을 바라보다가 긴 한숨으로 그냥 아무 탈 없이 낳기를 바랐지만 다시 일요일 저녁이 어두워 졌다. 그런데 마치 몸살 난 것처럼 열이 나고 초여름인데도 몹시 추웠다. 어찌나 추웠던지 아버지에게 쇠죽을 내가 하겠노라고 하고는 사랑채 부엌에 불을 피웠다. 아버지는 집안일을 돕지 않고 어디 갔다 왔느냐고 여전히 야단 하신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쇠죽을 끓이고 있었다. 이 모든 시초는 어찌되면 6년 전 처음 발병 했을 때 큰 병원에 가지 않고 대충 치료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버지는 알고 있을까? 아버지는 아픈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마솥에 소죽을 넣고는 밖으로 나 가신다. 저녁에는 온몸이 땀에 젖도록 열이 올랐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새벽 어둠속에서 눈을 떠보니 몸이 나른하고 다리는 어제보다 더 힘이 없었다. 일어나야 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밖에는 비가 내리는지 지붕 처마 밑에서 낙숫물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새벽 5시 어머니는 학교 가라고 깨운다. 그러나 도저히 일어 날수가 없었다.

“얘! 학교에 안가? 정신 차려.”

“엄마, 밖에 비 오는가 봐요.”

“그래 나 가봐. 비가 와서 마당에 담장이 무너졌다.”

“비와서 좋겠네, 논에 물대라고 하는 아버지 성화도 이젠 안 하겠지.”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정말 몸이 말을 들지 않았다.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 뭐라고 애기하고 그리고 변명해야 될지 혼자 한 걱정이었다. 요즘 며칠 사이에 몸이 상당히 피곤하고 한기를 느낀 것은 상처에 고름이 잡히려고 했던 것 같다.

매번 아픔을 알면서도 별일 없겠지 했지만 결국 아픔이 또 오고야 말았다. 이불 속에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밖에 나갔던 어머니가 다시 들어와서 재촉을 한다.

“왜 늦장을 부려, 학교 안가는 날이야.”

화를 내며 바라보고 있던 어머니는 근심이 가득한 내 얼굴을 발견하자

“너 어디 아프냐?”

“응! 엄마”

금방 눈물이 핑 돌며 눈물이 얼굴 아래로 흘러 내렸다.

“어디 아픈데 그래”

“다리가 또 아파.”

“뭐? 다리가 또 아파. 어디야”

모든 것은 어머님이 수습 할 것이라 생각하며 올 것이 왔구나 체념했다. 어머니에게 많은 근심과 걱정을 여러 번 안겨 주었다.

“왜 진작 애기하질 않았어. 또 누굴 죽이려고 응”

내 아픈 다리를 만지던 어머니에 얼굴에도 어느덧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 후 식구들이 모였다. 모두 혀를 차며 다음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한참 떠들던 식구들이 모두 나갔는지 집안이 조용했다. 밖에는 빗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이불 속에 누어서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왜 나만 울고 울어야 하는지 왜 이토록 시련과 고통을 안겨 주는지 내가 무슨 잘못이 많아서 무엇 때문에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고통을 주는지 하나님도 부처님도 모두 미웠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한숨이 저절로 나오고 있었다.

학교도 가지 못한 채 방에 누워 있었다. 어린 내게 가혹한 시련의 연속 이었다. 오후에 어머니가 마을에 있는 의사를 데리고 왔다. 그는 내 다리를 만져 보더니 파스를 부처 주고 주사를 놓았다. 그리고 내일 증평 수녀병원에 한번 가보는 게 좋다고 했다. 의사가 다녀가고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가 그치니까 모두 들에 나간 것 같다. 어제 점심부터 굶었으니 배가 몹시 고팠다. 부엌에 가서 찬장을 열고 우선 무엇을 먹어야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고 모든 것을 체념 하면서도 설마 어떻게 되겠지 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아픈 상처가 곪아 갈수록 더 힘이 쪽 빠지는 것 같다.

수녀병원은 속이 아프거나 하는 내과 치료는 되지만 외과 치료는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청주병원으로 갔으면 했지만 약값이 싸기 때문에 증평 수녀병원에 가기로 결정 하였다. 누구나 아프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아프다는 게 가족들에게 죄인이 된 것 같아서 그냥 속상했다. 다리에 통증이 심하게 아파오지만 참고 그렇게 또 하루를 보냈다. 배움을 갈구하는 어린 소년은 학교 결석이 더 걱정이었다. 학교에 연락 할 방법이 없었다. 다음날은 화요일 큰 형과 같이 수녀병원에 가려고 어머니와 아침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가길 어디가? 논에 물 대야지”

아버지 성화에 형이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정말 인정도 없이 매정하였다. 우리 어머니가 늘 아버지에게 말하듯 데려온 자식이냐고 했다. 볼품없이 깡마른 자식이 아파서 울고 있는데 농사 걱정만 하고 있었으니 서운 하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마침 내수에서 우리 마을까지 도로확장 공사 때문에 길이 진흙으로 엉망 이었다. 걷기 불편해서 도저히 내수까지 한 시간을 걸을 수 없었다.

도로 공사하는 운전기사에게 어머니가 간절하게 부탁해서 트럭에 몸을 싣고 털컹 거리며 내수 까지 쉽게 올 수 있었다. 새마을 사업으로 청주에서 우리 마을까지 시내버스가 다닌다고 사람들이 좋아하고 있다. 유월의 태양이 눈부시게 내리 쬐고 있었다. 증평에는 형수의 친정에서 목재상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리어카를 빌려서 그것을 타고 가야만 중환자인 줄 알고 진찰 받을 수가 있다고 했다. 당시 수녀병원을 찾는 모든 사람을 다 받는 게 아니라 하루 진료 할 수 있는 숫자의 환자를 받았다. 특히 긴급환자를 우선 진료해 주었다.

그래서 리어카에 누워서 머리만 내 놓고 이불을 푹 뒤 집어 쓰고 병원에 도착 했다. 병원입구에서 부터 길목 끝까지 환자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환자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문진을 해서 진찰권을 주려고 수녀와 간호사가 나왔다. 어머니는 수녀가 도착하면 많이 아픈 시늉을 하라고 이른다. 이윽고 수녀가 다가 왔다. 어머니는 울상을 지으며 진찰을 할 수 있도록 애원을 하였고 나도 아픈 시늉을 하면서 울고 있었다. 수녀는 이리저리 다리를 보더니 고개를 흔든다.

“선상님! 어떻게 치료 좀 해주세유?”

어머니와 형수가 간곡한 부탁을 했지만 미국인 수녀는 고개를 흔든다.

“이거는 수술해야 됩니다.”

우리나라 간호사가 여기는 수술 하는 곳이 아니라며 청주로 가라고 한다. 수술해야 되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청주로 가면 진료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수녀병원에서 거절을 하자 뜻을 이루지 못 하였다.

“애! 어떻게 하면 좋으냐.”

“청주에 가서 수술을 해야지, 별 도리가 없네요.”

우리 큰 형수의 말이다. 리어카 바퀴처럼 데굴데굴 굴러가는 인생 별 것 아닌데 혼자 고통을 앉고 살아야 하는지 한참 뛰어 놀 나이에 고난의 끝은 언제일지 눈물이 마구 흘렀다. 청주로 가야 된다는 소리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엄니! 진지도 안 드시고 나왔는데”

형수는 점심을 먹고 병원에 가도 늦지 않는다고 한다.

“너 밥 먹고 갈래”

“싫어요. 안 먹을래. 먹기 싫어”

사돈댁에서 일부러 준비한 점심을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몇 수저 들더니 식사도 하지 않고 수저를 놓는다.

“큰애한테 돈 준비해서 아침에 일찍 나오라고 해”

큰 형수에게 잊지 않도록 어머니는 신신당부를 하였다.

형수는 어린 조카를 없고 들판 길을 걸어서 집으로 가고 어머니와 청주 가는 버스를 탔다.

그때는 증평에서 우리 마을 까지 세 시간을 사람들이 모두 걸어 다녔다. 이래저래 큰 형수도 나 때문에 고생이다. 청주 작은형 집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형이 시골에서 올라왔다. 눈치를 보니까 돈을 준비하지 않은 것 같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절에 우환이라는 것은 가족들에게 못할 짓이었다. 그러나 살고 죽는 것 아픈 것도 내 맘대로 하는 게 아니다.

“큰애야, 돈 얼마나 준비했냐.”

“장날이 돼야 돈 구경 하는데 들어서 학교 선생들에게 조금 빌렸어요.”

형과 어머니의 대화를 듣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어제 집을 나올 때만 해도 걸을 수 있었는데 걸을 수가 없어서 형 등에 업혀서 길을 나섰다. 무릎 밑에 상처는 밤새 더 많이 부어올랐다. 싸게 수술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려고 이곳저곳을 들렸다. 의사는 진찰 하더니 입원과 수술 하려면 15,000원 든다고 해서 병원을 나왔다.

그리고 다른 두 곳을 더 돌아 다녔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픈 사람을 데리고 다녀서 온몸에 땀이 흐르고 있다. 오후 한시 도청 앞을 지나서 중앙시장 찐빵집 앞을 막 지나고 있었다.

“남식이 뭐라도 먹여야 병원에 가지”

“형 빵이 먹고 싶어, 우리 빵 먹고 가”

먹음직스러운 찐빵이 접시에 소복이 올라 와 있었다. 아침을 먹지 않았기에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몇 개를 주워 먹었다.

“배고프잖아. 형하고 엄마도 먹어”

배가 잔득 불렀다. 빵집에서 한참 쉬였다가 나와서 역전으로 이르는 길목에서 보리타작에 사용하는 도리깨 나무를 사가지고 가던 시골 할아버지를 만났다. 커다란 사람이 등에 업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하고 물었다.

“다리가 아파서 그래요.”

“병원에서 주마담 이라고 하는데 걷지 못해서 병원에 가는 거유”

어머니가 대답을 한다.

“아 그 병엔 박쥐가 그만 유”

병은 자랑을 해야 고친다는 어른들 말도 있지만 할아버지는 박쥐를 삶아서 물을 먹어 보라고 한다. 고약한 냄새나는 박쥐 삶은 물을 먹었던 것을 생각하면 비위가 상해서 오금이 서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번은 검은 가마솥에 고양이 넣고 증류수를 내려서 먹었다. 먹기에 참으로 역겨웠지만 병을 고쳐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할 수 없이 먹기는 했지만 효험을 본 것은 아니었다.

옛날 사람들이 어리석었는지 아니면 그렇게 해서 병을 고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또 한 번은 시골 뒷간(화장실) 입구를 막아 놓은 짚으로 만든 가림 막을 삶아서 먹은 적도 있었다. 살고 죽는 기로에 서면 무엇이든 먹는다는 말처럼 화장실에서 모든 냄새에 찌든 것을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말 할 수 있다. 그때는 이런저런 민간요법이 무척 많았다. 병원에 도착해서 의사가 진찰을 하고 있었다.

“주마담은 수술해도 번식력이 강해서 완전히 고친다는 것은 조금 어렵고 특히 매년 한번 씩 재발하는 나쁜 병이죠. 나이를 좀 먹으면 괜찮을 수도 있어요.”

바지를 걷어 올려 이곳저곳을 누르며 만져 보면서 의사가 아프냐고 물어온다.

“수술해야 됩니다. 뼈가 상한 것 같으니 사진을 찍어 오세요.”

당시 병원에는 엑스레이 기계가 없었다. 그래서 보건소 가서 700원을 주고 사진 두 장을 찍어왔다. 의사는 환등기에 사진을 비춰 보더니 뼈에 콩알처럼 흰 부분을 가르치며

“수술을 해야 되는데 음식 먹은 거 없지요”

“아까 빵을 먹었는데.”

“음식이 소화해야 하니까 오후 4시쯤 수술 합니다.“

마취하기 때문에 식사를 하면 안 되는 것 같다. 뼈 속까지 수술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단골이라서 입원비 8,000원으로 싸게 해 주준다고 한다. 등뼈 밑에 마취주사를 놓고 얼마 있으니 하반신이 마취가 되었는지 감각이 없다. 칼로 째는 소리 썩은 곳은 망치로 치고 끌로 뼈를 긁어내는 목수가 나무를 다듬듯 수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사는 고름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한 시간 수술을 마치고 다리를 석고와 붕대로 싸매자 다리가 묵지함을 느꼈다.

유월은 시골에서 일손이 바쁜 농사철로 모내기도 해야 되고 보리타작도 해야 되는데 병원 일로 큰형이 병원일로 왔다 갔다 하니 아버지 성화는 여전했다. 가뭄이 계속되자 논이 말라 모내기를 다 하지 못 했으며 호미로 땅을 파서 심는다고 한다. 날씨가 가물어서 보리는 여물지 못하고 그냥 말라 죽었다고 걱정 한다. 오랫동안 병원에 있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더 있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퇴원했다. 그런데 수업료가 문제였다. 3개월마다 한 번씩 내는 수업료를 낼 때마다 매번 곤욕을 치렀다. 3개월 수업료가 밀리면 학교에서 정학처리를 한다고 하여 석고상을 아직 풀지 못해 불편 했지만 절룩거리며 담임선생님을 찾아 갔다. 선물로 가져 온 술과 와이셔츠를 내 놓으며 이야기 하였다.

“선생님, 학습 진도가 많이 나갔지요.”

“그런 것은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우선은 건강이 문제니 서무과에 애기는 잘 했지만 그래도 자꾸 밀리면 한꺼번에 내기 더 힘듭니다. 좀 어렵지만, 어머님 어찌 하겠어요”

담임선생의 애기였다. 한 달 수업료 870원 3개월이 밀렸으니 2,610원. 다음 분기 까지 5,220원이 있어야 했다. 병원비도 하루에 800원 그것도 며칠씩 밀렸으니 아프다고 엄살 부리거나 투정 할 수가 없는 처량하고 따분한 신세였다. 학교를 중도에 그만둘까 생각했다. 아파서 누워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내일 어머니가 집에 좀 가 봐요”

“가면 느이 아버지가 해 주겠니. 당장 학교 그만 두라고 할 텐데”

“그래도 형하고 상의해서 조금 이라도 내야지.”

그동안 가족들 눈치 보느라고 사실 독촉하지 못했다. 친구들은 고등학교 가려고 보충 수업을 하는데 수업료 걱정과 아파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있으니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어떤 일 있어도 꼭 중학교는 졸업해야 한다 생각했지만 내 뜻과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손수레로 병원을 나와 무심천 둑길을 오면서 팔이 아프다며 푸념하는 작은 형수에게 나는 할 말을 잊었다. 그저 미안해요라고 말 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세상을 잘못 만난 것 같다. 어느덧 수술한지 한 달 무겁던 석고가 사라지고 이제 붕대만 감겨 있다. 다리가 한결 가벼웠지만 아직 다리에 힘이 없어서 또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아침부터 뜨거운 여름 햇살로 시작되었다. 텃밭에 있는 옥수수의 빨간 수염은 갈색 빛으로 고개를 내리고 고추밭의 고추도 하나 가득 달려있었다. 생명은 저렇게 자라고 있는데 이 더위에 방구석이 앉아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으니 내 자신이 한심 했다.

그나저나 학교를 잘 마치려면 농사가 풍년 되어야 한다. 아픈 사람이 집안 걱정을 혼자 하고 있다. 가뭄 속에서도 모내기를 모두 마쳤다고 하니 마음이 편하고 기분 좋았다. 어느새 7월로 접어들자 더위는 더 한층 기승을 부렸다.

차츰 다리에 힘이 생겨서 걷기에는 불편함이 조금 덜 해서 이제 기운을 차려야 한다. 그래서 정말 공부해야 될 것 같아서 노트를 빌려 필기도 하고 자습을 시작 했다. 고등학교에 가서 내 스스로 살아갈 힘을 키워야 되겠다고 생각 했기에 틈틈이 공부를 하였다. 몸이 약해서 남처럼 힘든 육체적인 노동은 할 수 없으니 걱정 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항상 걱정 하신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1년에 225일을 출석해야 하는데 두 달 이상 결석을 하면 출석 일수가 200일도 못되니 학교에 나 오라는 편지였다. 더구나 수업료 때문에 담임선생님이 서무과에 가서 각서를 섰다고 하니 정말 할 말도 없고 미안하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수업료를 미처 내지 못하는 것을 이해를 하고 좀 봐 주지 않고 학교가 참으로 야속하였다. 약 43일간 결석을 하고 7월 18일 학교에 가니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 여름 방학을 하던 날 서무과에 불려갔다. 9월1일 개학날 2,610원을 납입해야 한다고 한다. 형 집에서 공짜로 눈치 밥을 먹는 것 같아서 시골로 내려가기로 하고 어머니와 병원을 찾았다.

“3일에 한 번씩 치료해야 하는데 시골가면 오기 힘들 텐데 몸조리 잘 하고 엄마한테 고기 좀 해 달라고 해라”

의사 선생님 말씀이다. 병원을 나와 시골 가는 버스를 타고 긴 여행에서 돌아오니 금의 환영도 아닌데 동네 사람들이 집으로 병문안 차 모두 찾아 왔다. 그런데 좀 어떠냐? 아프지 않냐? 고생 많았지 하고 묻지도 않는 우리 아버지가 참으로 정말 야속했다. 내가 아버지가 아니라서 당신에 맘을 알 수는 없다.

삼복더위와 함께 60년래의 가뭄과 홍수가 겹쳤다. 양수기로 물을 퍼서 겨우 모내기를 했더니 며칠 되지 않아 홍수로 모든 것이 휩쓸고 지나갔다. 식구들에게는 병원에 간다고 알리지 않고 몰래 다녔다. 어머니가 담배 밭에서 일한 품삯 150원 으로 병원비에 다녔다. 병원에서는 또 와야 된다고 하니 갑자기 의사들은 도둑놈 같았다. 어머니가 뜨거운 햇볕 아래서 밭 일 하는 게 안쓰러워서 좀 많이 낳은 것 같아 병원에 가질 않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가을도 지나고 겨울 어느덧 그 파란만장 했던 학창 시절의 종지부를 찍던 날 내 마음은 몹씨 추웠다. 친구들은 고등학교 진학이야기로 들떠 있는데 교실 한 쪽에서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정말 어렵게 중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중학교 3년 내내 수업료 때문에 여간 애를 태웠다. 아프지 않았다면 집에서 수업료를 잘 해주었을까 그리고 고등학교도 보내줬을까 그 생각을 해 보지만 어린 내게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충북의 수재들이 모였다는 청주중학교는 친구들이 거의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그 당시 다들 사는 게 어렵고 힘들었지만 자식들 공부에 부모들은 아낌없이 투자를 하였다.

당신은 공부를 못했지만 자식들에게는 넓은 길을 인도하기 위해서 뭔가 아는 부모들은 등골이 빠지도록 일 하면서도 자식들 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우리 집은 참으로 인색하였다. 아버지는 건강하지 못한 아들에 장래보다 당신이 먹고 사는 문제 지금이 중요하였다.

논에 모를 못 심으면 식구들이 모두 굶어 죽는다는 경제이론이다. 부모를 잘못 만난 탓일까 내가 복이 없어서 일까 그 생각을 하면 지나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몸이 약한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못하면서 머리 좋은 자식 공부시키는 데 왜 인색 했는지 그 시대를 살아온 부모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다.

이런저런 식구들 눈치를 알고 있는 내가 자신이 싫어서 스스로 진학을 포기 했는지도 모른다. 항상 나 때문에 돈 많이 썼다고 하는 가족들의 푸념을 더 이상 듣고 싶지가 않았다. 혹여 고등학교에 입학을 한들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중퇴 할지도 모른다. 살림이 좀 힘들어도 나중을 위해서 투자를 할 줄 아는 안목이 없는 무지한 가족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식구들을 원망하며 오히려 내 자신이 초라해진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 드리고 진학을 포기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이제는 웃어야 한다.

사실 주위에서 입학시험 시험이라도 보거라 하며 독려해준 가족이 없었던 것도 나를 더욱 슬프게 하였다. 주위에 기댈 사람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합격을 하면 혹여 누군가 도와주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지 못 했다. 어쩌면 중학교 졸업도 못하고 중도에 포기 할 뻔 했던 지난 일을 생각하면 중학교 3년간 생활도 너무나 끔직했다.

시대를 잘못 태어났고 어찌 보면 세상 빛을 보지 않았어야 할 종말의 운명이었다. 힘들게 어려운 세월을 지나왔다. 이것으로 학창시절은 모두 끝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찹찹했다. 졸업식 날 교실 한쪽 모퉁이에서 친구들 몰래 어머니와 같이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모든 것을 자네가 잘 알겠지만 진학을 못 했다고 너무 낙심 말고 꾸준히 노력해라. 특히 건강에 항상 주의 하고 어머님 은혜에 항상 감사 할 줄 알아야 한다.”

친구들은 중앙시장 빵집에 가서 졸업 파티 하자고 했지만 난 그냥 돌아서서 학교를 나왔다. 마지막으로 교문을 나서는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가고 싶었던 고등학교를 갈 수 없다는 것이 무척 마음이 아팠다. 청운의 푸른 꿈을 앉고 시작했지만 아무것도 얻지를 못 하였다. 자신감을 모두 잃고 서운함만 가득하여 패잔병으로 쓸쓸히 돌아섰다. 고등학교에 진학을 해야 꼭 출세하는 것은 아니지만 몸이 약한 내가 앞으로 길고 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그래도 배움이 있어야 새로운 세상에서 무엇이든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굴 원앙 할 수도 없고 그저 자신을 탓 할 수밖에 없다. 다시는 오지 못할 학교를 뒤 돌아 보고 또 돌아보며 눈물을 훔쳤다. 어깨가 죽 처진 채로 어머니와 함께 시골 가는 버스를 탔다. 겨울 찬바람이 내 몸 전체로 불어와 걷잡을 수 없이 슬픔이 비 오듯 쏟아 졌다. 사실 중학교도 억지로 아주 힘들게 졸업한 것으로도 정말 감사해야 한다.

우리 집은 팔남매 중 막내인 나 혼자만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런데 큰집과 작은집은 우리와는 다르게 교육을 시켰다.

집에 돌아와서 내일부터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몸이라도 튼튼하면 농사를 짓든 공장에 나가든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선뜻 자신이 없다. 아픔으로 몸이 많이 더 쇠약해 졌지만 앞으로 내가 알아서 내 자신을 만들어가야 한다. 내 인생을 내가 지고 가야 한다. 그래서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을 갖아야 하는데 아직은 무엇이든 그러지 못한 내 자신이 미웠다. 공부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야망의 꿈이 참 많았는데 이것이 내 운명 인데 하면서 스스로 모든 것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시골 가는 버스차창 밖 유리창도 내 눈물처럼 빗물이 흐르고 있다. 진짜 내일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그 걱정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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