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서울역의 애환

시인김남식 2015. 9. 18. 20:46

서울역의 애환  솔새김남식

 

서울역은 경부선과 경의선 및 인천 국제공항철도 그리고 지하철 1호선과 4호선이 지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역으로 대한민국의 행정, 교통의 중심지이다


우연이 버스를 타고 자나치다가 舊서울역이 보이면 신역 보다도 더 애착이 가고 웬지 모를 아련한 추억에 젖어

잠시 머뭋거리게 하는 곳이 바로 옛 서울역이다. 마중나올 사람이 없어도 그냥 기다려지는 곳이다

 

1925년 준공된 경성역은 그 당시 초대형 건축물이었다.

동양의 제 1역은 도쿄, 동양의 제 2역은 경성역으로 불릴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시대의 경성역은 한반도 현관이었으며 대륙의 식민지 통치에 관문이라는 역할이 부여 되었다

 

일제시대는 경성역에서 부산을 거처 배를 타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사람들과

새로운 삶을 위해서 신의주나 함흥을 거처서 만주나 북간도, 연해주로 떠나는 실향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중국 대륙으로 떠나는 애국지사의 배웅터였던 곳이 바로 서울역이다. 

  

6.25 전쟁때 서울역은 오고가는 피난민들로 연일 북새통을 이루었고 역 광장 주위는 피난민들이 노숙하거나

"보통강(평양)에서 헤어진 말숙이를 찾습니다" 라고 피켓을 들고 전쟁 피난길에서 헤어진 사람들이 

만남의 장소가 되었던 참으로 애환이 깊은 피눈물나는 역사를 쓴 곳이다.

6.25전쟁이 끝나자마자 우리에게는 의식주가 궁핍했던 시절이 되었다

돈 벌겠다고 좀더 낳은 삶을 위해서 무작정 고향을 떠나 낯선 서울역에 도착하면 어디로 가야할지 망서리며

갈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역광장을 며칠 동안 서성이고 노숙을 했었다

 

그래서 서울역은 애환이 서려있기 때문에 역사적이나 문화적으로 볼 때 우리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곳으로 

객지를 떠나온 많은 사람 중에는 성공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민족은 고난기와 궁핍기를 거치며 삶은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기다림으로 항상 설레임과 함께 왔다
그래서 매 시간 마다 기다림으로 살고 있는 것 같은 곳이 바로 지금의 서울역이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어디를 떠나는 사람 그리고 떠났다 돌아오는 사람으로 연일 북새통이었다


 

1960년도 당시 서울역에서 부산까지의 역 숫자가 55개로 기억라고 있는데 지금은 지철역이 있어서 더 많겠다.

일반 사람들이 타는 보통열차 비둘기호는 부산까지 가려면 하루 종일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조금 빠른 열차가 통일호 리고 우등열차인 무궁화호, 좀더 빠르게 가는 새마을호가 부산까지 5시간 걸렸다.

 

완행 열차를 타고 부산까지 가는 길에 급행열차를 만나면 먼저 보내는 교환역에서 몇분씩 여러번 기다려야 했다.

그 기다리는 10여분의 짧은 시간엔 어김없이 그 지역의 주민들이 먹을 것을 갖고 열차에 올라와서 

삶의 골육지책으로 물건을 팔고 그랬었다.


주로 김밥과 계란은 물론이고 찐빵과 떡 그리고 지역 상품으로 성환참외, 천안 호도과자, 조치원 복숭아가 올라왔고

특히 대전역에는 잠시 정차하는 10여분의 시간에는 가락국수로 요기를 때우는 사람들이 마치 시장터 같았다.

그때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애환이 있는 이야기이다

 


서울역에서 숭례문 방향으로 보이는 건물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이다.

옷을 만들고 재생하는 양품산업이 한창이었던 그때는 경제발전의 기초로 재봉틀이 한몫을 했었다

서울로 시집간 언니나 누나를 만나러 방학때 서울역에 내리면 맨 먼저  보이는 '아이디얼 미싱' 재봉틀 광고

네온사인이 요란하게 움직이는 광고 모습이 아이들 보기에는 참으로 신기했다

 

당시 주부라면 누구나 한 대쯤 장만하고 싶었던 필수용품 일위가 재봉틀이었고 1970년대초 까지만해도

수출 효자였던 섬유· 의류, 가발 산업에 부흥을 일으킨 주인공이 바로 '미싱' 이었다.

 

그 애환이 있던 서울역 광장은 가끔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서 데모를 하며 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장소로 변했고

생활이 나아젔는데도 아직도 삶을 배회하는 사람들이 숙식하는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다른 고가나 육교는 헐어 내면서 왜 유독 그것을 망서리고 있을까?

서울역 고가도로가 옛 서울역의 경관을 방해하는데 특히 사진을 찍으면 그 모습이 확연하다. 


당시 자동차가 그리 흔치않던 1970년대 경제개발의 성장의 상징으로서 차가 우선이라 고가도로나 육교가

마치 새로운 도시의 풍치처럼 건설되었다가 지금은 거의 철거 되었지만 서울역 고가는 아직도 제자리에 있다 .

 

숭례문 쪽에서 봐도 그렇고 퇴계로 쪽에서 봐도 그렇고 염천교나 용산 쪽에서의 전망은 더 밝지 못하여 

옛 서울역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이젠  흉물스러운 저 고가차도를 헐고 애환이 담긴 서울역을 아름답게 탈바꿈 시켜 시민에게 돌려줘야 하는데

다리 위에 화단을 만들고 걷는 길로 만든다고 하는데 혹여 다른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다 

 

 

 

서울역의 이력서

1900년 7월 8일 : 신문외역(新門外驛)으로 영업 개시
1905년 3월 24일 : 남대문역(南大門驛)으로 역명 변경
1923년 1월 1일 : 경성역(京城驛)으로 역명 변경
1947년 11월 1일 : 서울역으로 역명 변경

1988년 9월12일 : 민자역사 준공 2004년 4월 1일 : KTX 운행 개시

 

숭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 모습 1960년대의 그 모습이 보고싶다.

 

옛 서울역은 사적 284호로 지정된 옛 서울역 건물은 한국철도공사에서 2006년에 문화재청으로

소유권이전 되면서 지금은 '문화역 서울 284' 로 탈바꿈하여 보존하고 각종 전시와 구경거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서울역앞에는 강우규(姜宇奎, 1855∼1920)의사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1919년 9월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마코토가 서울역에서 내려서 마차에 오를때 수류탄을 던처 거사를 했으나

실패를 하고 신문기자와 경찰등 37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는 1920년 11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을 했으며 국립묘지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기행 > 역사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주탑동 오층석탑  (0) 2015.10.01
밀풍군의 묘  (0) 2015.09.25
헤이그밀사 이상설생가  (0) 2015.09.15
이수광의 지봉유설  (0) 2015.09.12
부여 부소산성  (0) 2015.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