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1870년 ~ 1917년)
본관은 경주.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 되었으나 외교권이 없는 나라의 대표라는 제국주의
열강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역사는 이것을 "헤이그 밀사사건" 이라고 한다
생가는 중부고속도로 청주에서 서울방향 진천IC 직전 1Km 지점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로
고속도로와 바로 이웃하고 있다.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그를 정사로 하고
이준과 이위종을 부사로 삼아 파견했지만 외교권이 없는 나라의 대표라는 제국주의 열강의 반대로 실패하자
이상설선생은 귀국하지않고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여러나라로 다니면서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열쇠라고 주장하는 외교 운동을 벌였다 .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냉정함에 허망하여 순국한 이준열사를
헤이그에 남기고 돌아오자 일본은 결석 재판에서 이상설에게 사형, 이위종에게는 종신형, 이준에게도
종신형을 선고하고 고종을 폐위시킨게 된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자결(殉國)한 것으로 되어있는 이준열사는
서울에서 헤이그까지 장거리 여행으로 육체적 정신적 피로까지 겹쳐 헤이그의 한 호텔에서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는 유언을 남기고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이상설은 이준의 죽음을 유럽에서 외교활동을 하던 이위종이 급서를 보고 받고 헤이그로 돌아왔고
이때 이상설이 독자 결정으로 헤이그에 모인 세계 각국 대표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할복 자살을 했다고 바꿔서 발표했다는 것이다
즉 외교 사절단을 헤이그에 파견했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이준 열사의 죽음으로 이용하여
일제 만행을 알리는데 활용 했다는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시, 체결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고종에게 5차례 올렸으나
12월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에 그쳤다.
그후 국권회복과 애국 계몽운동에 앞장서며 1906년, 영의정에 임명되었지만 한 달 동안 있다가 사직하고
1906년 4월에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심하고 이동녕, 정순만과 같이 망명길에 올라 상해를 거쳐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서전서숙이란 학교를 건립하였다
.
이상설은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896년 성균관 교수가 되고
탁지부 재무관에 임명되었다. 이무렵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1914년 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등에 있는 동지를 모아 대한광복군 정부를 세웠다.
이후 외국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지원을 호소하다가 1917년 망명지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47세에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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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광복을 이루지 못 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 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함께했던 동지들이 유해는 흑롱강가에서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 북해 바다에 뿌려졌다고 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71년 보제 이상설선생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에서 숭모비(崇慕碑)를 건립하고 1975년 숭렬사(崇烈祠)를 건립했다.
숭렬사 담장을 돌아서면 이상설선생의 초혼묘가 있다
초혼묘는 유골이없는 혼백을 모신 墓로 1996년 정화사업때 러시아우수리스크 강변에서 초혼식을 거행한 후
이 곳에 부인과 함께 모셨다고 한다
이상설선생의 동상과 유허비
연해주 우수리스크 수이푼강가에 있는 이상설 유허비
나는 아직 가 보지 못했지만 국내여행사 불라디보스토크 관광 상품에 포함되어 있다
이곳은 불라디보스토크에서 112키로점에 있다
여행을 다니면서 느끼지만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순국하신 선열들이 자랑스럽다
그래서 경건한 마음으로 명복을 빌며 짧은 시간이지만 국가관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찾아가기 => 진천IC를 나와서 초평면사무소로 나가는 516번 지방도 길목에 있는이정표를 따라가면
생가는 이정표에서 중부고속도로 방향으로 약 1키로 지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