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어극 40년 칭경기념비(高宗 御極 40年 稱慶紀念碑) 솔새김남식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 번지 교보빌딩 광화문사거리
사적 제171호 (1969년 7월 18일 지정)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 비각(碑閣)은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1902년 (광무 6년)에
세워졌으며 비문에는 고종이 제위에 오른 것과, 광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과
고종이 즉위 40년이 된 사실 등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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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는 고종(재위 1863년~1907년)이 즉위한 지 40년이 된 것과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입소한 것,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쓰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쓰여 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작은 규모의 비각에는 '기념비전'이라는 현판을 달아 격을 높였으며
비각은 2중의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서 있는 정자형 건물로, 20세기 초 전통적인 건축양식이 사라지기
직전에 세워진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남쪽으로 돌기둥 위에 '만세문'이라 새긴 무지개 모양의 문이 있다.
돌거북 위에 세워진 비석의 앞면에는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 망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송'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당시 황태자인 순종이 글씨를 썼다.
광복 후 1954년에 비각을 보수하면서, 일본인에게 팔렸던 돌로 된 만세문과 담을 찾아다가 일부를 복원하였고,
1979년에 전면적으로 다시 고쳐 옛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어느 일본인이 칭경기념비의 남쪽 돌문을 떼어가 자신의 집 대문으로 썼다는 것이다
기로소
임금이 직접 경로정신을 실천함으로써 노인을 존경하는 기풍을 조성하며 노인으로 하여금 여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한 제도로 ‘기로소(耆老所)’라는 명예기구가 조선시대에 있었다.
기로소는 조선시대에 연로한 문신(文臣)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되어
왕과 조정 원로의 친목, 연회 등을 주관하였는데 1394년부터 1909년까지 존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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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소의 유래는 1394년에 태조 이성계가 60세를 넘자 기사(耆社)라는 명예 관청을 설치하여
70세 내외의 정2품 이상의 관료를 선발하여 기사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임금 스스로도 이름을 올린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름을 올린 신하들에게 논밭과 노비, 고기 잡는 기구 등을 하사하고 매년 봄과 가을에 군신이 함께
어울려 연회를 베풀며 즐겼다고 하는데 오늘날 경로우대증 이라고고 할까? ㅋ. ㅋ. ㅋ.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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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00년에 기로소에 들어간 사람은 7백여명이라고 하니 환갑을 넘기 힘들었던 같다
기로소에 들어간 인물중 최고령자는 현종 때의 윤경(尹絅, 1567~1664)이라는 분으로 98세였고,
다음으로 숙종 때 97세의 이구원(李久源, 1579∼1675)과 96세의 민형남(閔馨男, 1564∼1659)
황희(黃喜, 1363~1452)도 90세까지 장수했고 그밖에도 맹사성(孟思誠, 1360∼1438),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
이정구(月沙 李廷龜, 1564~1635), 김육(金堉, 1580~1658),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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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역대 왕들이 장수하지 못해 기로소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숙종은 59세가 되던 해를 망육(望六:60세를 바라보는 나이)이라 앞당겨 기로소에 들어 갔고
영조는 51세를 '망육'이라고 하는 신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기로소를 들어 갔으며
그리고 고종도 영조와 같이 51세에 기로소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해가 되셨는지요? sols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