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의 주역 김자점(金自點, 1588년 ~ 16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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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정치가, 군인, 성리학자이며 인조의 서녀 효명옹주의 시조부로 왕실의 인척으로
인조 반정에 참여하였고 귀인 조씨의 인척이었으며 친청파 정치인이었다.
음서제로 관직에 올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으며 낙흥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인조 반정의 모의에 가담하였으며 1623년 3월 반정을 꾀해 군대를 모아 홍제원에서
이괄 등의 군사와 합류하였고 반정에 성공한 공로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별 승진하고
도원수가 되었으며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관에 녹훈되고 낙흥군(洛興君)에 봉해졌다.
이괄의 난 때에는 옥에 갇힌 기자헌 등 북인 인사 40명의 전격 처형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뒤 도원수로 병자호란 당시 대숙 미처로 파면되었다가 복직하여,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고 심기원 일파를 제거한 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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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점은 안동김씨로 할아버지는 강원도 관찰사였으며 그의 조상을 더욱 위로 올라가 보면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 시키자는 거사 계획을 세운
성삼문. 박팽년등을 배신하고 장인 정창손을 통해 거사를 누설해 사육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김질이 있었다.
즉 김자점은 김질의 5대 손으로 조상이 배신한 턱에 세조의 보살핌으로 그 가문이 인조왕조 까지
살아 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후 그의 집안과 인생은 박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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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점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비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작 과거를 거치지 않고 그의 할아버지 덕택에
음서(조상의 자제는 시험 없이 관직생활을 할 수 있는 제도)를 통하여 관직에 오른다.
청나라 북벌을 외치던 세력 등과 첨예한 갈등을 벌이며 권력싸움을 벌이던 그는 송시열, 송준길등
수많은 적들을 만들어내고 마침내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역시 북벌정책을 중심으로 한 왕이었기에
김자점은 이를 절대적으로 반대하다가 영의정에서 탄핵 파직 당하고 홍천으로 유배 당한다.
여기서 또 한번의 역적질을 생각해 낸 김자점은 유배지인 홍천에서 청나라 역관 심복 이형장에게
조선 북벌 계획을 청에 밀고하도록 하고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은 송시열을 청나라에 알리자 청나라는 대군을
조선 국경에 배치하고 효종에게 그 진위를 물었는데
당시 조정대신 이경석, 이시백, 원두표등이 외교에 앞장서며 청나라의 의심을 풀게 된다.
여튼 이일을 계기로 김자점은 다시 광양 땅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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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인 김자점
1651년 손부인 효명옹주의 저주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익(釴)이 수어청군사와 수원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 김집, 송시열, 송준길(宋浚吉) 등을 제거하고
숭선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가 고변되자 의금부로 압송된 뒤
아들 김식, 손자 김세룡 등과 함께 국문후 12월 17일 왕명으로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는데,
거열형이 아닌 사지를 토막내고 마지막에 목을 자르는 형벌을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만 63세로 김자점의 반역행위로 야기된 옥사를 역사는
김자점의 옥 [金自點-獄] 1651년(효종 2)이라 적고 있다.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인 김자점
손자 세룡도 처형되었고, 귀인 조씨는 사약을 받았으며 효명옹주는 섬으로 유배되었다.
연좌제에 의해 효명옹주의 남편인 김세룡 역시 처형당했고, 그의 모친과 처, 첩 등은 모두 노비로 끌려갔다.
경기도 이천군 백족산에 있던 그의 아버지 김옥함의 묘소와 선산 분묘도 모두 파헤쳐져서 부관참시되었다.
그후 김자점의 일가는 뿔뿔이 흩어졌는데, 이중 황해도에 정착한 일파의 후손 중 한명이 김구이다.
김자점의 10촌이자 백범 김구의 11대조로 사과(司果)를 지낸 김대충(金大忠)이 화를 피하여서
가족을 이끌고 경기도 개성으로 숨었다가 다시 황해남도 해주로 정착했다 하는데
희대의 김자점과 김구가 같은 핏줄이 있다는 것 자체도 놀랍지만 거의 남남에 불과 하니
의미 부여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듯 하다. 정리 sols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