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서/야담설화

비운의 임금 광해군

시인김남식 2015. 6. 30. 16:11

 광해군묘 가는길                                                                                           솔새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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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내리는 어느 날 광해군 묘를 가기 위해서 또 다시 길을 찾아 나섰다.

광해군묘 가는 길은 금곡역에서 30분마다 출발하는 봉인사행 마을버스를 타고 봉인사 종점까지 가서

봉인사 절도 구경하고 사릉 입구까지 걸어 나오면서 임해군묘, 성묘, 안빈묘, 사릉을 함께 관람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역사를 찾아가서  그 시절에 내가 그 사람의 주인공이 되어 보는 먼 길로 다리도 아프지만 천천히 길을 나섰다 .

소요시간 약 2시간, 봉인사까지 버스 25분 소요, 택시 금곡역에서 4,000원 정도

마을입구에는 송능리에 유래비가 있는데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김씨 의묘 성릉이 있어서 지명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성묘는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김씨 묘이고 안빈묘는 효종의 후궁 안빈 김씨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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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진하면 광해군묘로 가는 봉인사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평내 차량기지와 안빈묘입구이다


광해군묘 입구라는 이정표가 있는 영락교회 철대문 안으로 아스팔트 포장된 언덕 길을 20여분 힘들게 오르면 된다

 

영락교회 묘지를 지나서면 녹색철 담장안에 연산군묘가 있는데 찾아 오는 이도 없는 외진 깊은 산중에 있는지라 그런지

문지기 없는 철문을 열고 들어서 내리막 길을 천천히 내려가면 된다.

 

광해군은 당시 덕수궁 석어당에 유폐되여 있던 인목대비 앞에 끌려나와 무릎을 꿇고 삼베옷을 입은 채로

36가지의 죄목을 들으며 왕위를 박탈 당하는 수모식을 거행하고 

유배지인 강화로 향하게 되는데 수모를 당한 그때의 광해군에 심정은 어땠을까?

계모가(인목) 자기 보다 9살 아래이고 조카 인조가 20살 아래니까 참으로 자존심이 구겨지는 기막힐 일이다.

광해군 비운에 임금   정리솔새김남식

 

광해군은 인조(능양군) 의 배다른 백부가 되는 것으로 광해군은 공빈김씨의 아들이고

인조는 인빈김씨의 정원군의 아들이다

인조의 나이 28살에 광해군은 48살에 반정이 일어난 것으로

조카가 삼촌(백부)의 왕권을 조카가 창탈한 것으로써 단종 폐위한 세조때 와는 정반대의 사건이다.


선조- 공빈김씨 - 광해군(1575~1641)  -->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이고 정원군은 다섯째 아들이다  
         인빈김씨 - 정원군(1580~1619 -> 원종으로 추존推尊하여 김포에 릉 있슴)
                                                             능양군(1595~1649 인조)

                                                               능창군(1599~1615) - > 

                                                             (역모로 사사되었으나 兄인조가 君에서 大君으로 복권하여 능창대군)

 

선조도 서자 출신으로 정비에게서 일찍 왕자를 두지 못하고 후궁들로 부터 많은 왕자를 두었는데
공빈 김씨로 부터 첫 아들인 임해군과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연년생으로 얻었다.
당시 선조의 아들은 14명이나 되었지만 정비인 황후박씨는 줄 곳 병석에 누워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의주로 쫒겨가던 선조는 결국 나이 40세를 넘기자 별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장자인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명나라에 인준을 받지 못했지만 전시체제 모든 대신들은 광해군을 세자로 받들었다
당시 임해군은 성질이 포악하고 난폭하여 세자의 재질이 못 되었다.


도망친 선조보다 더 백성들의 신망을 받게 되자 전란 후 선조는 광해군을 견제하며 그를 미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란이 끝나고 1602년 인목황후가 계비가 되고 영창대군을 낳고

조정은 다시 당파의 여론속에 영창대군을 거론하지만 선조는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리고 죽는다
왕위 계승권이 인목대비에 넘어가자 그도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을 했는지

우여곡절 끝에 즉위하니 15대 광해군의 나이 34세이고 당시 영창대군은 8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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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임진왜란로 파탄에 이른 국가 재정을 회복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구제했고 전란중에는 의병을 모집하고 전과를 올리는 등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광해군은 임금에 오른 후 망해가는 명나라와 떠떠 오르는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펴고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거두는 등 참된 정치를 하려 했으나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1608년 명나라에서 조선에서 세자 책봉과정에 대한 진상조사단을 파견하자

광해군은 서둘러 대북파의 건의을 받아들여 형 임해군을 귀양 보낸후 사사 했으며

이후 1612년 소북파 100여명이 숙청당하는 대옥사가 발생하게 되는데
모진 고문속에서 사건은 겉잡을수 없이 확대되어 결국 역모사건으로 결론 나 1613년 계축옥사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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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대비의 부친인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전락시켜 강화에 안치 했다가
1614년 증살(장작불열기로 죽는것)로 죽게 했으며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그러나 신하의 주청대로 인목대비를 폐서인 하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은 것을 보면 이후 인조반정 성공후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그의 어머니 공빈김씨까지 폐비 시킨 인목대비 보다는 광해군은 아량이 넓었던 군주 같았다)


다시 1615년 능창군 추대 사건이 발생하자 역모로 몰려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사사하게 되는데
결국 폐륜 행위로 낙인되여 1623년 인조반정으로 좇겨나는 악운을 맞는다.
반정의 명분은 크게 두 가지.

하나는 동기를 살해하고 모후를 폐한 반인륜적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명에 대한 의리를 저 버리고 후금과 교분을 맺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대명 사대주의에 뿌리깊은 이들은 결국 둿날 청나라에게 굴복하여 무뤂을 끓고

남한산성에서 군신관계를 맺는 병자호란의 대치욕을 인조가 당하게 된다.)

  

조선사는 광해군을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정치 이론을 완전히 꽃피우지 못하고 자신의 왕의 재위기간 보다
유배 생할을 더 많이 하다가 죽은 가장 비극적인 임금으로써 임진왜란을 거울 삼아 나라를 부강케하고
왕권 강화책과 실리외교를 펼쳤으며 비록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등 일부 반대파 정적을 제거하기는 했으나
조선시대 성군이라 일컫는 태종이나 세조처럼 철저한 보복정치는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대북세력의 강력한 주장을 물리치고 강등 시키는데 머물렀으며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반대한 인물로 연산군은 철저한 폭군이고 패륜아 였다면 광해군은 일부 사대주의자와
정치적 이념을 달리한 현실적인 왕이였으며 중종은 반정으로 추대 받은 경우지만
인조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혁명을 이르켜 광해군을 폐위 시키고 자신이 왕으로 등극하는 하극상의 역모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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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한줌도 안되는 세력들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 것에는 여러가지 악운들이 찾아 왔었기 때문이었다.
이귀가 반군 조직을 위해서 이사람 저사람 포섭하는 사이

구체적으로 능양군의 역모사건을 여러번 주청했으나 그럴리 없다며

광해군은 부인했고 만약 철저히 조사하였다면 반정은 성공하지 못 했으나 神은 결국 인조를 도와 주었다.
광해군은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후원 뒷쪽의 궁성을 빠져 나가

의관 안국신이 마침 상중에 입고 있었던 상복과 입고 있었다고 하는데 ......


광해군이 폐위되자 인조 세력은 인목대비의 철저한 복수심에 의하여 광해군과 패비유씨 세자와 세자빈을

강화도에 위리안치 시겼으며,

당시 세자빈이 답답하여 바깥으로 빠져 나가려다가 잡히게 되는데
반정세력과 인목대비는 그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결을 지시한다.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은 1년 조금 지난후 1623년 아내 유씨도 홧병으로 사별하게 된다

홀로 남게 된 광해군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초연한 자세로 그저

모질게 기나긴 세월을 이어 가다가
1641년 귀향생할 18년 만에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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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부음을 듣고 제주 목사가 달려 가보니 계집종이 이미 싸늘하게 식은 광해군의 시신을 염을 하고 있었으며
그의 임종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으나 단지 자기가 죽으면 어렸을 때 헤어진 엄마

공빈김씨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한다.


공빈 김씨는 선조의 후궁으로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고 광해군이 아직 어렸을 때인 25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인조는 예조참의를 보내서 예를 표하고 그해 9월 그의 시신을 한양으로 운구해서 매장했고
그리고 생존에 있는 광해군의 딸에게 물질적인 특전을 베풀고 외손들이 묘를 돌보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인조가 광해군에게 표했던 마지막이자 최대의 호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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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스럼 인조 부자의 능과는 달리 광해군의 묘는 왕릉이기 보다는 너무 초라하여 참배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측은한 생각에 묘역을 좀 넓게 단장해서 품격을 갖추었으면 하지만

인조때 조성한 묘 그대로 남겨 두는것도 역사이기에 그리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는데

묘비 원석에는 6.25의 총탄이 여기까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단종 노산군은 복권 되었지만 악화 될대로 악화된 광해군의 이미지는 광기를 부리다 쫓겨난 연산군과

동급의 인물로 평가되어 조선왕조 내내 그를 복권 추증하는 움직임이 없었다고 한다.

광해군은 인조에게 쫓겨난뒤 그가 역사의 기록에 남은 몇 마디가 있다

"반정이 종묘 사직을 위한게 아니라 몇몇 인사들의 부귀 영화를 위한 것이라 했으며

반군의 주모자가 이이첨 일당이 아니냐고 물었다 한다.

그리고 한 마디가 더 있다면 그래도 조카에게 왕위를 넘겨 주어 참 다행이라 하였다고 한다"



광해군묘에서 걸어 내려와서 다시 봉인사 방향으로 한참을 더 걸어 올라가면 옛날집이 보이고
풍향조씨 시조묘로 들어 가는 이곳에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김씨 성묘가 있다.


조맹은 신라말 고려 초기의 인물로 고려 개국공신이자 풍양조씨의 시조이다.

성묘는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김씨 묘이고

안빈묘는 효종의 후궁 안빈이씨묘이다 (효종과 사이에서 숙녕옹주를 낳았으며 1693년 숙종 19년 72세로 사망하였다)

광해군은 자신이 죽으면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데

그래서인지 가까운 곳에 어머니의 묘가 있다. 

 

올라가는 길목 두 채의 낡은 집이 있는데

그중 한 채는 임해군의 후손집으로 이곳에서 공빈과 임해군의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후 산후병으로 죽은 어머니를 위해 신하들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를 공성왕후로 추존하여 왕릉형식의 묘를 조성하고 성릉이라 칭했으나 폐위된 후 그녀의 시호도 추탈 되었고

성릉도 성묘로 강등 되었으나 그 당시에 석물은 철거 하지 못 했다.

 

성묘에서 나와서 위로 5분 정도 더 올라가면 시냇가 농장 입구에 임해군묘소 이정표가 있다

임해군은 성질이 포악했다고 전하며 강화에 유배중 명나라 사신을 만나고 궁궐에서 곧 불러들일 것이니

보약이나 먹으라고 준약이 사약일 줄이야 피를 토하며 아우 광해군을 부르며 죽었다는 임해군은

수원 광교산에 묻혔다가 이곳으로 이장했다.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은지 2년만인 1577년에 산후병으로 죽었기에 어머니 얼굴도 모른체

인빈김씨(인조의 조모) 손에 자라서 어머니처럼 무척 따랐으며 인빈김씨도 광해군을 남달리 사랑 했다는데

조카 광해군과 손자 인조 사이에서 누구 편을 들었을까?

 

광해군묘를 돌아 나오며 역사의 뒤안길을 잠시 생각하며 그들은 정말 죽어서 한限을 풀고 꽃이 되었을까?

 

가양동 구암공원에서 매년 10월초에 열리는 '의성 허준축제' 동의보감 진서의(進書儀) 재현극에서

광해군이 입장하고 있다.

 

마을버스 종점에 있는 봉인사 절 

광해군,임해군 공빈김씨의 세곳의 참배를 마치고 돌아 나오며 역사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같이 흐르고 있기에

세월이 흐르면 후세 사가들에 의해서 광해군에게도 복권될 날이 있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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