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서/야담설화

화정의 정명공주

시인김남식 2015. 7. 8. 14:54

정명공주와 광해군 그리고 인조       정리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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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 6대를 함께 하며 83세까지 장수한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1685)

임진왜란 직후에 태어나 어머니와 서궁에서 죽은듯 유폐 생활을 하였지만

정명공주와 광해군은 28살 차이로 정치적으로 적은 아니었다

인조보다 8살 아래의 나이 어린 고모 정명공주

인조를 저주한 장본인으로 지목되어서 생사를 여러번 넘나 들었다 

... 1602년 당시 선조의 나이 51세,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의 나이 19살에

계비로 들어오니 광해군보다 인목대비가 9살 아래였

그리고 열달후 1603년 음력 5월 19일 행궁에서 정명공주가 태어나고

다시 3년후 1606년(선조 39)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이 태어났다.

영창대군묘는 일죽나들목 부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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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의 늦은 나이에 적장자를 얻은 선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빈 김씨 소생인 광해군에게는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선조가 자신을 내치고 언제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울지 알수 없는 일

당시 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은 왕위 계승권을 위협하는 위험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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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즉위한지 41년 되던 1608년 해 승하 했을때 영창대군은 3살로

임목대비와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 줄 수 밖에 없었다. .

(사실 선조가 재혼않고 10년 일찍 죽었다면 悲史는 없을 것이고

광해군은 34세의 나이에 제15대 왕으로 즉위하게 되는데

선조의 죽음에 김개시가 관여 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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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선조가 살아 있을 때와는 달리 영창대군을 외면하게 된다. 

그리고 1614년 2월 영창대군은 역모를 꾸몄다는 ‘7서 의옥’에 연루되어

외할아버지 김제남의 뒤를 이어 처형하게 된다.

인목대비 입장에서 광해군(1575~1641)은 철천지 원수였다.

두 사람은 한 궁궐 안에서 함께 지낼 수가 없었다.

1615년(광해군 7년) 4월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두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광해군은 1618년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격하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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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빠진 인목대비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은 딸 정명공주뿐 이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공주의 소식을 물어 오면 “이미 죽었다.” 라며 둘러댔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후 서인 세력을 등에 업은 인조는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신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이유로 반정을 일으키게 된다.

능양군 인조는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인 정원군의 장남이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에게 즉위 교서를 내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정당성을 부여하는데 아마 그간의 미움이 한목하지 않았을까 한다.

인조는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으므로

존호를 복원한 인목대비는 공주로 복권된 정명공주와 서궁 유폐 생활을 끝내고 창덕궁에 들어온다.

   .

*-- > 화정에서 정명공주역 배우 이연희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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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대비는 반정이 성공한 지 나흘만에  1623년 예조(禮曹)에서

정명공주의 부마 간택을 속히 시행하자는 건의를 올린다.

인목대비의 마음을 헤아린 인조가 이를 즉각 허락하면서 부마 간택이 급물살을 탄다.

정명공주의 나이가 21세, 부마의 나이는 적어도 20세 내외가 되어야 하는데

그 나이의 남자들은 대부분 혼인한 상태였다.

어쩔 도리 없이 정명공주의 부마 단자 접수 기간을 늦추고 나이도 낮출 수밖에 없었다.

정명공주보다 세살이나 아래인 중추부동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洪柱元, 1606∼1672)을 부마로 간택한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에게 정명공주의 결혼은 정권의 정당성을 뒷 받침하는 행사였다.

인조는 정명공주의 신혼집을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안동별궁(풍문여고자리)을 마련해 주고 궁궐을 출입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그리고 1632년(인조 10년) 인목대비는 49세의 나이로 인경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인목대비의 초상을 치르던 중 인경궁에서 백서삼폭(帛書三幅)이 발견 되는데

비단에는  "임금을 폐위하고 세우는 것과 같았다" 라는 심각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인목대비가 임해군의 양자가 된 경창군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물증이 되었고 
자신을 저주해서 죽이려던 음모였다는 추론이 가능했기에 
명백한 역모가 되었다. 
서궁에 유폐되었을 때 쓴 것이라 해명을 했지만
의심을 완전히 걷어 내지는 못하고

결국 인목대비의 궁녀와 상궁들이 주모자로 희생되어서 참혹한 죽음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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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후 인조가 여러 차례 원인 모를 병을 앓게되자 몸이 아플 때마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데도 자신을 저주한다 생각하며  정명공주를 의심하고 핍박 하던중 

1639년(인조 17) 원인을 알 수 없는 아주 큰 병에 걸리게 된다.

인조는 정명공주를 의심하고 홍주원에게 시집 갈 때 따라갔던 궁녀들과 

수많은 혐의자들이 체포되어서 인목대비 사후 7년만에 큰 위기가 찾아 왔다

하지만 지천최명길을 비롯한 대신들은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것 처럼

적극적으로 대응하는데 이는 반정공신에게 정명공주는 반정의 명분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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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단 저주 의혹은 수면 밑으로 가라 앉았지만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과 같은 그후 10년간의 악몽은 인조가 죽고 나서야 끝이 나게 된다.

인조가 죽은뒤 정명공주는 36년을 더 살아서 천수를 누리며

83세에 세상을 마치고 죽은 뒤 홍주원의 무덤에 합장 되었다.

묘는 의정부시 부근에 있다 

 

현종과 숙종은 정명공주에게 빚을 진 적이 없지만 집안 어른으로써 최고의 예우를 받았으며

지난 47년의 고난을 보상 받기라도 하듯 인조 사후에 36년간은 순탄한 나날로 이어졌다. .

정명공주와 광해군은 정치적인 입장 차이 때문에 서먹한 사이였고

귀가 얇은 인조는 의심증 때문에 정명공주를 죽음의 고통까지 여러번 몰고 갔었다.

인목대비와 정명공주에게 빚을 가장 많이 진 인조는 17년이나 정명공주를 무고 혐의로 괴롭혔다

일관성 없는 두 남자로 말미암아 정명공주는 내내 속을 감추며 살 수 밖에 없었던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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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화정이다.

출궁위기와 공주마저 빼앗길 것에 염려하며 노심초사하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
정명공주가 썼다고 하는 
화정(華政)에서 화(華)는 꽃 혹은 빛을 의미하고 정(政)은 다스림을 의미한다.

따라서 화정은 ‘화려한 정치’ 혹은 ‘빛나는 다스림’ 으로 해석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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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건대 너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었을 때 마치 부모의 이름을 들었을 때처럼

귀로만 듣고 입으로는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입에 올리고

정치와 법령을 망령되이 시비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내 자손들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경박하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말이 들리지 않기를 정말 바란다."

정명공주의 이런 당부가 있어서 그랬는지 후손들은 최고 명문가의 명성을 이어 갔다.

사도세자의 혜경궁홍씨가 그의  6대손 그외 홍봉한, 홍인한, 홍국영 등이 후손이다,

정리 .sols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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