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가요칼럼

황성옛터 이애리수

시인김남식 2011. 5. 24. 13:28

황성옛터 이응호(王平李應浩 1908 ~ 1940년)             솔새김남식


황성옛터는 1928년 일제 강점기 때 발표된 대중가요로서

작사는 왕평 이응호가 했고 작곡은 전수린 노래는 이애리수가 불렀다

1927년 어느날 개성에서 극단 일원으로 공연 하던 중 연일 쏟아지는 장마속에서 문득

허물어진 옛 궁터인 개성 만월대를 생각하며 지었다고 한다.


왕평 이응호는 경북 영천출생으로 일제 강점기때 연극, 영화 배우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예술인으로서

이호, 편월의 예명을 함께 쓰며 배우뿐만 아니라 극작가와 대중가요 작사가로 활동하였다 


당시 전수린이 바이올린 곡조를 오선지에 옮기며 작곡을 하고 단성사에서 이애리수가 불러 무대에 올려지게 된다.

슬프다 못해 절망적인 아픔으로 엄습해 오는 이 애리수의 애잔한 노래에 관객들은 망국의 슬픔에 함께

눈물을 흘리며 통탄한 마음을 달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왕평과 전수린은 日警에 불려 다니면서 모진 고초를 당하고 금지곡이 되어 버렸지만

노래는 점점민족가요로서 사랑을 받았다 .

특히 황성옛터는 당시 일본에서 발매된 최초의 가요 레코드였다고 한다


경북 영천시 금호강변에 있는 조양공원에 황성옛터 노래비가 1989년에 세워졌으며 1996년 부터

그를 추모하기 위해 영천시에서  ‘왕평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또한 영천시는 탄생 100주기인 2008년 부터 그의 출생지 영천시 교촌동에 일원을 '왕평길'로 명명하였다.


왕평은 영천시 성내동에서 태어나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수정사 주지를 맡았던 아버지를 따라 

마을 민가에서 거주하며 9살때 영천보통학교에 입학 그후 서울 배재중학교를 졸업하고

조선 배우학교에 다닌 것으로 추측이 된다


왕평은 이후에도 민족성 강한 노랫말을 담은 대한팔경, 조선행진곡 같은 노랫말을 만들었으나 금지곡이 되었다

대한팔경(朝鮮八景)은 1936년 황금심이 불렀다.


한편 왕평은 1940년 평북 강계에서 연극을 공연하던 중 무대에서 쓰러져 33살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던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송강리 수정사 부근 山기슭에 묻히게 된다



청송읍에서 북쪽으로 12키로 지점 수정사 입구 송강리 31번 국도변 목계솔밭공원에 왕평의 황성옛터 노래비가 있


가을이 깊어갈즈음 어느날 왕평이응호의 안식처(墓)를 한번 찾아가 보자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청송군에서 그의 묘 주변을 정리하고 황성옛터 시비와 묘지석 그리고 

황성옛터길 둘래길을 조성하였다



수정사 입구에는 그를 기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옛 길을 따라서 50여미터 계곡쪽으로 내려가면 입구에 안내 이정표가 있다


이어서 계곡인데 건기에는 물이 없는 듯 바닥은 말라 있었으며 계곡길을 건너 오르막 산 길 100여 미터

올라 가면 그곳에 있다  


床石이 있는 초라한 작은 墓가 왕평 묘이고 옆에 있는 좀 커다란 묘는 그의 先代 祖父 인 듯 하였다   


묘지의 위치가 구중궁궐같은 깊은 산속이라 나그네의 발길이 도저히 그냥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준비한 祭酒는 없기에 음료수로 대신하였다


가을이 깊어지는 때가 되면 더욱 애수같이 들려오는 황성옛터 노래와 사연이 가슴을 적시고 있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에서 내노라하는 대형 가수들이 모두 다시 불렀다 


그옛날 그시절 사람들은 하루의 피곤함을 뒤로한 채 소주 한 잔 걸치면 자연스럽게 불렀던 노래이다


한양에서 먼 길을 내려 왔으니 잠시 수정사에 들려본다 



고려때 나옹대사가 창건했다는 수정사는 작고 아담한 천년고찰로서 계곡의 물이 수정처럼 맑다하여

수정사라 했다는데 지금은 계곡에 물이 말라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정말 조용한 사찰이었다 욍평의 부친은 지금 아니 계시겠지요

 


황성옛터 작사왕평 작곡전수린 노래이에리수

1.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페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 외로운 저나그네 홀로 잠못이루어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2.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


                                                                                                      -- >동영상

찾아 주시고 읽어 주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kns~^@^^~~



이애리수 (1910~ 2009년)


신파극의 여주인공의 삶을 살았던 황성옛터의 이애리수 본명이 이음전(李音全)

이애리수는 1910년 개성 출신으로 아홉살의 어린 나이에 희극배우였던 외삼촌을 따라

극단에 들어가 1920년대 말부터 무대에 올라 배우가 되었고

연극 막간에 노래를 하는 막간 가수로 활동 하던중

1932년에 ‘황성옛터’를 발표하여 인기의 절정을 달릴 무렵

연희전문 학생이던 부잣집 아들 배동필과 사랑에 빠젔지만 

남자 집안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서 자살 기도 끝에 두사람은 결혼을 인정받고

연예계서 자취를 감춘 채 평범한 주부로 평생을 살았다


이후 그녀의 생활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다가 2008년 일산의 한 요양원에서

요양중인 것이 밝혀지게 되는데 ...........

그러나 그녀는 그 이듬해 99세에 작고하여 지금은 용인카톨릭공원묘지에 안식처를 마련해 있다.

당시 일제시대의 여성 연예인들 처지는 신파의 여주인공 같은 스토리를 적지 않게 만들어냈다
이애리수는 목숨을 내건 처절한 선택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사랑을 얻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해피엔딩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실 끝내 비극으로 끝나버린 바로 윤심덕의 스토리가 당시에는 눈물겹기도 했다. kns 



solsae kns


'칼럼 > 가요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루어질 수없는 사랑 양희은  (0) 2011.07.05
안개낀 고속도로 강정화  (0) 2011.06.29
정인 이안  (0) 2011.05.14
벙어리 바이올린 - 페이지 (Page)   (0) 2011.03.22
김추자 님은 먼 곳에   (0) 2010.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