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鄭芝溶 (1902 ~ 1950년 ) 솔새김남식
충북 옥천 출신으로 본관은 연일(延日)
아명은 지용(池龍)이고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아호(雅號)나 필명은 없다
고향에서 초등 과정을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
일본 경도(京都) 도지사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
귀국 후 곧바로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8·15광복과 함께
이화여자대학교 문학부 교수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슨 까닭인지 확인된바 없으나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은평면 녹번리 초당에서 은거 하다가 6·25 때 납북된 뒤 행적이 묘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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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 평양에서 발간된 통일신보 (1993.4.24., 5.1., 5.7.) 에서 가족과 지인들
증언을 인용하면 1950년 9월경 경기도 동두천 부근에서 폭격에 의해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보도 하기도 하였다.
행적에 대한 갖가지 추측과 오해로 유작들이 논의 조차 금기 되었다가
1988년도 월북 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로 문학사적 논의가 가능하게 되었다.
정지용의 시단 활동은 김영랑(金永郞)과 박용철(朴龍喆)을 만나
시문학 동인에 참여 계기로 본격화된다
국민들에게 널리 애송되는 향수는 언제나 마음의 고향으로 되돌아 감을 느끼게 해준다.
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 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湖水(호수) 정지용
얼골 하나 야 손바닥 둘 로 폭 가리지 만,
보고 싶은 마음 湖水(호수) 만 하니 눈 감을 밖에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진히지 않고 머언 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한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충북 옥천읍내 있는 정지용 문학관
찾아가기 => 옥천IC를 나오면 바로 옥천읍내 정지용문학관 이정표가 있다
정지용시인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서
전향 강연에 종사했으며 1950년 6·25전쟁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설이 있으나 .....
6.25이후 월북 했다가 1953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인은 아직도 불분명하다
정지용은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통해 대상을 선명히 묘사하여 한국 현대시의 신경지를 개척한 시인
한의사인 아버지 태국(泰國)과 어머니 정미하(鄭美河)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했으며,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문하여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박종화·홍사용·정백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友會) 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이일·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1923년 4월 도쿄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 〈학조 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시조시인 이병기등과 사귀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으며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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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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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앞이라고 가게 이름도 '향수상회' 이고, 이 길로 쭈욱 10여분 걸어 올라가면 '육영수여사' 생가이다
봄이 무르익던 어느날
옥천 장계유원지에 있는 정지용시비
정지용의 녹번동초당 그후 이야기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생전 마지막까지 살았던 집터에 표지판을 2016년 4월26일 은평구에서 설치했다.
은평구가 국립한국문학관 유치 과정에서 정지용 시인이 지난 1950년 납북되기 전까지
녹번동 126-10번지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은평구 관계자는 "해방 이후 납북 전까지 정 시인은 녹번동 초당(草堂)에서 "곡마단" "사사조오수(四四調五首)" "녹번리" 등을
집필하고 문학독문, 산문을 발간했다"며 "창작량만을 본다면 전성기와 비교할 수 없지만
시 외의 산문영역에서 시 세계와 삶의 태도를 아우르는 작품활동을 전개해 나갔다"고 설명했다.
정지용 시인이 1950년 납북되기 전까지 녹번동에 머물렀다는 곳의 위치는 불광역 옛보건원 교차로 부근에 있는
양광교회 뒤에 있으며 좁은 골목안 다세대주택으로 정지용초당터라고 집벽에 표지판을 설치했다.
은평구는 녹번동 산골고개에 정지용 초당을 거주 당시와 동일한 6칸 초가형태로 조성해 향후 건립될
정지용 기념관과 함께 지역 랜드마크로 활용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