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 1908년 ~ 1967년)
시인이자 교육자 호는 청마(靑馬)이며, 본관은 진주(晋州)
외가인 경상남도 거제에서 출생했고, 초등학교 입학전 경상남도 통영 본가에서 성장했다
1953년부터 줄곧 교직으로 일관하여 안의중학교(安義中學校) 교장을 시작으로
경주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를 거쳐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교통사고로 작고했다..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을 발표하면서 등단했으며 1939년 첫 번째 시집 청마시초 발표
시집으로는 ≪울릉도≫·≪청령일기 蜻蛉日記≫·≪청마시집≫·≪제9시집≫·≪유치환선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미루나무와 남풍≫·≪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등
1947 제1회 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1957 한국시인협회 초대회장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와 청마의 사랑이 세간에 더 유명하다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살아가던 이영도와 통영 여중에서 같이 근무 할 때
인연이 되었지만 애초부터 이루어 질 수 없는 숙명적인 그들의 푸라토닉한 사랑은
시와 글속에서 20여년을 지속하다가 청마가 교통 사고로 죽음으로서 그 막을 내리게 된다.
통영우체국 앞길은 청마거리로 명했다.
행복(幸福)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파도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
.
사진설명 / 행복의 詩무대인 통영 중앙우체국앞 길 우체통옆에 '행복' 시비가 보인다
목욕탕건물이 청마부인이 운영하던 유치원자리 금강제화 맞은편이 정운의 집이였다 한다
'나는에메랄드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우체국 창문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가
아니고 정운의 집을 바라보며 청마는 편지를 썻을 것이다.
요즈음 친일행적의 논란에서 청마가 면죄부를 받자 중앙우체국을 청마우체국으로
개명하려했으나 반대에 부딯첬다
.
통영에 있는 청마 문학관
거제시 둔덕면에 있는 청마생가
유치환 시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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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귀의 노래
내 오늘 병든 즘생처럼
치운 십이월의 벌판으로 호올로 나온 뜻은
스스로 비노(悲怒)하야 갈 곳 없고
나의 심사를 뉘게도 말하지 않으려 함이로다
삭풍에 늠렬(凜烈)한 하늘 아래
가마귀떼 날러 앉은 벌은 내버린 나누어
대지는 얼고
초목은 죽고
온 것은 한번 가고 다시 돌아올 법도 않도다
그들은 모다 뚜쟁이처럼 진실을 사랑하지 않고
내 또한 그 거리에서 살어
오욕(汚辱)을 팔어 인색(吝嗇)의 돈을 버리려 하거늘
아아 내 어디메 이 비루한 인생을 육시(戮屍)하료
증오하야 해도 나오지 않고
날새마자 질타하듯 치웁고 흐리건만
그 거리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노니
나는 모자를 눌러쓰고 가마귀 모양
이대로 황망한 벌 끝에 남루히 얼어붙으려 하노라
고목
내 고궁(古宮) 뒤에 가서 보니
뉘 알려지도 않은 높다란 고목 있어
적막히 진일(盡日)을 바람에 불리우고 있었도다
그는 소경인 양 싹도 틀려지 않고
겨우살이 말라 얽힌 앙상한 가지는
갈리바의 머리깔처럼 오작(烏鵲)이 범하는대로
오오랜 고독에 무쇠같이 녹쓸어
종시 돌아옴이 없는 저 머나먼 자를 향하여
소소(嘯嘯)히 탄식하듯 바람에 울고 있었도다
광야에 와서
흥안령(興安嶺) 가까운 북변(北邊)의
이 광막(曠漠)한 벌판 끝에 와서
죽어도 뉘우치지 않으려는 마음 위에
오늘은 이레째 암수(暗愁)의 비 내리고
내 망나니의 본받아
화툿장을 뒤치고
담배를 눌러 꺼도
마음은 속으로 끝없이 울리노니
아아 이는 다시 나를 과실(過失)함이러뇨
이미 온갖 것을 저버리고
사람도 나도 접어 주지 않으려는 이 자학(自虐)의 길에
내 열 번 패망(敗亡)의 인생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회오(悔悟)의 앓음을 어디메 호읍(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탈주(脫走)할 사념(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정거장(停車場)도 이백 리(二百里)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鐵壁) 같은 절망(絶望)의 광야(曠野)!
귀고
검정 사포를 쓰고 똑딱선을 내리면
우리 고향의 선창가는 길보다도 사람이 많았소
양지 바른 뒷산 푸른 송백을 끼고
남쪽으로 트인 하늘은 깃발처럼 다정하고
낯설은 신작로 옆대기를 들어가니
내가 트던 돌다리와 집들이
소리높이 창가하고 돌아가던
저녁놀이 사라진 채 남아 있고
그 길을 찾아가면
우리 집은 유약국
행이불신하시는 아버지께선 어느덧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고
헌 책력처럼 애정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나는 끼고 온 신간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그리우면
뉘 오는 이 없는 곬에는
하늘이 항시 호수처럼 푸르러
적은 새 가지 옮으는 곁에
송화가루 지고
외떨기 찔레
바위돌 하나
기나긴 하로해 직하기 제우노니
참으로 마음속 호올로 숨겼기에 즐거워
고은 송화가루 송화가루
손에만 묻다
그리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건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깃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꽃
가을이 접어드니 어디선지
아이들은 꽃씨를 받아와 모우기를 하였다
봉숭아 금전화 맨드라미 나팔꽃
밤에 복습도 다 마치고
제각기 잠잘 채비를 하고 자리에 들어가서도
또 꽃씨를 두고 이야기-
우리 집에도 꽃 심을 마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어느덧 밤도 깊어
엄마가 이불을 고쳐 덮어 줄 때에는
이 가난한 어린 꽃들은 제각기
고운 꽃밭을 안고 곤히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너에게
물같이 푸른 조석(朝夕)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을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바람에게
바람아 나는 알겠다.
네 말을 나는 알겠다.
한사코 풀잎을 흔들고
또 나의 얼굴을 스쳐가
하늘 끝에 우는
네 말을 나는 알겠다.
눈 감고 이렇게 등성이에 누우면
나의 영혼의 깊은 데까지 닿는 너.
이 호호(浩浩)한 천지를 배경하고
나의 모나리자!
어디에 어찌 안아볼 길 없는 너.
바람아 나는 알겠다.
한오리 풀잎나마 부여잡고 흐느끼는
네 말을 나는 정녕 알겠다.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회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별
어느 날 거리엘 나갔다 비를 만나 지나치던 한 처마 아래 들어섰으려니
내 곁에도 역시 나와 한 가지로 멀구러미 하늘을 쳐다보고 비를 긋고 섰는
사나이가 있어,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문득 그 별이 생각났다.
밤마다 뜨락에 내려 우러러 보노라면 만천의 별들 가운데서도 가장 나의
별 가차이 나도 모를, 항상 그늘 많은 별 하나-.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심연에 나누어져 말없이 서로 바라보고 지낼 수 밖에
없는
먼 먼 그 별, 그리고 나의 별!
산처럼
오직 한 장 사모의 푸르름만을 우러러
눈은 보지도 않노라
귀는 듣지도 않노라
저 먼 땅끝 닥아 솟은 산,
너메 산, 또 그너머
가장 아슬히 지켜 선 산 하나--
아아 그는 나의 영원한 사모에의 자세
무수히 침부하는 인간의 애환의 능선 넘어
마지막 간구의 그 목마른 발돋움으로
계절도 이미 絶한 苛熱에 항시 섰으매
이 아침날에도
그 아린 孤高를 호궤받듯
정결히도 백설 신령스리 외로 입혀 있고
내 또한 한 밤을
전전(轉輾)없이 안식함을 얻었음은
그 매운 외롬 그같이 설은 축복 입더메서랴
아아 너는 나의 영원--
짐짓 소망없는 저자에
더불어 내 차라리 어리숙게 살되
오직 너에게의 이 푸르름만을 우럴어
귀는 듣지 않노라
눈은 보지 않노라
세월
끝내 올 리 없는 올 이를 기다려
여기 외따로이 열려 있는 하늘이 있어
하냥 외로운 세월이기에
나무그늘 아롱대는 뜨락에
내려앉는 참새 조찰히 그림자 빛나고
자고 일고
이렇게 아쉬이 삶을 이어감은
목숨의 보람 여기 있지 아니함이거니
먼 산에 雨氣 짙은 양이면
자욱 기어드는 안개 되창을 넘어
나의 글줄 행결 고독에 근심 배이고
끝내 올 리 없는 올 이를 기다려
외따로이 열고 사는 세월이 있어
시인에게
영원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그것은 정수리 위에 도사려
내가 목숨을 목숨함에는
솔개에게 모자보다 무연(無緣)한 것.
이 날 짐짓
나를 붙들어 놓지 않는 것은
살아 있으므로 살아야 되는 무가내한 설정에
비바람에 보듬긴 나무.
햇빛에 잎새같은 열망.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그 짧은 인생의 사무치는 뜨거움에
차라리 나는 가두 경세가(經世家).
마침내 부유의 목숨대로
보라빛 한 모금 다비되어
영원의 희멀건 상판을 기어 사라질 날이
얼마나 시원한 소진이랴.
그러기에 시인이여
오늘 아픈 인생과는 아예 무관한 너는
예술과 더불어 곰곰히 영원하라.
입추
이제 가을은 머언 콩밭짬에 오다
콩밭 너머 하늘이 한걸음 물러 푸르르고
푸른 콩잎에 어쩌지 못할 노오란 바람이 일다
쨍이 한 마리 바람에 흘러흘러 지붕 너머로 가고
땅에 그림자 모두 다소곤히 근심에 어리이다
밤이면 슬기론 제비의 하마 치울 꿈자리 내 맘에 스미고
내 마음 이미 모든 것을 잃을 예비 되었노니
가을은 이제 머언 콩밭짬에 오다
춘신(春信)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 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향수
나는 영락한 고독의 가마귀
창랑히 설한의 거리를 가도
심사는 머언 고향의
푸른 하늘 새빨간 동백에 지치었어라
고향 사람들 나의 꿈을 비웃고
내 그를 증오하여 폐리같이 버리었나니
어찌 내 마음 독사 같지 못하여
그 불신한 미소와 인사를 꽃같이 그리는고
오오 나의 고향은 머언 남쪽 바닷가
반짝이는 물결 아득히 수평에 조을고
창파에 씻긴 조약돌 같은 색시의 마음은
갈매기 울음에 수심져 있나니
희망은 떨어진 포켓트로 흘러가고
내 흑노같이 병들어
이향의 치운 가로수 밑에 죽지 않으려나니
오오 저녁 산새처럼 찾아갈 고향길은 어디메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