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서/야담설화

단종과 정순왕후

시인김남식 2018. 5. 3. 12:10

500년의 이별 단종과 정순왕후 솔새김남식

 

2018년 12월1일 (음력 10월 24일)은 단종이 사사된지 꼭 563년이 되는 날이다
조선왕릉 중에서 부부가 멀리 떨어저 있는 릉은 영월에 장릉과 남양주에 있는 정순왕후의 사릉이다 
두 릉과의 거리는 약 200 여키로 500 浬이다
옛날 같으면 며칠 몇날을 가야하는 아주 아득히 멀고도먼 거리에 각각 자리를 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의 제물로 인해서 이별아닌 이별로 죽어서도 500년 이상을 떨어져 지내오고 있다
단종은 귀양지에서 죽임을 당하고 정순왕후는 死後에 갈 곳이 없자

시누이 경애공주의 媤家 해주정씨 가족묘 선산에 묻힌 게 남양주에 있는 지금의 사릉이다 


그들은 죽은지 250년이 지난 영조때 비로소 시호가 복권 되었으며 

그 당시 합장 했어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 하였다
그리고 또 250년이 지난 2010년 초 겨울쯤

사릉을 다시 천묘하자는 이야기가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역사 학자와 문화재청 자치단체가 서로 이견이 많아서

아직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史家들은 지금의 그것도 歷史니까 그대로 陵을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둬야 한다며 반대하고
문화재청은 세계문화로 등재 되었으니까 절차와 예산 때문에서 망서리고

남양주는 지역 유물이 다른 곳으로 옮기면 여러가지로 불리 하니까 반대를 하고 
사실 영월은 사릉을 지아바 夫가 있는 장릉으로 옮겨와야 具色이 맞는다고 하는데

결국 단종부부 이들에게는 야속하게 허송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것이다.  

 

 

당시 세조는 참으로 영악했던 모양이다.
어찌 천혜의 유배지를 찾을 수 있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청령포는 동·북·서쪽이 깊은 강물로 막혀 있고 남쪽은 천길 절벽이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구의봉이 요새처럼 버티고 있고 
숲이 울창하여 사람들이 접근하기 조차

어려운 마치 창살없는 감옥과 같은 곳이다. 
단종을 유배 시키고도 안심이 안 되어 유배생활 겨우 서너달 만에 서인으로 신분을

강등시켜 死士했으며 세조는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단종의 시신을 청령포 강물에 버리고
누구든지 시신을 거두는 자는 3족을 멸할 것이라 엄명하였다.
 
지금으로 부터 560여년 전, 1457년 10월 24일(음력)
영월 땅에는 빨리도 겨울이 찾아 왔다. 
겨울 찬바람 씽씽 불던 날 조선의 제6대 왕 단종(端宗)은 17세 어린 나이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피 눈물나는 시 한수 이른바 단종의 어시 자규시(子規詩)를 남겼다.

.

< 血淚春谷落花紅 > <피눈물 흘러서 봄꽃은 붉다>

 


一自寃禽出帝宮   弧身隻影碧山中  假面夜夜眼無假
窮恨年年恨不窮   聲斷哮岑殘月白  血流春谷洛花紅 
天聾尙未聞哀訴   何奈愁人耳獨聽    -端宗 子規詩-

.
원통한 새가 되어 제궁을 나오니 외로운 그림자 산중에 홀로 섰네
밤마다 잠들려 해도 잠 못 이루어 어느 때 되어야 이 한  다 할꼬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피눈물 흘러서 봄꽃은 붉다
하늘도 저 애끊는 소리 듣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시름에 찬 내 귀에는 잘도 들리는고 .... 

 

 

kbs원주방송국 다큐조선왕조 "500년의 이별"

 

kbs 원주방속국에서 다큐로 48분 分量으로 제작한

조선왕조 '500년의 이별" 을 2012년 12월 7일 방송하였다

그 내용은 단종이 영월까지 가게 된 동기와 정업원에서 정순왕후의 생활 그리고

이제는 遷墓해야 하지 않겠는가에 대하여 관련된 각계 사람들에 의견을 방송하였다  

그리고 마무리 시간에 '단종애사' 를 성우가 낭송하였다
그간 수많은 사람들로 부터 단종에 대한 詩가 여러편 있었지만

방송국에서 우연찮게도 kns가 쓴 詩가 방송에 적합하다 하여 채택이 되었다

 

단종애사(哀史)   김남식

 

두고 온 임 그리워서

청령포 관음송에 걸터앉아

눈을 감아 보니

흐르는 눈물은 주체 할 수 없어

망향탑에 돌 하나를 얹는다

 

영도교 난간에서

임을 두고 천리 먼 길 

떠나 올 때

무거운 발 걸음

멀어지는 한양 길을

돌아 보고 또 돌아 보고

 

엔젠가는 돌아 갈 줄

알았는데

다시 꼭 만날 줄 알았는데

잠깐의 이별이

오백년의 한이 될 줄을  

어디에다 목 놓을까  

 

사릉에 두견은 슬피 우는데

장릉에 홀로 누워서 내 무엇하리오

견우와 직녀도

일 년에 한 번은 만나는데

우리가 만날 날은 그 언제련가 

.

 

조선왕조 518년 27명의 임금 중에서 참배 관광객이 제일 많은 왕은 단연 단종이다

역사 드라마에서 제일 많이 나온 왕도 단종이고

지역사회 경제 발전에 가장 도움을 주는 왕도 단연 단종이다

여기서 단종이 자기 屍身을 잘 거둬준 영월에 대한 보답이 아닌가 생각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단종 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忠臣도 무려 268명이나 된다

 

1521년 (중종 16) 6월 4일 82세의 일기(日記)로 한(恨) 많은 생(生)을 마친 정순왕후를

역사(歷史)는 그를 한(恨)이 맺힌 한(恨) 많은 여인(女人)이라고 전하는데 

여산송씨(礪山宋氏)의 가슴속에 숨겨 흐르는 아픈 사연(事緣)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마는

정순왕후가 돌아가시기 전 지었다는 애절한 시(詩) 한 수가 누군가 의해서 전해지고 있다

 

나는 우는 듯 웃으며 죽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당신이 계신 그 곳으로 갈 일밖에 없내요.

깊고 어두운 숲을 지나고

안개 자욱한 강을 건너는 머나먼 길 이라지만

흔연한 마음에 한달음에 라도 달려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다만 심사에 깃 드는 걱정은 헤여진지 꼬박 에순다섯 해

이제는 여든 두 살의 백발 노인이 되어버린 나를 

행여 당신이 알아보지 못할까 하는 것 뿐입니다"

 

사릉을 영월로 遷墓해야 할 이유  solsae kns

 

이제는 많은 세월이 지났으니 역사로만 고집할 게 아니다
역사도 사람이 만들고 있는 것

하여서 역사를 만든 사람들도 이제는 이해를 할 것이다,
그들이 죽은지 250년이 지난 영조때 복권이 되었으니 다른 왕조들은 그들에 한을 풀어주지 못 하였다
점점 희미해지는 역사관으로 인해 언젠가는 사람들에게 잊혀질 그들의 한을 

이제라도 풀어 줄 사람은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한다

지금하지 않으면 아마 영영하지 못 할 수도 있다

단종은 왕위를 뺏았기고 머나먼 이곳까지 쫓겨온 것도 서러울진데  죽어서까지

생이별로 부부가 함께 못하는 그 한을 누가 알아 주고 풀어 주겠는가  
또한 그들이 살아 온 한많은 세월 특히 정순왕후가 살아온 삶은 비참했다고 전해 지는데
역사의 추리로 보아서는 합방도 하지 않은 것으로 사료가 된다
그동안 500년 이상을 떨어져 있었으면 됐지 않은가  
이제는 천궁을 하여 함께 해 주는게 사람이 사는 세상의 도리리고 역사가 하는 일이다

국가문화재구역에 있어야 할 사릉이 지금은 해주정씨 가족묘에 묻힌 게 아니던가 
사릉은 위치는 관광자원으로는 빈약할 뿐더라 

영월 장릉에 터는 너무 넓어서 당종이 혼자 있기에는 너무 쓸쓸하다
일부 문화재가 도시 계획으로 옮겨 가듯이

비대해진 도시 팽창으로 부득히 천장을 해야 한다면 그때는 이미 저승에서의 

그들 부부의 사랑도 차가워지지 않았을까 염려되기에 늦기전에 영월로 옮겨야 한다 

 

 

영영이별 영이별 영도교 정순왕후 유적지

 

세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 당하고 정순왕후는 평민으로 궁궐에서

쫏겨나는 신세가 된다

이후 숭인동에 있는 동망산 기슭에 머물게 되는데 

어느날 단종이 영월로 유배 되어 간다는 비보를 듣고 단숨에 달려간다

유배 행렬이 영도교에서 잠시 멈춰서게 되자  "마마.상감마마!" 라고 외첬지만

구경나온 사람들 때문에 전혀 들리지가 않았다.
눈물로 잠시 재회를 하자 마자 또 다시 눈물로 이별을 고하는 정순왕후는 점점 멀어져 가는 

서방님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영영이별 영이별 그날의 이야기를 픽션으로 그려보자  solsae kns

 

 

지금으로 부터 560 여년전 1456년 5월 단종을 영월로 유배 보낸다는 소식이 어느날 들려 왔다.
귀양을 떠나는 서방님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정순왕후 송씨는 버선발로 뛰며 또 뛰며

숨이 턱까지 차 올랐지만 뛰는 발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두번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단종의 유배 행렬이 창덕궁을 떠나 흥인문을 지나서 청계천 영도교 다리 위에서 잠시 지체하고 있었다.
이 다리는 광진나루와 송파나루를 건너 한양으로 입성하는 길목으로

백성들 통행이 많았기 때문에 유배 행렬을 호송하는 금군(禁軍)들이 일반 백성들에 접근을 막기 위해서

잠시 통행을 차단하고 있었다.


단종 행렬이 그 다리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버선발로 정순왕후 송씨가 막 도착을 하였다.
호송을 받으며 다리를 건너는 오매불망(寤寐不忘) 그리던 지아비 단종을 발견한 송씨
"전하! 전하! .................전하!!"
그러나 급히 달려 오느라 숨이 멎을 것만 같던 송씨의 목소리가 구경나온 사람들 때문에 전혀 들리지가 않았다.
일반 백성들 사이에 묻혀 있는 그녀를 단종이 쉽게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얼굴 위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혼자서 가슴을 치며 애타게 통곡 하는데 그녀의 눈물 속으로

세상 사람들에 대한 원한 맺힌 서운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당시는 누구하나 그녀의 눈물울 보듬어 주는 이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한편 옥좌에 매여서 앉아 있는 단종
언제 한양에 돌아와서 부인을 만나게 될지 기약 조차 할 수 없는 몸이기에 단종의 가슴도 역시 아팠다,
흥인문 밖에 거처를 마련 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려 본다.
그 순간 구경나온 사람들 틈 사이로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는 분명 사랑하는 부인 송씨였다.

"중전! ........중전!"


포졸들에게 한번 만나게 해 달라고 조르지만 그 말을 듣지 않고

가마는 어느덧 영도교 다리를 그냥 건너 가고 있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속으로 짜꾸만 멀어져 가는 부인 송씨의 모습에 애처로움은 더 해갔고 

그저 어쩌지도 못하고 수백번을 뒤돌아 보기만 할 뿐 그에게는 뽀족한 방법이 없었다

무능한 자신을 탓하려니 비오듯 눈물이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한번은 꼭 만나고 떠나야 할터인데 발만 동동 구르지만 어느덧 행렬은

벌써 왕십리 고개를 지나고 있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 속으로 짜꾸만 멀어져 가는 단종

어쩌지도 못하고 수없이 뒤돌아 보아도 애처롭게 그 자리에 서 있는 송씨

정말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정경이었다  

열여덟 어린 나이에 남편과 생 이별을 해야 했던

가슴 아린 사연이 깃들여 있는 눈물의 생이별 영도교 다리 

두사람은 어떤 말 하나 주고 받지도 못한채 그렇게 영영 이별 영 이별이 되고 말았다. 

오월이라 산야는 온통 푸르고 꽃들이 만발했지만 그들 가슴 속에는 

영영 잊지 못할 한맺힌 그 날이 되고 말았다.  solsae kns

 

정순왕후와 단종이 영영 이별이 되었던 영도교는 원래 다리 이름은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 이다

나무다리였던 것을 돌다리로 개축해서 성종이 직접 영도교(永渡橋)라는 어필을 내렸다고 전 한다. 
영영 건너가 버린 다리 영영 돌아 올수 없는 영 이별 다리 영 이별교를 그후 백성들은

영도교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다리를 헐어 모자라는 석재로 모두 써 버렸다고 한다

 

 

현재 청계천 8가에 있는 영도교는 청계천 복원 당시에 영월군과 서울시가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즉 영월에서 갖고 온 하천석을 영도교 다리 아래 깔아 놓고 이들 부부에게는 영영 이별이 아닌

500년만에 만남의 다리가 되도록 주선 하였다

.

 

영도교에서 단종과 영영 돌아 올 수없는 영영 이별을 하고 돌아온 정순왕후 송씨는

그날 부터 매일 아침 소복을 입고 동망산에 올라가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을 위하여 안녕을 빌었지만

얼마후 단종의 死事 소식을 듣고 송씨는 청룡사라는 절에 귀의 하게 된다.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날 창신동으로 정순왕후의 유적지를 찾아 가기로 하고 숭인동 사거리에는

정순왕후의 유적지 안내판 지도가 있었지만 이해 하기가 어려웠지만 

 

동망터널 입구 창신역에서 아파트 길을 따라 한참으로 오르니 정순왕후가 머물렀다던 정업원터가 보였다

 

다른 왕조들은 그들에 한을 풀어주지를 못했지만 정순왕후와 단종이 죽은지 250년이 지난 영조때와서

시호가 복권 되었다  

 

정순왕후와 함께 했던 이곳의  "앞산과 뒷바위는 천만년가리다" 라는 영조가 내렸다는 현판 액자 

前峰後巖 於千萬年( 전봉후암어천만년) 시호가 정업원터에 걸려있다

정업원터와 같이 있는 청룡사는 정순왕후가 비구니가 되여서 여생을 보냈다는 암자로 모두 여승들이다

 

 

청룡사는 조선시대 이래 지금까지도 양반출신의 대가집에서 수절한 寡婦들이 대부분 드나 들었다고 한다 

 

서울시내 4대 비구니 寺刹은 청량리청량사, 보문동보문사, 옥수동미타사, 숭인동청룡사이다.

 

 

정순왕후는 목숨을 연명하여 단종의 안위를 걱정하고 특히 반정세력의 탐욕에서 오르 내리기 싫어서 

비구니가 되었다고 하는데 ....

 

당시 정순왕후는 미모였다는 말도 전해지는데 주안상에서 마주앉은 세조가 신숙주에게 정순왕후를 ...

그러나 王侯였기 때문에 거절했다는 야사가 전해지는데 아마 신숙주는 자신의 處世를 돌아봤을 것으로 추측된다.  

 

청룡사에서 10여분 정도 車道를 따라 오르면 숭인근린공원 바로 동망산이다

 

 

 

근린공원 운동시설이 있는 한 쪽에는 단종의 안녕을 빌었다는 동망봉에는 알림표지석만 남아있다

 

근린공원을 세로 조성하면서 최근에 세운 것으로 예전에는 계단과 골목길을 통하여 올라 왔지만

2차선 진입로가 개설 되면서 도로 때문인지 정겨운 옛날의 정서는 사라진것 같다  

 


이 정자에 오르면 숭인동사거리와 신설동 멀리 청계천 그리고 영도교가 아파트 숲 사이로 살며시 보인다

 

2017년에 새로 신축한 동망각과 동망정

 

해마다 吉日을 택하여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는 제례를 모시는 곳이다

 

 

동망산에서 올라 왔던 길을 뒤돌아서 다시 내려오면 낙산공원(삼선동)방향으로 가는 큰 길을 따라서

15분정도 올라가면 아파트촌 가장 자리에 원각사라는 절이 있다  

 

 

 

단종의 천도 도량을 위해서 원각사 극락전과 원각사의 두 탑이 있다.

 

 

이곳에서 길을 따라 내려가면 체육시설과 긴나무 의자가 있는 작은 쉼터이고 조금 더 내려 가면 

초가집 한 채가 있는데 이곳에서 이수광이 머물렀다고 한다

 

비우당(庇雨堂)은 조선 광해군때 실학자 지봉 이수광이 살던 집으로 '비를 피할 만한 집'이라는 뜻이라 한다.

 

그는 이곳에서 지붕유설을 만들었다고 한다

 

집안으로 들어가면 정순왕후가 사용했다는 자주동샘이 뒷켯 암아래에 있다

 

 

샘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단수가 되어 지금은 물이 나오지 않는다

 

떨어진 낙엽들이 정순왕후의 슬픈 사연을 대신하고 있는듯 하였다.

 

열여덟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남은 60여년의 삶을 숭인동 동망봉에서 통곡으로 채운 그녀에게 어느 누가

천수를 누리고 살았다는 평가를 내릴수 있을 것인가?

정순왕후가 버텨나간 인생은 삶이 아니라 차라리 무덤 이었으리라 생각이 돤다

아니,한이 두고두고 얼마나 서려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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