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개국을 이끈 사람들
새왕조를 꿈꾸는 혁명가들
개혁론자들은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새로운 왕조를 주창해야 한다는 역성혁명론자들과,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성리학 사상을 중심으로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고려개혁론자로 나뉘어진다. 역성혁명론의 대표격은 정도전 이었고, 고려 개혁론의 대표격은 정몽주였다. 이들은 모두 이색의 문하에서 동문 수학한 사이였지만 대립은 결국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역성혁명론자들의 승리로 끝난다. 이성계는 군권을 쥐고 있었지만 변방세력이었기에 언제나 전쟁터로 내몰렸으며, 최영은 중앙의 권력을 잡고 있었다. 때문에 이성계는 새 왕조를 주창하겠다는 의지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출신성분 탓에 능력과 상관없이 배척의 대상이 되었고, 항상 주변의 세력으로 머물러야 하자 힘이 있는 이성계를 찾아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것을 역설했고, 정도전은 사상적인 부분에서, 무학은 이성계 개인의 인성과 천명론을 들먹이며 그를 부추겼고, 결국 이들의 설득과 논리가 이성계의 불만과 일치되면서 비로소 조선의 개국으로 이루어 지게 된 것이다.
▣정도전 : 이성계를 통해 성리학적 이상국가 건설을 꿈꿈. (1342년 경북 영주출생, 62세)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주장하였고,이미 국운이 기울어가던 고려왕조를 폐하고 성리학 통치 이념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꿈꾸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미미한 벼슬을 유지해오다가 아버지 정운경에 이르러서 비로소 직제학이라는 중앙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서얼 출신의 노비였다. 이런 출신 배경 때문에 동문수학 했던 벗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고 출세에 엄청난 걸림돌로 작용하자 역성혁명을 꿈꿀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작용했던 것이다. 아버지 정운경이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 친구였던 덕으로 이색 문하에서 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 거기서 정몽주, 이숭인 등과 교분을 가졌다. 24세인 1360년 성균시에 합격하고 그 후 성균관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과 함께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유학을 강론했다. 1375년 이인임 등 친원세력과 맞서다가 나주 목에 유배되었으며 2년 뒤에 유배지에서 풀려 난 뒤로는 낙향하여 4년간 칩거하다가 한양으로 가서 삼각산 밑에 초가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주변 유학도들의 방해로 서재를 철거당하고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이렇게 유랑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1383년 이성계를 찾아가 인연을 맺고 그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에 오른다. 이후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에 성공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등과 함께 전제 개혁안을 건의하고,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하여 이성계가 조정을 장악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듬해 정몽주 등과 함께 우왕의 아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좌명공신에 봉해지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그 다음해 봄 이성계가 사냥중에 낙마하여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정몽주 등의 탄핵을 받아 또 다시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 이었다. 이러한 정몽주 일파의 정치적 공략에 위기감을 느낀 이방원은 급기야 정몽주를 살해하는 등의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자,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풀려 나와 그 해 7월에 조준,남은,방원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새로운 법제도의 기틀을 닦았으며 경제문감을 저술하여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했다. 또한 명의 곡물 요구가 거세지자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군량미확보, 진법훈련, 사병혁파 등을 적극 추진해 병권 집중운동을 펼쳐 나간다. 경제문감별집을 저술해 왕이 나갈 길을 밝혔으며,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숭유억불 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의 이같은 노력은 사병혁파에 위기를 느낀 방원의 무력동원으로 중도에서 좌절되고 만다. 정도전의 세력이 날로 강해지자 방원은 자신의 형제들과 힘을 합쳐 그를 제거해버렸다. 정도전은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화 되는 것을 두려워한 방원은 사병을 이끌고 내습하여 그를 살해하고 세자 방석도 죽였다.
정도전은 자신을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며 한 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했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나친 자부심이 결국 그의 죽음을 자초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조선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역성혁명론에 입각해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을 개국하게 했고,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법제를 확립하고 민심을 수습 키 위해 천도를 단행했다. 조선개국의 이념인 유교사상을 사회 속에 확립시켰고,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를 내세워 왕의 바른길을 가르쳤다. 명의 곡물요구가 지나치자 요동 정벌론으로 맞서며 정치적 독립을 실행했고, 병권 집중화운동으로 군권을 안정시켰다.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왕조는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내해야 했다.
▣무 학 : 이성계에게 군왕이 될수있다는 확신을 심어 줌. 1327년 경남 합천 출생. 79세.
대몽항쟁의 명장 박서의 5대손으로 알려졌다. 무학의 부모는 고려말 당시 해안지방에 자주 출몰하던 왜구에게 끌려가다 간신히 탈출하여 안면도에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던 하층민이었다. 때문에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해서 그의 행적은 출가 이후 일부만이 겨우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무학은 출가한지 몇년 후에 원으로 유학하여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스님을 만나 선불교를 배웠고, 또한 원에 유학 중이던 나옹 혜근스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후에 나옹은 공민왕의 왕사로 봉직하고 있었다. 나옹은 무학을 전법제자로 삼았지만 나옹의 제자들은 그가 천민출신이라 이를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옹은 문도들의 반대로 그에게 의발을 전수 하지도 못하고 전법제자임을 알리는 시를 한 수 지어준다. 그는 공양왕의 왕사 책봉도 받아들이지 않고 나옹의 곁을 떠나 오랫동안 토굴에서 수도생활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이성계를 만난 뒤부터 그의 삶은 달라진다. 천문지리와 음양도창설에 밝았고, 파자점과 해몽 술에 능했다. 그를 찾아온 이성계가 問자를 짚어보이자 어느 쪽으로 보나 君이라 하며 그가 장차 임금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가 하면, 꿈에 서까래 세 개를지고 왔다는 이성계의 말을 듣고 그것은 임금王자라고 하여 후에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성계는 그를 스승으로 대했고, 조선개국 이후에도 왕사로 받들었다. 무학은 태조의 왕사로 있으면서 조선의 안정을 위해 새로운 왕도를 정하는 일과 왕궁을 건축하는 일에 가담하는 등 노년의 거의 전부를 조선의 건설에 쏟았다. 1405년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조선 개국의 주체 이면서 그 기득권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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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간도)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고 아들 행리, 손자 춘이 대대로 원나라의 관리를 지냈으며 춘의 아들 자춘도 원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를 얻었다. 그러나 원이 고려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해 원주민과의 대우를 달리하기 위해 차별호적을 만들어, 차별 정책을 실시하자, 이자춘은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한다. 당시 원은 명에 의해 중원으로 밀려나자,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실시하여 동북면의 쌍성총관부와 긴밀한 관계가 있던 기씨 세력을 제거하려 했고, 이자춘은 이러한 공민왕의 의도를 간파하고 1355년 공민왕을 만나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치면 자신이 돕겠다고 약속한다. 이자춘은 동북면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4년 후인 1360년 병사하고, 그의 차남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 위화도회군과 4대 불가론
고려가 요동을 공격하기로 한 것은 명이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는데다 철령이북 땅이 원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원을 몰아낸 명의 소유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고려를 명의 속국으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이에 고려 정부는 크게 반발하였고, 급기야 1388년 2월 최영을 중심으로 명의 전초기지인 요동을 정벌하고자 했다. 이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좌군도통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여 그 해 4월 요동정벌을 감행했다. 요동정벌 - 1388년.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이 5월에 위화도에 당도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강을 건너 요동성을 공략할 계획이었다.하지만 장마로 압록강 물이 엄청 불어나 강을 건널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이성계는우왕에게 요동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유명한 사대불가론으로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리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 고 주장하자,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해 최영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내고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한다.
조민수와 이성계 일파는 조정을 장악한 뒤 각각 좌시중과 우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조민수가 차기 왕으로 창을 내세우는데 반해 이성계는 우왕과 창이 신돈의 자손이기 때문에 왕씨 일족중에서 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의견이 양립되자 조민수는 목은 이색에게 조언을 구해 공민왕의 정비 안씨에게 국새를 맡겼고 안씨는 아홉 살인 우왕의 아들 창으로 하여금 왕위를 물려받게 한다. 그러나 창왕은 이듬해 11월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 당하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창을 등극시킨다. 그가 바로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다.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폐위된 우와 창을 죽인다. 또한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는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창녕으로 귀양가게 되자 이성계일파는 고려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조민수가 실각하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은 가속화 되었고 마침내 1392년 7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에 힘입어 이성계는 왕으로 등극하고, 공양왕을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시킨다. 이 부문에서 극작가인 신봉승씨는 제5공화국의 등장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로써 고려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렸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원주,간성, 삼척 등을 떠돌다가 1394년 이성계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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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주 1337년 - 1392년. 연일정씨
정몽주는 1337년 경상도 영천 땅에서 한미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살이에 나간 20세 후반에 이색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색에게서 성리학을 열심히 배우고 현실개혁에도 눈을 떴다. 특히 정몽주는 자기보다 연하인 정도전을 아껴 그에게 '맹자'를 선물로 주며 학문을 권장하기도 했다. 정몽주는 조정에서 촉망받는 벼슬살이를 이어갔다.
그러나 정몽주·정도전 등은 신진 세력이었기 때문에 권신들과 잦은 마찰을 빚게 되었다. 또 이들은 유학자 출신이었기에 불교도와도 분란을 일으켰고, 친명파였기에 친원파와도 정적의 관계가 되었다. 정도전이 이러한 면에 대하여 급진적이었다면 정몽주는 온건적 입장이었다.
1375년(우왕 2), 권신인 이인임 일파에 대해 탄핵하면서 정몽주는 경상도 언양에서 귀양살이를 2년 했다. 귀양에서 풀려난 후 그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고 제학 등의 벼슬을 받아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몽주는 조전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공을 세우기도 했다. 다시 1383년 이성계와 함께 북쪽 오랑캐 방비에 나서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이성계와 사귀게 되었다. 정몽주는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정도전을 서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이성계와 정몽주의 도움으로 정도전은 대사성 등의 벼슬을 누렸다. 1388년 최영과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나섰으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최영 등 보수세력을 제거하고 집권했다. 이어 우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신진세력의 기반을 확실하게 했다. 이때 정몽주와 정도전은 각기 좌익·우익에서 이성계를 도왔다. 차츰 이성계는 실세로 부상하였다. 더욱이 이들 신진 세력은 이성계의 명망을 업고 새로운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곧 조준·남은·정도전 등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이때 정몽주는 소외되고 있었다. 이에 그는 이들 급진세력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굳혔다. 1392년 세자가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성계가 마중하러 황주로 가는 길에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몽주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겼다. 정몽주는 대간을 통해 정도전·조준·남은 등을 탄핵하고 죽이려 하였다. 이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급히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알렸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제거하기도 결정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정몽주는 이성계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이성계 집으로 찾아갔다. 이방원이 정몽주의 심중을 떠보려할 때 정몽주는 '단심가'로 대답했다. 자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아버지의 의중을 안 이방원이 수하장수인 조영규를 동원하여 선죽교에서 죽였다. 그리고 정몽주 세력들도 완전 제거되었다. 때는 1392년이었다.
이지란 (1331(충혜왕 1)~ 1402(태종 2) ) 고려말 조선초의 장군·공신
본관은 청해(靑海). 본성은 퉁[佟]. 본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 자는 식형(式馨). 아버지는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이다. 이성계와 결의형제를 맺었다. 부인은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姜氏)의 조카딸인 혜안택주 윤씨(惠安宅主尹氏)이다.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아 천호가 된 후 1371년(공민왕 20) 부하를 이끌고 귀화, 북청(北靑)에 거주하면서 이씨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1380년(우왕 6) 이성계가 아기바투[阿其拔都:阿只拔都]가 지휘하는 왜구를 섬멸한 황산대첩에서 활약했고, 1385년 함주에서 왜구를 격파하는 등 무공을 세워 선력좌명공신(宣力佐命功臣)에 봉해지고 밀직부사가 되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에 참가하여 1390년(공양왕 2) 밀직사가 되었다. 이어 서해도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지문하부사·판도평의사사를 역임했다. 1392년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 여진추장 월로티무르[月魯帖木兒] 정벌에 참가하여 명에 의해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다. 그해 조선이 건국하자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으며 참찬문하부사에 올랐다. 1393년(태조 2) 경상도절제사로 왜구를 막아냈으며, 동북면안무사가 되어 갑주·공주에 성을 쌓고 이 지역을 진무했다. 1397년 도순무순찰사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동북면의 주·부·군·현의 경계를 정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문하시랑평장사로서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다시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태조가 영흥에 은거하자 전투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을 속죄하고자 중이 되었다. 이성계가 일찍이 "투란(豆蘭)의 말달리고 사냥하는 재주는 사람들이 혹시 따라갈 수가 있지만 싸움에 임하여 적군을 무찌르는 데는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용장이었다.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렬(襄烈)이다. 묘소는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읍 안곡리에 있다.
고려말 개혁파 사류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조선왕조의 개창과 문물제도의 정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吁齋)·송당(松堂).
충렬왕 때 재상을 역임한 인규(仁規)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판도판서 덕유(德裕)이다. 1374년(우왕 즉위) 문과에 급제한 후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사헌장령 등을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382년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의 천거로 경상도에 내려가 왜구토벌에 소극적인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징벌했다. 이듬해 밀직제학을 지낸 뒤 도검찰사(都檢察使)로 강원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쳐 그 공으로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에 올랐다. 이후 두문불출하며 경사(經史)를 익히고, 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우왕의 폐위를 도모했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장악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에 올랐다. 철저한 제도개혁과 체제정비를 통해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을 해결하려 한 그는 이성계·정도전(鄭道傳) 등과 전제개혁을 협의, 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찬성을 얻고 그해 7월 최초로 전제개혁의 필요성을 상소했으며 아울러 관제·국방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장했다.
이어 전제개혁에 반대하는 조민수(曺敏修) 등을 탄핵하여 유배시켰으며,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했다. 1390년(공양왕 2)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조선왕조 개창의 토대를 마련했다. 1392년 정몽주(鄭夢周) 일파의 탄핵을 받아 체포되었다가 정몽주가 살해되자 풀려나와 찬성사·판삼사사가 되었으며, 그해 7월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다. 그뒤 문하우시중을 거쳐 문하좌시중·오도도통사(五道都統使)가 되었으며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편찬하는 등 신왕조의 체제 정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세자책봉·요동정벌 등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대립하게 되어 자연히 이방원과 정치적 입장이 가까워지게 되었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 판문하부사로 있으면서 한때 투옥되었으나 이방원에 의해 석방되었으며, 그해 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 좌정승·영의정부사가 되고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이 되었다.
조준의 전제개혁안은 극도로 문란해진 토지제도의 재편을 통한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녹과전(祿科田)·구분전(口分田)·군전(軍田)·투화전(投化田)·외역전(外役田)·위전(位田)·백정대전(白丁代田)·사사전(寺社田)·역전(驛田)·외록전(外祿田)·공해전(公廨田) 등의 제전(諸田)을 분급하여 관리와 군인, 그리고 국역담당자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색인 : 토지개혁론). 또한 기내사전(畿內私田)의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전제개혁의 지역적 안배를 설정했다. 그는 요순 이래의 하·은·주 3대를 이상적인 사회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정치이념은 인정(仁政)과 법치였다. 즉 궁극적인 목표를 유교의 왕도와 인정에 두되 그 방법에 있어서는 법치를 강조했으며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경계를 바르게 하고, 기강을 세우는 문제를 강조했다. 또한 〈주례 周禮〉의 육전에 의하여 중앙 정치제도의 완비와 재상이 중심이 되는 정치운영을 주장하기도 했다. 즉 재상의 역할은 군자를 천거하고 소인을 물리쳐 백관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군주는 다만 적합한 재상을 얻어 그와 함께 의논할 뿐이라고 했다.
또 주자학적 통치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학교교육, 사회윤리의 보급에 주력했다. 우선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고 국가의 치난(治亂)과 정치의 득실이 관련되는 곳이므로 근실하고 학식이 높은 사람을 교수관(敎授官)으로 삼아 학교교육에 힘쓰도록 했다. 이때 교수관의 임무는 고려 초기 이래의 사장(詞章)이 아닌 사서오경(四書五經)과 같은 경서를 읽도록 지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4품 이하의 관원을 모아 시험을 보게 하여 시험에 합격한 자가 제교(製敎)를 관장하게 하고, 합격하지 못한 자는 좌천시켜 유풍(儒風)을 진작시키도록 했다. 또한 〈주자가례 朱子家禮〉의 보급을 통한 유교질서의 확립을 강조하여 가묘(家廟)를 세우고 기제(忌祭)를 지내도록 했으며 효자와 절부(節婦)를 뽑아 조세를 감면하고 정표(旌表)를 세워 사회 교화를 이루도록 했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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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1335-1408. 재위기간: 1392.7-1398.9. 집권 6년 2개월)
1392년 4월 공양왕의 스승이자 수문하시중으로 있던 정몽주가 방원의 사주로 살해되자 이성계는 그 해 7월에 공양왕을 내쫓고 마침내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로 고려 국왕으로 등극하고, 1393년 3월 명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다. 또 무학과 정도전으로 하여금 새 수도를 물색 케 하고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수도로 삼는다. 이성계는 개국 후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법전이 편찬되었다. 또 숭유 억불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불교를 탄압하였다.
이성계는 즉위한 직후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계비강씨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하자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높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성계의 등극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방원은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방번도 함께 살해했다. 이성계가 와병 중에 일어난 사건으로 몹시 상심한 나머지 그해 9월에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이성계는 방원에게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흥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방원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인 1402년에 한양으로 돌아와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덕안전을 새로지어 정사로 삼고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5월 창덕궁 별전에서
향년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이성계는 3명의 아내에서 13명의 자식을 얻었다.
▣ 신덕왕후 강씨 - 그녀는 신의 왕후 한씨와는 달리 권문세가에서 태어났으며,태조의 집권 거사에도 참여했을 뿐 아니라 조선 개국이후에도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태조는 그녀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자 한씨 소생들과 대립하게 된다.
1396년 사망 후 시호는 신덕왕후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성계가 죽은 후에 태종은 몇차례 걸쳐 이장을 단행했으며, 그녀에 대한 왕비의 제례도 폐하고 서모에게 행하는 기신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200년 뒤 현종 때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강씨는 다시 종묘에 배향 되고 왕비의 기신제도 복구되었다. 한편 태종은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에 대한 불만으로 강씨의 무덤을 여러 차례 이장했고, 정자각을 헐고, 십이지신상 같은 석물을 실어다 청계천 돌다리를 만드는 등 강씨에 대한 노골적인 불노를 표출했다.
▣방석 1382년-1398년 - 조선 개국 원년에 세자 책봉 문제가 일어났을 때 배극렴 등이 방원의 세자 책봉을 주장했으나, 이때 왕비 한씨는 죽고 없었기에 계비 강씨의 의향에 따라 태조는 무안군 방번을 세자로 세우려 하였다. 하지만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은 방번이 성격이 광망하고 경솔하다며 방번의 세자 책봉은 반대했고,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방석은 어머니 강씨의 보살핌과 정도전, 남은 등의 지원에 힘입어 세자로서의 자질을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강씨가 죽고 태조마저 병석에 눕게되자 그의 배후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이 틈을 타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난을 일으켰고, 이 난의 성공으로 세력을 잡은 방원은 방석을 유배시키고 방번과 함께 살해했다.
후에 세종의 여섯째아들 금성대군이 방석의 후사를 이었으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에 실패하고 32세에 처형되자
후사가 완전히 끊겼다.
● 새 도읍지 한양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하자 무학과 정도전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성을 옮길 계획을 세운다. 일차적으로 계룡산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여 왕성건립을 시작했다. 그러나 계룡산은 지역이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하다는 하륜의 주장에 따라 도읍지는 다시 한양으로 변경 되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왕이 서경인 평양과 남경인 한양에 궁궐을 짓고 돌아가면서 머무르면 국운이 크게 융성한다는 지론에 따라 숙종 5년인 1101년 북악산 기슭에 궁궐을 짓기도 했다.
일찍이 도참사상의 대가로 잘 알려진 신라의 고승 도선은 '한양은 전국 산수의 정기가 모두 모이는 곳이기에 반드시 왕성이 들어 설 것이며, 왕성의 주인은 이씨가 될 것' 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에 고려왕조는 이를 염려하여 고려 중엽에 윤관으로 하여금 북악산 남쪽에 오얏(자두)나무를 심었다가 그것이 무성하게 자라자 베어 버리게 했다. 즉 오얏李의 성한 기운을 없애 이씨가 왕조를 세우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한양으로 도읍지는 정해졌지만 궁터만은 쉽게 정하지 못했다. 하륜은 모악산 아래 지금의 신촌으로 무악은 인왕산을 진산으로 하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용호로 삼아야 한다고 했지만, 정도전은 대왕은 남으로 향하는 법이지 동향을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면서 북악산 아래쪽을 극구 주장했다. 이에 무악은 화산인 관악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궁을 앉히면 관악산의 화기가 뻗쳐 우환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정도전은 관악의 화기는 한강이 막아 낼 수 있다는 지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정도전의 의견을 채택하여 북악산 아래에 왕성을 짓고 궁궐을 남쪽으로 향하게 했으며,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불을 잡아 먹는다는 전설의 동물인 해태석상을 경복궁 앞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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