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려조선

단절(斷絶)로 점철(點綴)되는 조선후기 역사 (1.) 선조영조철종고종

시인김남식 2013. 6. 12. 12:49

선조영조철종고종으로 이어지는 단절로 점철되는 조선후기 역사(1.) 정리 솔새김남식

                     *점철 = 흐트러지는 것
양자(養子)로 들어가 권력 잡은 첫 조선 임금은 제14대 선조이다

조선 왕실에서 방계(傍系)로 입승(入承;왕족의 한사람이 아들없는 임금밑으로 들어가 대를이음) 해서

대통을 이은 최초의 인물은 하성군(河城君), 즉 선조이다.

선조는 중종의 7번째 서자 덕흥군에 3남으로,

그가 1552년(명종 7년) 덕흥군 사저에서 태어날 때만 해도 왕이 될 가망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명종이 인순왕후 심씨에게서 낳은 순회세자가 요절한 상태에서 명종까지

병석에 눕자 그에게 기회가 찾아 왔다.

반정으로 어부지리 임금이 된 중종에 두아들 인종과 명종도 책무를 다하지 못하였다   


선조의 대통 계승은 명종 보다는 인순왕후의 의지가 더 많이 작용했다.

서자 계열로 덕흥군은 인순왕후의 시동생 덕흥군 아들 선조가 조카뻘이다

수많은 君들 중에서 선조가 낙점을 받아 큰아버지 명종에게 입적을 하게 된다  

명종의 환후가 위독해지자 인순왕후는 봉함편지 한 통을 대신 처소에 내리고

대신만 보게 했는데 거기엔 하성군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11대 중종은 정실에서 두아들 12대 인종 13대 명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후사를 두지 못하고  

중종의 7번째 서자 덕흥군의 3남에서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조선의 정치 구조가 선조 때부터 변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명종 때만 해도 기승을 부렸던 윤원형 등의 척신 정치가 종식되고 士林中心의 사대부 정치체제가

수립된 것이 이때 부터였다.

사림중심 체제는 신권(臣權) 중심의 정치체제를 뜻하는 것으로

방계로 입승해 대통을 이은 선조때 부터 신권이 확연히 왕권의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어서 붕당정치가 격화되면서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擇君)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대표적 사례가 경종이다.

당시 장희빈 소생인 경종에겐 아들이 없었다.

노론의 사간원이었던 이정소(1674~1736)는

“전하의 춘추가 한창이신데도 후사가 없어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인심이 흩어져 있다” 면서

후사를 빨리 책봉할 것을 주장한다.

이 상소는 미약한 조선 왕권의 증거였다.

노론이 이런 무리수를 둔 것은 경종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가 양자를 들여

후사를 잇게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을 택군의 대상으로 점찍고 있었기에 경종의 양자 입적을 반대했다.

경종이 이를 수락하자 연잉군은 왕세제(王世弟)로 책봉 되는데

노론이 이에 만족하지 않고 대리 청정까지 요구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결국 노론은 역모로 몰려 4대신이 사형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됐고

경종 역시 재위 4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를 놓고 시중에 독살설이 광범위하게 퍼지기도 했다.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된 연잉군 영조가 왕위를 이어 받는다. 


농부에서 왕이 된 ‘강화도령’ 순조의 장남 효명세자는 일찍 세상을 떴다.

세자의 아들 헌종이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는데 이때 부터 왕실에 양자 입적이 잇따르게 된다.

헌종은 효현왕후 김씨 등 세 명의 부인을 뒀으나 아들은 없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절정기일때 당시 헌종의 6촌 이내의 형제 항렬에서 왕족이 없었다.

7촌이내의 조카 항렬은 몇 있었으나 항렬을 무시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헌종의 7촌 아저씨뻘 되는 강화도령 원범을 임금으로 앉힘으로서 

철종은 헌종의 아저씨 뻘이므로 조(祖)가 되어야 하나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아들 전계대원군(추존)의 아들이므로 장조계의 철종 즉 宗으로 된다





세도정치가 안동 김씨는 헌종의 후사로 ‘강화도령’이라 불린 철종을 고르게 된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였다.

은언군은 순조때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노론 정권에 의해 사형 당했다.

철종의 부친 전계군(全溪君)은 이원경, 경응, 원범(철종)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 원경은 헌종 때 민진용(閔晉鏞)의 모반사건과 관련되어 사형되고 

조부와 큰형을 잃은 원범은 강화도에서 농부로 지내다 왕으로 택군된 것이다.


철종의 즉위는 순조비 순원왕후를 내세운 안동 김씨와

익종(효명세자)비 신정왕후를 앞세운 풍양 조씨 간 권력투쟁의 산물이었다.

풍양 조씨에서 왕을 낼 것을 우려한 안동 김씨가

강화도의 농군이던 원범을 전격적으로 즉위시킨 것이다.

이로써 조선은 노론의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두 가문에 의해서 國王자리가 좌우될 정도로 전락하였다.

철종이 왕이될 그에게는 부모가 모두 없었으며 이복형이 하나만 있었다   

쇠망하는 왕조는 자식 부터 줄어드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철종은 철인왕후 박씨 외에도 7명의 후궁을 두어 여러 명의 아들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고 숙의 범씨가 낳은 영혜옹주 한 명만 성장하여 혼례를 올렸다.

그 남편이 갑신 정변의 주역 박영효이다.

 


철종이 또 후사 없이 세상을 뜨자 입승 대통한 인물이 고종이다.

안동 김씨에게 선수를 빼앗겼던 신정왕후 조씨는 철종 사후 중신을 불러놓고 후사 책봉을 주도했다.

안동 김씨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던 반면 조 대비는 흥선군 이하응과 미리 계책을 세워놓고 있었기에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에게 대통을 잇게 할 수 있었다.

고종도 양자로 들어가 왕위를 이였다.


이렇게 즉위한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에게서 4남1녀를 두었으나 3남1녀가 일찍 죽고

겨우 살아 남은 순종이 대통을 이었다.

순종은 순명효황후 민씨와 순정효황후 윤씨, 두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자녀를 두지 못했다.

다시 입승 대통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순종의 이복 동생인 고종에 아들 영친왕 이은이 대를 잊게 된다

이렇튼 쇠망하는 조선 왕조는 자식 부터 점철되는 공통점이 오래전 부터 있었다 




 

 ▲ (왼쪽)고종과 순종 (오른쪽) 그리고 영친왕과 이방자여사

 


여러번 반복해서 읽어야 비로소 역사가 이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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