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려조선

단절된 조선 후기역사(2.) 영친왕과의친왕

시인김남식 2013. 6. 1. 12:50

단절된 조선의 후기 역사 (2.) 정리/ 솔새김남식

 

순종은 순명효황후 민씨와 순정효황후 윤씨, 두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자녀를 두지 못했다.

다시 입승하여 대통을 이여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대상에 오른 사람은 이복 동생인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결국 순종의 이복 동생인 즉 고종에 아들 영친왕 이은이 대를 잊게 된다

이렇튼 쇠망하는 조선 왕조는 자식 부터 이렇게 점철되는 공통점이 있었다 

 

.

영친왕은 1907년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태제로 책봉 되었으나 1910년 국권이 상실되고

순종이 황제에서 이왕(李王)으로 격하 되면서 황태제에서 왕세제로 격하 됐다.

영친왕은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형식상 왕위를 계승해 이왕이 되었으나

일본의 반대로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서 체류해야 했다.

영친왕은 일본 왕족 나시모토의 맏딸 마사코(方子)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 아들은 어려서 죽고, 둘째 아들이 이구(李玖 ; 1931~2005)씨다.

 

영친왕(1897~1970)
고종광무태황제(1852~1919)와 순헌황귀비 영월 엄씨(1854~1911) 사이에 1897년 출생하였다.
위로 황태자 척(순종. 1874~1926)과 장귀인 소생의 의친왕(1877~1955)을 형으로 두었으며.
영친왕의 생모 엄황귀비는 본래 명성황후를 모시던 상궁 출신으로 명성황후 생전에

고종의 승은을 받았다가 황후에게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 나게 된다.
1895년 을미지변(을미사변이라고도 함)으로 명성황후가 살해 당하자 고종에 의해 재 입궁해서

고종을 모시게 되는데 얼마 후 고종이 아관으로 파천(아관파천.1896)할 때도 곁에 있게 된다.
영친왕은 바로 이 아관(아라사공사관)에서 고종을 모실 때 생긴 아들이다.

영친왕을 낳고 귀인에서 순빈 다시 1907년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영친왕이 황태자에 책봉되자 황귀비가 되었다.
영친왕은 1900년 영친왕에 책봉되었고,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됨과 동시에 그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11살의 나이로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된다.
이때 고종은 황태자가 방학 때마다 본 국을 방문 할 것을 조건으로 유학을 허락하지만

영친왕은 이후 엄황귀비가 사망하는 1911년 까지 귀국하지 못하게 된다.
1910년 일본과 대한제국이 강제 합병되면서 왕세자 이은으로 강등 되었다

1926년 의붓형 순종이 사망하자 왕위 승계 절차에 따라 조선의 이왕으로 불리게 된다.

 

                                                                                                    의민황태자(영친왕)묘 영원(英園)


고종은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립되기 전에 민갑완(1897~1967)이란 소녀를 영친왕의 반려로 내정하여

이미 약혼 예물까지 교환 했지만 일본 정부는 조선 왕세자의 부인을 일본여인으로 앉히려 했고

그래서 약혼을 강제로 파기하고 일본 황족인 나시모토궁 수정왕의 맏딸 마사코(이방자.1901~1989)를

영친왕의 약혼녀로 적격 공개 한다(1916년)

고종은 이에 대단히 분개하며, 결코 용납 할 수 없다고 역정을 냈다고 하는데 한편 그 당시

영친왕과 예물을 주고 받았던 그녀는 평생 독신녀로 살았다고 한다.

1919년 영친왕과 마사코의 결혼식이 예정된 그해에 고종은 돌연 사망하게 되어

다음해인 1920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그 다음해인 1921년 첫 아들 진을 낳지만

1922년 마사코비가 생전 처음 방문한 조선에서 아들 진을 잃는다.
그리고 1931년 둘째 아들 구를 낳습니다.
영친왕은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장에 까지 이르렀으며,

조선왕실의 재산과 일본 정부가 지급하는 연금으로 당시 일본왕족 중에서는 가장 부유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하게 되면서 영친왕과 마사코비 모두에게

일본 왕족의 자격이 박탈되어 일본 정부에게 재산을 몰수 당한다

영친왕은 해방된 조국에 돌아 오고 싶어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영친왕의 귀국을 거부한다

순종에 의해 세자로 책봉 됐던 영친왕은 나라가 독립하고 조선 왕실이 재건됐다면

당연히 계승해서 왕이 됐을터인데

광복후에도 이승만 대통령이 자기 자리를 염려해서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영친왕은 광복후 10여년을 그렇게 고향만 그리다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에 와서야 겨우

입국이 허락되지만 그는 두다리로 한국 땅을 밟지 못하고 병원 이동 침대에 눕혀져 겨우 입국 할수 있었다.
그리고 7년 동안 투병후 1970년 한많은 生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의 소생으로는 이방자와의 사이에 낳은 둘째 아들 구씨가 전부이다.

 

이구씨는 부계는 한국 황실이고 모계는 일본 황실이었던 것 

그는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미국인 줄리아 여사와 결혼했으나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렇게 단절된 조선의 후기 역사는 손을 이을 자손이 귀했다

결국 의친왕의 9남 이충길씨의 맏아들인 이원씨를 이구씨의 양자로 입적했으며

이원씨는 의친왕의 9남 이충길씨의 맏아들이다.

현재 이충길씨는 생존해 있는 의친왕의 아들 중 최연장자 이다.

 



의친왕(1877~1955)

의친왕은 고종의 다섯번재 아들이다 (위(上) 황실가계도 참조)

의친왕은 영친왕의 이복형으로서 고종의 후궁 귀인 장씨 소생이다.

어머니는 귀인 장씨이며

1891년 15세의화군(義和君)에 책봉 되여서 1893년 17살때 김사준(연안)의 딸과 결혼 하였다

1899년 23세때 의친왕(義親王)으로 책봉 받았다

의친왕은 조선 황실 인사 중 거의 유일하게 항일 獨立運動에 나섰던 인물이다.


1919년 11월 의친왕이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과 연계해 상하이 임시정부로 합류하려다가

만주 안동에서 체포된 것은 유명한 사건이다.

망명 실패 후 그가 임시정부에 보낸 편지가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중국신문

민국일보(民國日報) 1919년 12월 4일자에 실렸다.

이 글에서 그는 “차라리 자유한국의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親王)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한다”고 밝혔다.


                                                                                  남양주 홍유릉 비공개지역에 있는 의친왕묘 


한편 영친왕은 일본에 가 있었기에 부인(후궁)을 두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대한제국 이씨 왕가에서는 의친왕에게서 14명의 부인을 두게 했나 봅니다

연안김씨 의친왕 비에게는 자녀가 없었으나

다른 부인에게서는 아들 12남 딸 9년 합이 22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구씨의 양자로 입적한 이원씨는 의친왕의 9남 이충길씨의 맏아들로 생존해 있는

의친왕의 아들 중 최 연장자 이다

이구씨가 숨지기 1주일 전 문서로 후계자를 내정했고 사인을 했다고 한다.



고종황제의 손자로 뉴욕대를 졸업한 뒤 현대 홈쇼핑에서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의친왕의 손자 이원(1962년~ )씨가 2005년 7월부터 이씨 왕가의 전통을 이여 받았다. 

이원씨의 본명은 상협이며 두 아들을 두었다

일산에서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던 평범한 40대 가장이었던 그의 운명은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씨가 돌아 가신 뒤 갑자기 황세손의 양자로 결정되면서 큰 전환점을 맞게된다

그의 대외적인 칭호는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으로 '황사손(皇飼孫)' 또는 '봉사손(奉祀孫)'이며 

현재 그는 전주이씨 대동 종약원 총재 일을 보고 있다.

 

종로4가 종묘에서 열린 '조선왕릉 40기 세계 문화유산등재 대국민 보고회'에

참석한 황사손(황제를 이은 자손) 이원씨




가수 이석 (1940~  )

 

1960년대에 후반 부터 널리 불리웠던 '비둘기집'이란 곡을 부른 가수 이석은 
시대를 잘못 만난 왕조의 아들로서 극진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 하거늘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하로 살아 갔다고 최근 TV에 출연하여 너무 힘들어 자살까지 생각했었다고 회고했다
가수 '이석'씨는 고종황제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의 열한번째 아들로 

1941년 아버지인 '의친왕'보다 36세 연하인 어머니 홍씨(당시 궁중의 '전화 교환수')와의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 났다.
또한 한국 전쟁 당시에 황실의 재산이 없어지고 해방후 왕조가 없어지고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모든 재산이 국고에 환수 되면서 빈손으로 나오게 되었다.



하루 아침에 일반 국민으로 살아야 하는 황실의 가족들은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게 살아가게 되었으며,
그동안 이석씨는 안해본 장사가 없을 정도로 고생 하다가

어느 음악 감상실 DJ와 방송관계자의 눈에 띄어 가수의 길로 뛰어 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비둘기집 (1972)'이란 노래이다

왕실 후손에 대한 지원 필요성을 역설했고 결국 지방 자치단체에서 이를 수용 했기에

이후 그는 전주 한옥체험마을에 둥지를 틀 수 있었고 생활비도 지원 받아 생활이 안정되자

조선황실 복원에도 나설 수 있었으며 조선역사를 알리는 등 황실문화재단 총재일을 하고 있다

정리 솔새김남식

 



 

비둘기집 / 이석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메아리 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 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터에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포근한 사랑 엮어 갈 그런 집을 지어요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
메아리 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 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터에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포근한 사랑 엮어 갈 그런 집을 지어요
그런 집을 지어요 그런 집을 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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