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한민국

우리 역사가 굽이치는 단둥(丹東)

시인김남식 2012. 6. 3. 16:17

주변도시(边城)에서 항구도시(港城)로 변한 단둥

 

꽃 향기가 물씬 풍기는 빈하이(滨海) 거리를 거닐면 새들이 수면위를 평화롭게 날고 강물이 출렁이며 앞으로 전진한다. 전쟁의 흔적이 살아 숨쉬는 압록강위의 단교(断桥)를 바라보노라면 마음속에 긍지감이 피어오른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만난 이곳 시민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고향이 애국교육의 훌륭한 기지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단동은 북한과 306km에 달하는 변경선을 사이 두고 있다. 또한 한반도와 중국 및 구라파 아세아 대륙의 주요 육로교통의 요지로 자리잡고 있다. 바다, 강, 변 등을 갖춘 독특한 지리적 우세도 갖추고 있다. 단둥 철도는 220km를 달려 북한의 수도 평양에 닿을 수 있다. 또한 한국의 수도 서울과 420km 떨어졌으며 이는 동북아 를 잇는 철로의 대동맥인 셈이다.

 

단둥항은 한국 인천항과 245해리 떨어져 있고 한국과 일본을 연계하는 중요한 해상통로이다. 일반 사람들은 보통 단둥을 압록강변의 아름답고 방직으로 유명한 도시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단둥을 발전시키는 사람들의 개방된 사고가 단동의 중점산업을 경방직에서 항구물류산업으로 전환했고 변두리도시에서 항구도시로 그 이미지를 탈바꿈 하였다.

강에서 바다로 연강 과 연해는 얼핏 보기에는 비슷하다. 하지만 푸르른 바다는 세계를 향한 광활한 도전의 상징이기도 하다.
항구산업발전 전략을 계획하고 단둥은 항구의 우세적 조건을 충분히 발휘해 지역경제발전을 부추켰다.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단둥의 경제는 호황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둥강(大东港)은 둥강시(东港市)에 있고 동북 동부지역의 국제,국내 무역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절실한 해상통로이기도 하며 동북아 경제의 유리한 중심적 위치에 처해있다. 위에 말한 우수한 환경을 비롯해 단둥의 경제가 양 날개를 달고 세계를 향해 힘을 한껏 박차고 있다.

다둥강 항구물류지역,단둥시 국제항구 물류지역, 물류운송센터는 단둥경제의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몇 억위안을 투자해 만든 다둥강 항구물류지역은 대대적으로 투자해 얼마전부터 공정사업을 착수했다. 단둥은 이 사업의 목표를 다둥강을 단둥의 중심부로, 동북 동부지역의 심장부로 만들어 일본, 한국, 북한 등 의 나라들이 오가는 현대 국제물류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랴오닝 연해개방정책의 일환으로 세계를 향해 끝없이 날개짓 하는 단둥은 주변국들의 래왕을 포용하고 성위원회, 성정부의 협력추진하에 이룩한 개방정책이 가져다 준 보기드문 이중적 혜택을 발휘하여 세계의 도시로 거듭날 것이다.

 


역사가 굽이치는 단둥(丹東)
 
중국 동북은 역사, 지리 등 얼키고 설킨 원인으로 우리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중국 동북관광지 가운데서 단동-봉성-관전-환인-집안코너는 역사, 지리 등 테마여행에서 황금코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코너의 시점이 바로 6.25전란, 박작성, 구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등 수많은 역사의 스토리를 담고 있는 단둥(丹東)이다. 
석양이 비춘다. 머나먼 압록강 끊어진 다리를 말없이 비춘다. 잔잔한 금빛 무늬가 이는 압록강의 맑은 물은 말이 없다. 한 갑자를 넘어선 끊어진다리는 력사의 봉분위에 놓인 거석에 눌리워 입을 열 수 없는 듯이 말이 없다. 아무 말도 없다. 
고구려의 박작성이 바라보이는 단동, 명나라 장성의 최동단 시점인 단동, 6.25전란으로 끊어진 다리가 역사의 견증으로 거연히 버티고 서 있는 단동이다.
단동시는 중국 대륙에서 조선반도로 들어가는 첫 요충지로 항상 군사쟁탈의 촛점이기도 했다. 득히 당나라에서 수차 고구려정벌을 했었는데 그때 단동은 려당(麗唐, 고구려와 당나라) 군사쟁탈의 요충지였다. 

모택동동상이 잇는 앞에 보이는 것은 단둥역이다

 

박작성(泊水+勺城)과 호산장성

당나라 정관 22년(서기648년) 당태종은 대장 설만철에게 군사 3만을 주어 수로로해서 고구려의 박작성(泊水+勺城)을 치도록 했는데 “구당서. 설만철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정관) 22년 만철은 청도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받고 갑사(甲士) 3만을 통솔하여 래주에서 바다로 고구려를 정벌했다.
압록강으로 백여리 박작성까지 쳐들어갔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크게 무서워하여 많이는 성을 버리고 도망했다. 박작성주 소부손은 보병 만여명을 통솔하여 대항했다… 만철…은 진 앞에서 소부손의 머리를 자르고 박작성을 에워쌌으나 그 성이 산과 압록강의 물의 험요함에 의지하여 쌓아 성을 공략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박작성은 바로 지금 단동에서 약 20여km 상거한 관전현의 호산, 즉 호산장성이 있는 곳이다.

3만의 갑사와 1만 보병의 대결, 생각만해도 그 가렬처절했던 전쟁의 참상이 눈 앞에 선하다. 압록강 입해구에서부터 단동까지 늘어섰던 전선들, 그리고 그 전선들에서 휘날리는 깃발과 박작성을 에워샀던 3만의 갑사, 그와 대결했을 만여명의 보병들, 함성은 하늘땅을 진동했을 것이고 피는 강을 물들였을 것이고 저기 자그마한 산성의 아래에는 창칼이 해빛에 서리발을 토하며 총총히 늘어서 피맛을 기다렸을 것이다.

오늘, 고고학자들은 박작성의 옛터인 호산에서 고구려시대의 큰 우물과 산성옛터를 찾아냈다. 그리고 명나라와 청나라의 기록들에 근거해 호산이 바로 명나라 시대에 단동에서부터 산해관까지 잇는 장성을 쌓은 명나라 장성의 최동단 시점임도 알아냈다.
명나라 때 청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지금의 단동에서부터 산해관까지 장성을 쌓았는데 호산이 바로 명나라 장성의 최동단 시점인 것이다. 
청나라 때에 와서 중원대륙을 정복한 청나라는 자기 시조들이 발상한 곳이라고 해서 동북지역의 개간과 자원채취를 엄금하면서 버들바자(柳條邊)을 쌓았는데, 단동 역시 유조변의 동단 시점이기도 하다.


지금은 호산 산성에 명나라 장성을 복구해 놓았고 호산의 역사를 전시하는 “장성기념관”까지 있다. 호산 바로 남쪽 산기슭이 조선 땅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일보과(一步跨, 즉 한발작만 내디디면 건널수 있다는 뜻)”라고 한다.
관광객들은 호산장성에 올라서 다시 남쪽기슭에 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다면 고구려때의 잔도(栈道, 고대가파로운 산에다 놓은 다락길)가 있는데 그 잔도를 따라 산을 내려가면 조선의 초소와 민가들을 똑똑히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의 초병들과 멀리서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호산에서 바라보면 멀리 조선 측에 있는 민둥산이 보인다. 그 산 위에 설례(薛禮, 라당련합군의 총 사령관, 김유신이 당나라에 연합으로 고구려를 치자고 제안했을 때 마침 고구려를 정벌하려던 당태종은 설례(즉 설인귀)를 대장으로 삼아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의 묘(廟, 즉 사당)가 있다고 한다. 호산에서 인민페로 150원만 주면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 강가에 배를 대고 조선의 민가들을 바라볼 수도 있고 멀리서 설례(薛禮)의 사당을 볼 수도 있다. 고구려가 라당연합군에 망한지도 이미 1500여년이나 되지만 아직까지 설례의 사당이 그대로 존재해왔다는 것도 어쩌면 기적이라고 하겠다. 

 

 

 

中朝무역의 중심지 단둥(丹東)

단둥은 당나라 ‘안동도호부’가 설치되면서 동북아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곳이다. 한국 드라마 ‘대조영’에서 설인귀 장군이 활동한 지역이 바로 안동도호부였던 단둥이다. 그 후 단둥은 한적한 시골마을 또는 국경마을이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중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면서 다시 한번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지금도 압록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엔 ‘抗美援朝記念館’이 자리잡고 그때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단둥은 中朝 무역의 중심지로 변신해 지금은 중국과 북한의 교역물량 70~80%가 이곳을 오가고 있을 정도로 무역의 도시로 탈바꿈했다. 잠시 中朝 무역의 현황을 살펴보면, 2005년 중조 무역액은 15억8천만 달러에 달해 전해에 비해 14% 늘어났다. 그 중 조선에 대한 중국의 수출은 3분의 2를 차지했다. 역시 하루가 다르게 변신하는 중국의 경제력이 북한과 대비되는 수치이다. 이 대부분이 단둥을 통해 거래가 이뤄지는 셈이다.

이처럼 중국과 북한의 무역중심지로 자리잡은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지리적 조건이다. 단동시는 중국에서 가장 큰 변경도시로서 요동반도의 동남쪽, 압록강 기슭, 북한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단둥시와 북한의 변경선은 210 킬로미터가 되며 철도, 도로, 수로가 서로 통하고 있어 조선반도와 유라시아대륙을 잇은 중요한 지역이다.

 

 

단동시 인구는 240만명이며 한족, 만족, 몽고르족, 회족, 조선족 등 29개 민족이 모여살고 있다. 중국 국무원은 지난 1988년 3월에 단동을 연해 개방도시로 비준했으며 1992년7월2일에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변경경제합작구를 세웠다. 최근엔 한국에서 중국 단둥을 남북한 육상 직수송을 대신할 물류 거점으로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남북한 육상교류가 미진한 상황에서 단둥을 중심으로 무역거래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젠 단둥이 무역거래의 중심지가 아닌 국제적인 관광지로 거듭날 태세다. 서울과 중국의 단둥을 연결하는 항공노선 개통이  확정돼 오는 5월 29일 첫 운항에 들어간다. 새 항공노선이 개통되면 백두산 관광과 고구려 유적지 등과의 연계가 쉬워 중국 동북지역 여행 활성화에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한국에서 단둥은 420km로 비행기로 1시간10분이면 도착할 수 있어 관광은 물론 무역의 활성화에도 한몫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단둥시는 인천-단둥 취항 날짜에 맞춰 선양 노선 취항도 발표했으며, 베이징, 상하이, 선쩐은 물론 선양, 칭다오, 하얼빈, 옌지 등 국내선 취항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경의선 개통으로 신의주-단둥-베이징이 연결된다면 그야말로 단둥은 교통의 요지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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