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혼이 살아 숨쉬는 곳 경교장 솔새김남식
서울 종로구 평동에 있는 경교장 1945년 8월15일 해방후 대한민국이 건국 하기까지의 임시정부 활동 공간이며
김구선생이 1949년 6월까지 머물었던 역사의 현장 경교장을 지난 2014년 1월 16일 찾아가 보았다.
경교장 앞 뜰에서의 김구 선생과 조완구 선생의 모습(1947년 5월 John Florea 촬영)
서대문 강북삼성병원 건물 사이에 어색하게 끼여 있는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자 안두희
총탄을 맞고 김구가 서거한 곳으로 병원으로 향하는 차량으로 번잡한 외부와는 달리 경교장 내부는
다소 한산한 모습이었다.
지하 1층 전시실과 응접실·김구 선생 집무실 등이 재현된 1, 2층을 둘러보고 병원안에 이런 공간이 있는 것이
신기하듯 옛 흔적 그대로 재현되어 있어서 당시 암울했던 대한민국의 격동기 시절을 영상처럼 보는듯 하였다.
원래 경교장은 금광업자 최창학의 저택으로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이 중국에서 돌아 온 뒤 김구 선생의 사저이자 집무실로 제공한 곳이다. 1949년 6월 26일 서거 할때 까지 3년 7개월간 머물던 곳으로서 굴곡진 현대사를 반영하듯 경교장은 6· 25때는 미군 병원 주둔지로 전후에는 중화민국과 월남대사관저로 사용 되다가 1967년 고려병원(현강북삼성병원)이 인수해서 원무과로 사용했던 곳이다
1996년에 삼성병원을 신축 할때 철거위기를 잘 넘기고 보존의 목소리가 제기되면서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2005년 국가사적으로 승격 2010년 서울시가 복원을 시작하여 지난 2013년 3월 시민들에게 돌려 주었다.
한편 최창학(1891년~1959년)은 조선의 3대 부자(민영휘·김성수·최창학)중 한사람으로써 1937년 중일전쟁때는 비행기 1대를 일본군에 기중하여 감동시킨바 있고 1938년에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기금으로 10만원이나 기부하는등 눈에 보이는 친일행위를 한 그가 해방과 동시에 일종의 정치적보험 성격이었는지 1945년 11월 23일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주석에게 무상으로 제공하여 광복을 계기로 일대 변신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경교장뒤 한옥에 그대로 거주하면서 건물내 있는 가구를 옮기지 못하게하고 중요 물품은 경교장내 창고에 보관하고 수시로 들락거리며 없어지지 않았는지 감시하고, 수백명이 들락거리는 반탁 운동때는 집이 망가진다고 찌푸렸으며 문상객을 받을 때도 집이 조금이라도 흠이 가지않을까 안절부절 못 했다고 전한다.
김구 유족들은 2개월후 집을 떠나게 되는데 그 역사성과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경교장은 계속 사용되고 훼손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최창학은 해방정국에서 용케 살아 남아 1949년 반민특위 특별조사부에서 불구속 조사를 받았으나 특별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이어가며 오산중고등학교 이사장을 지내다가 1959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경교장에서 건국준비를 하면서 통일정부를 지향하고 반탁운동을 하게 된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임시정부 활동상황을 보면 그시절 사회정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건국 노선에 반대한 金九, 金奎植은 1948년 4월 평양을 방문하지만 실익을 얻지 못하고 돌아 오게 되는데 당시 남북한 정치세력하고는 상관없이 외세에 의해서 우리나라는 분단이 확정 되었으며 북한에는 이미 소련이 들어와 김일성을 통해서 '인민위원회라'는 단독 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김구는 1948년4월30일에 '남북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를 발표 건국을 방해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일관하였고 북한이 남침 낌새를 알았음에도 함구 하는등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미군이 철수해도 공산당이 남침하지 않는다는 김구의 호헌장담은 결과적으로 6.25라는 큰 손익을 대한민국에 안겨 주게되었다.
김구선생의 북행을 만류하였지만 그는 1948년 4월19일 정문을 피해 지하문을 통해서 북행을 실행하게 된다.
그러나 4월30일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키로 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돌아 오지만 실익을 얻지 못한다
김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5.10 총선거는 투표율 90% 이상 참여로 공정하게 치러졌지만 선거가 부자유한 분위기 속에서 실시 되었다는 논평을 남기고 김구와 김규식은 보다 조직적으로 5.10 선거 무효화운동을 전개하였고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는게 불가능해진 김구는 공산당 노선으로 돌변하여 건국을 훼손하는 활동을 시작한다.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가난한 상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그는 상해로 망명하여 1932년 윤봉길.이봉창의거를 주도했으며 1940년 광복군을 창건하고 주석에 취임하여 독립을 맞는다.
조국에 돌아온 그는 자주독립과 반탁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전개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채 1949년 6월 26일
암살범 육군소위 안두희에 권총 4발로 안면복부등 치명상을 입고 경교장에서 서거하게 된다.
암살범 안두희는 평소 존경하던 백범김구가 귀국후 남북협상에 참가하는등 정치혼란을 조장하기 때문에 살해한 것이라고 암살 동기를 진술하였고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으나 3개월후 징역 15년형으로 감형되고
6·25 전쟁으로 형이 집행정지 되면서 군에 다시 복귀하여 1951년 12월 중령 진급과 동시 예편한다.
전쟁이 끝나던 1953년 안두희는 형이 완전 복권되고 1956년까지 명동에서 건설회사 부사장으로 이승만 정권에 비호를 받지만 4.19의거로 제2공화국이 수립되자 김구선생 살해진상 규명위원회가 발족되자 잠적하게 된다.
하지만 1961년 간사였던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지만 같은해 5.16 혁명쿠데타가 일어나 제2공화국이 무너지고 공소 시효마져 만료되면서 안두희는 자유에 몸이 된다. 그후 여러차례 위협을 느끼며 살아 갔으며
1992년 2월에는 백범 김구의 무덤을 찾아가 사죄의 참배하기까지 했으며 1994년에 국회법사위 백범김구선생
암살진상조사 소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조사 받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1996년 10월23일 버스기사였던 박기서가 안두희 자택에 침입해서 미리 준비한 몽둥이로 내려치자 말리는 그의 아내를 위협하여 노끈으로 묶어 감금하고 안두희를 계속해서 내려쳐 몽둥이로 죽음을 맞이 하는데 그간 쫒기며 고달프게 일평생을 살다간 안두희는 매의 고통속에서 처첨하게 79세로 생을 마친다.
한편 박기서는 1심때 부터 국민감정 때문에 법정 최저형량이 선고되었다는등 말이 많을 정도로 시민단체 독립운동단체등 각계각층에서 구명운동으로 2심에서 5년 구형에서 3년으로 감형 받아 1년 6개월 복역후 김대중 대통령때 취임 3·1절 특사로 풀려난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을 참 아이러니 한 것을 느끼게 한다
사진 -> 1949년 당시 총알이 나간 유리창을 복원을 했는지 옛 그대로를 보여 주고 있다
김구의 죽음은 통일정부 수립을 갈망하던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대한민국 건국후 최초로 국민장으로 거행되고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그가 타계한지 13년이 지난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안두희 배후에 김창용 특무대장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의혹이 있지만 역사는 늘 그랬듯이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제대로 규명되지는 않은채 반세기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안두희나 박기서 모두가 과연 역사의 정의를 위해서 옳은 행동이었는가 생각하게 한다.
한편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은 1956년 1월 출근길 괴한 2명에게 저격 당하는 사건이 발생 하는데 한사람이 테러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김창룡 사건’으로 부각돼 군은 물론 정치·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수사결과 그의 주요 참모였던 허태영대령과 이진용대령이 미움을 받아 좌천된 원한으로 살인 교사로 밝혀젔으나 허태영 부인의 탄원으로 사건의 최고 배후가 강문봉 육군 중장임이 밝혀지는데 그는 무고한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며 장성들간에 이간을 획책해 군의 단결을 해쳐 제거했다고 주장했다. 군법회의 결과 강문봉·허태영·이진용에 사형이 선고 됐으나 강문봉은 6·25 당시 전공이 참작돼 무기징역으로 감형 되고
김창룡은 중장으로 특진시키고 대한민국 최초 국군장을 치르게 하였다.
2019년은 3·1운동 &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으로 경교장을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하려면 병원 부지를 이전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병원 이전을 일방적으로 요구할 수도 없기에 국가 차원에서 경교장의 역사적가치를 인정하고 복원에 나서주길 원하고 있다.
.
판단은 여러분이 하시기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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