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박인환 묘

시인김남식 2008. 11. 28. 19:38

시인 박인환묘  솔새김남식

 

31살의 짧은 인생을 살다간 박인환의 묘가 망우리에 있다기에 망우산 등산도 할겸 겸사겸 찾아 나섰다

이곳은 공원묘지를 방문하는 사람들 보다도 등산하는 사람과 산책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이다

  

용마봉 방향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박인환의 시비가 보인다

 

 

 

박인환(朴寅煥 1926 – 1956) 강원도 인제 출생
1944년 평양의학전문학교 입학, 1946년 '국제신보'에 시 <거리>를 발표하여 등단
1949년 김수영, 김경린, 양병식, 임호권과 함께 공동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
'박인환 시선집'(1955), '목마와 숙녀'(1976)

 

 

공원묘지 입구에서 10여분정도 가면 목책계단을 만나면 그아래로 천천히 내려가면 계단 끝아래 박인환묘가 있다

 

 

목마와 숙녀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燈臺)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1955년 작품)

 

 

묘는 그간 찾는이가 없었는지 흔한 꽃화분도 없이 쓸쓸한 보습이었다

그리고 잘 보존되지 않은듯 무덤에는 잔디 보다 황토 흙이 더 많아젔고 허물어저 있었다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을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이름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시집 박인환 시선집 1955)

 

 

묘지 표지석 시비가 이제 60년도더 거기에 있기에 글자가 많이 허물어질듯 달아서 흐린 글자가 보였다

 

 

얼굴 / 박인환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꽂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목마와 숙녀>와 함께 박인환의 대표적 작품으로, 샹송 스타일의 곡을 붙여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시는 낭만적 시의 정수라 할 만하다.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박인환이 불안한 시대 의식과 위기감
허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한 잔의 술과 이 같은 낭만적 시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우수 어린 시인으로 만든 것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감상적 성품이라기 보다는 시대적 운명일 것이며
그에게 <세월이 가면>과 같은 시는 커다란 정신적 위안제가 되었을 것이다.

 


전쟁의 황폐한 분위기에서 시인은 따스한 인간애에 목이 말랐을 것이고 세월에 따라 흘러간 사랑이 그리웠을 것,
그 사람 이름이 잊혀지고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그 눈동자와 입술은 언제나 서늘한 가슴에 남아 있을 것
애뜻한 사랑 노래는, 영원히 현대인들에게 신선한 감동과 가을비 같은 촉촉한 서정성을 전해 주며
길이 남아 있기에 충분할 것이다.

 

목마와숙녀 - 낭송 박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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