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역사기행

사육신 역사공원

시인김남식 2008. 11. 18. 17:39

 

노량진 사육신 역사공원  솔새김남식

 

2014년 3월 5일 늦은 오후 사육신 공원을 방문하였다

사육신 묘는 그간 여러번 참배 했지만 공원으로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경부선 열차가 지나는 한강변 노량진 나루터 부근 언덕에 조성되어 있는 사육신 공원은

조선초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대응하여 단종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잃은 사육신 무덤이 조성된 공원이다. 

 

 

본래 이 묘역에는 박팽년, 성삼문, 유응부, 이개의 묘만 있었으나 그후 하위지, 류성원, 김문기의

허묘도 함께 추봉하였다.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는 사육신 문제를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고,

그의 가묘를 외세 입깁에 의거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설치했으나 종래의 사육신 구성은 변경하지 않았다. 

 

 

사육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 사육신을 모시는 사당인 의절사 입구임을 알려주는 홍살문

원래 있던 것은 아니고 1970년대에 의절사를 조성하면서 세운 것이다.

사육신을 모신 무덤 앞에 의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원래 이곳에는 단종복위 사건에 가담하여 참혹하게 처형된 성승,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 다섯분의 시신을

어느 스님이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숙종대에 사육신이 복위되면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의 가묘가 새로이 모셔지고

산기슭에 이들을 모시는 민절서원이 세워졌다

 

 

현재 민절서원은 남아 있지 않고 1970년대 사육신묘 부근을 성역화 하면서 의절사라는 사당을 세우고

주변을 공원화하여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단종 3년 음력 윤 6월(1455)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하매 이에 의분을 품은 충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탄로되어 참혹한 최후를 마치니 이들을 훗날 사육신이라 부르고 있다.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 숙종 7년(1681) 이 산 기숡에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전해 오다가,

1955년 5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육각의 사육신 비를 세웠다.  

 

 

1978년 서울특별시에서는 이 의로운 충혼들을 위로하고 불굴의 충의 정신을 널리 현창하고자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70평으로 확장하고 의절사, 불이문, 홍살문, 비각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장으로 정화하였다.

 

 

 

 

비록 많은 곳에서 이들을 위한 제사를 올리고 있다 하지만 일족이 멸문을 당해서 웬지 쓸쓸해 보이는 곳이다,

 

 

 

 

 

 

 

 

 

 

사육신은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에게 신임을 받았고 문종에게서 나이 어린 세자(단종)을 잘 도와 달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처형당한 충신돌이다.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3년(단종1)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과 황보인, 김종서 등을 숙청하고 권력을 독차지한 끝에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이들은 동조자를 모아 단종을 다시 위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1456년 6월, 이들은 본국을 돌아가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지는 운검을 하게 되는 것을 기회로 세조 일파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운검이 취소되자 실행을 미루었다.

 

 

 

 

1차로 옥중에서 사망한 박팽년과 스스로자결한  유성원에게는 1456년 6월 7일 거열형이 진행하였고

다음날 2차로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응부. 김문기. 박중림. 성승. 윤영손. 박쟁. 송석룡.이휘. 석을등

13명에게는 생체 거열형이 가해젔다. 겨열형은 사람의 몸에 다섯 곳을 밧줄로 묶어서 말로 하여금 

수레를 달리게하여 사지를 찢어서 죽이는 최고의 형벌이다  

이에 같은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 등은 뒷일이 두려워 세조에게 단종 복위 음모를 일러바쳤고

세조는 연루자를 모두 잡아들여 직접 이들을 심문하였다.

이떄에 주모자들 가족 중 남자는 모두 처형당하였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다.

 

 

단종복위 거사 주동자는 성삼문 박팽년이고 행동책은 유응부이기때문에 이들 3명이 주역이라고 한다

1691년 숙종17년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사육신 절의로 공인하였다.

 

 

이 충신들은 1691년(숙종17) 숙종 때 관직이 복구되었다

 

 

 

 

 

 

 

 

 

 

 

사육신 공원이 입지한 노량진은 오랜 세월 동안 대학입시에 낙방한 재수생,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준비생들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서울에서도 쓸쓸한 느낌을 많이 주는 지역이다

 

 

그래서 인지 사육신공원에는 남녀 데이트족 학생들이 보였으며 한쪽에는 체육공원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한강과 63빌딩을 조망 할 수 있는 조망대도 설치되어 있으며 사육신역사관에는 여러가지전시물이 있었다

 

 

 

 

 

김질 1422(세종 4)~ 1478(성종 9). 고자질을 하고 이후 그는 어찌 살았을까 친구들에게 미안해서 양심에 ...ㅋㅋㅋㅋ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 할아버지는 개국공신인 익원공(翼元公) 사형(士衡)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종숙(宗淑)이다. 처음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진출했으며, 충의위(忠義衛) 부사직에 있을 때 휴가를 얻어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이로부터 참상관의 성균관 수학제도가 비롯되었다. 1450년(세종 32)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수찬에 뽑혔으며, 이어 우정언을 거쳐 1455년(세조 1)에는 사예가 되었다. 이듬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의 단종복위에 가담했다가 마음을 바꾸어, 이를 세조에게 알렸다. 이 공으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가 되고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과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그뒤 좌승지·공조판서·우참찬을 거쳐 1468년(예종 즉위)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곧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한명회(韓明澮)·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예종과 성종 초기에 어린 왕을 보좌하여 정사를 다스리던 직책인 원상(院相)을 맡으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1471년(성종 2)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으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다. 〈경국대전〉의 편찬에 참여했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묘는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음현리에 있다

 

김문기

김문기는 금녕김씨로 김씨 문중에서 여러차례 탄원을 넣어 오늘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설왕설래이다

김영삼 전대통령. 김재규가 금녕김씨다. 한강대교에서 사육신묘 가기전에 금녕김씨 문중사무실이 있고 그 곳에서 그를 추모한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은 서로 음모하고 질투하고 내가 먼저 앞서가려 하고있다. kns

사육신공원을 나서 노들지하철역으로 가는 길목 강변아파트 입구에 있는 표지석이 눈에 띄어 관심 있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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