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 제3대 태종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아버지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세자 자리는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에게 돌아가고 더불어 정도전이 재상 중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왕자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수세에 몰린 이방원은 결국 1398년(태조 7) 8월 정변을 일으킨다.
이방원은 형제들과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등의 일파를 제거하고 (계비강씨는 2년전 이미 죽었고
태조 이성계 병환중임) 이복 동생들인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귀양 보내 살해하니
이 사건을 제1치 왕자의 난 이라고 한다
이 난을 통해 태조는 결국 큰아들 방우는 죽고 없기에 방원의 형인 영안군(방과)을 세자로 책봉하는
교지를 내렸고 영안군은 곧 조선 제2대 임금 정종으로 즉위를 한다
그로 부터 2년 후에 1차 왕자의 난에 불공평한 논공행상한 사람들과 이방원의 넷째형 방간이 난을 일으키자
결국 방간은 유배됨으로써 마무리 되는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다
이방원은 이복형제와 친형제의 피를 뿌리고 1400년 11월에 왕위를 물려 받아 조선 3대 임금 태종이 된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1405년에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 하였고, 17년 10개월의 재위기간 동안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는등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치적을 남겨 아들 세종의 원할한 국정운영에 큰 힘이 되었다.
태종아버지 태조 이성계와의 극심한 불화
태종이 왕이 되자 형님 정종이 상왕이 되고 아버지 태조는 태상왕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태종을 못내 못마땅하여 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미워한다
아버지 이성계를 부정하는 방원의 행보 첫 순서는 불교탄압이었다. 태조의 건원릉과 어머니 신의왕후의 제릉에는 마지 못해 원찰願刹을 세우게 했으나 자신의 능에는 생전에 원찰을 세우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
정비 원경왕후 민씨 (元敬王后1365-1420)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과의 사이에 4남(양녕대군, 효령대군,충녕대군<世宗>,성녕대군) 4녀를 두었지만 태종과 화목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왕이 되기 전 그녀는 총명하고 결단력 있는 내조자였으며 위기에 처했을 때 여러번 능력을 발휘했다.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이 정도전등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득세할 수 역량은 원경왕후 민씨의 도움이 컸다. 그러나 태종이 왕이 된 뒤 축첩이 심하자 자주 다툼이 일어났는데 다툼은 단순한 사랑싸움을 넘어 외척의 권력 형성과 양녕(讓寧)의 세자책봉 문제로까지 비화되어 즉위초 부터 협유집권(挾幼執權)의 기회를 노렸다는 의심을 받아온 왕비의 동생들인 민무구(閔無咎)와 무질(無疾), 뒤에 무휼(無恤), 무회(無悔)등 4형제가 죽임을 당하고 왕비도 폐비 위기 까지 이르렀으나 세자에게 악영향을 끼칠것을 염려하여 실행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큰 아들, 세자 양녕대군과의 불화
자신이 세자가 되지 못하여 왕자의 난을 2번이나 치루고 왕에 오른 태종은 1404년 (태종 5년) 11세의 큰아들 양녕을 세자로 책봉하여 적통 왕권을 계승하고 의도를 거스르는 세력은 용납하지 않았다. 외척 세력의 발호를 방지하고자 원경왕후의 남동생 4명(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을 처형했다. 하지만 큰아들 세자 양녕이 기행(奇行)을 일삼다 결국 태종 18년(1418) 양녕대군 나이 25세 세자가 된지 15년만에 폐세자가 된다. 실록에 의하면 태종은 세자를 폐할때 통곡으로 하교했다고 하니 마지막까지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던 아버지 태종의 고민이 보인다.
(조선역사에서 스스로 왕위를 내던진 유일한 세자 양녕은 평생 풍류를 즐기며 67세의 천수를 누렸다. 양녕은 어려서부터 글을 잘했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척 했다. 스스로 미친 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여 아무도 양녕의 진심을 아는 이가 없었다. " 즉 양녕은 권력의 잔혹함을 어려서 부터 체험하였고 권력의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기행을 일삼은 것이다라고 야사는 전하는데 알길이 없으외다.)
1418년(태종 18) 태종은 52세에 셋째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은 지 두달 만에 전격적으로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도 군권에는 관여하다가 1422년(세종4) 5월 10일 연화방(창경궁)에서 56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패륜아 큰아들 양녕으로 속이 썩을대로 썩은 태종에게 불세출의 성군, 셋째 아들 세종이 있으니 조선 왕조를 위하여 정말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
헌릉(獻陵):태종과 원비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
원경왕후가 1420년(세종 2) 수강궁(창경궁) 별전에서 태종보다 일찍 세상을 뜨자, 태종의 명으로 같은 해 9월 17일 대모산 기슭에 왕후의 능을 조영했는데, 억불정책으로 원찰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로 부터 2년 후인 1422년(세종 4) 태종이 승하하자 아들 세종은 같은 해 9월 6일 원경왕후의 능 옆에 봉분을 따로 만들어 아버지를 모시고 난간으로 연결하여 쌍릉으로 조성하였다.
헌릉(獻陵)은 태종과 원비 원경왕후 민씨의 동원이봉(同原異封) 쌍릉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생전 불화로 지내어 부부의 정이야 식었겠지만 원경왕후는 태종 곁에 바싹 붙어 있지만 태종보다 2살 위였던 원경왕후는 왕비가 된 뒤에 많은 고초를 겪었는데 지금 이들은 돌아 누워 있을까 마주 보고 있을까?
아버지 이성계와 극단적인 불화 이복형제와 친형제의 피를 뿌리고 왕위를 쟁취한 이방원 독하기로 따지면 세조 보다도 더 했다고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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