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년의 조선시대 전통문화는 조선왕릉 40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왕릉 터 잡기부터 풍수상 최고 길지를 선정하기 위해 새로운 왕과 최고직 관리들이 전면에 나섰다.
왕릉 위치에 대한 원칙은 조선시대 율법의 큰 틀인 `경국대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왕릉 터는 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에 잡는다.
지금 거리로 보면 도성에서 4㎞ 밖, 40㎞ 내로 삼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이 기준이 다소 완화되는 양상을 띈다.
이렇게 왕릉을 잡다 보니 초기 왕들 터가 풍수상으로 우세한 지역이라는 의견도 있다.
조선 왕릉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에 참여한 이창환 상지영서대 교수는 "큰 원칙은 `경국대전`의 거리 제한을 따르고 당대 최고 풍수지역을 찾다 보니 왕릉 40기가 도성을 중심으로 산재하게 된 것"이라면서 "경기 구리시 동구릉(태조 이성계) 등 초기 왕릉들이 풍수상 우수한 지역을 선점했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그러나 어디가 좋고 나쁘고는 의미가 없다. 모두 당대 최고 지관들이 후보지를 골라 신중하게 선정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왕릉은 이에 따라 대부분 서울과 경기지역(고양시 광명시 남양주시 구리시 파주시 화성시 김포시 등)에 위치한다.
경인 지방은 왕실 소유지가 주로 포진돼 있던 지역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단종의 묘인 장릉은 강원도 영월군, 태조 6대 조부모의 묘인 준경묘와 영경묘는 강원도 삼척군에 있다. 사후 추존된 왕을 포함한 10기의 왕릉은 북한에 있다. 현재 관점에서 보면 왕릉 위치에 대한 세부적 규칙은 없는 셈이다.
왕이 승하하면 새로운 왕이 지금의 장례위원장 격인 `총호사`를 임명한다.
총호사에는 대개 영의정이나 좌의정 등 고위직이 임명됐다. 풍수에 밝은 지관을 통해 풍수상으로 뛰어난 후보지를 골라 임금이 최종 선택하는 시스템이었다.
터 잡기를 포함한 장례 기간은 5개월에 이른다.
조선시대 왕릉 전문가들에 따르면 조선시대 왕릉은 도성에서 거리 제한을 중심으로 도로와 관계, 주변 산세와 관계(풍수지리적 고려) 등을 종합해 결정됐다.
시대의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셈이다.
보통 조선 왕릉은 뒤에 주산(主山)을 등지고 산 능선 언덕 끝 부분에 있다. 이때 주산은 북쪽을 보고 왕릉은 남면을 하고 있다. 남면을 하고 있을 때 좌측은 동쪽이 되며 우측은 서쪽이 돼 동쪽(좌)을 청룡(靑龍), 서쪽(우)을 백호(白虎)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