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려조선

진령군

시인김남식 2009. 10. 21. 09:53

민비와 진령군 이야기


2006년 7월 1일, 명성황후(대한 제국 건국 전이므로 아직 중전 민씨)의 피난 행적이 적힌

임오유월일기(壬午六月日記)가 발견됐다.

당시 중전 민씨를 호종한 누군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일기에는

1882년 7월 27일(음력 6월 13일)부터 1882년 9월 12일(음력 8월 1일)까지 51일간 일행의 숙소와 일정

중전의 건강 상태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가운데 1882년(고종 19)에 임오군란으로 무기고를 탈취한 군인들이 별기군을 창설하고

교육하던 일본인 교관을 살해하고 공사관까지 공격하는 한편 대궐에 난입하였다.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지는 가운데 민비는 기적적으로 충청도의 장호원으로 피신하게 된다

다시 집권한 대원군은 중전의 국상(國喪)을 발표하여 죽음을 기정사실로 했지만  

장호원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민자영에게 찾아온 한 무당의 예언대로 

군란은 청나라에 의해 진압이 되었고 대원군은 텐진으로 압송되자 명성왕후는 51일만에 환궁하게 된다 .

 

무당을 신봉하여 나라를 그르쳤던 민자영은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된다.

무수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것으로도 모자라 이하응을 제거하기 위할 목적으로 청나라에 개입을 요청한 것이

빌미가 되어 청일전쟁이 발발하였으니 그 죄과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1895년 8월 20일 새벽 일본에 의해 훈련된 부대가 경복궁을 포위하고 저항하던 근위군을 일축한 다음

일본에서 파견한 30여 명의 자객들이 난입하였다. 고종의 침전에 궁녀 차림으로 숨어 있던 민자영은 정체가 발각되자

밖으로 달아나다가 난자 당해 죽었다.


처참하게 난자당한 시신에 입에 담기 어려운 치욕이 가해진 다음 석유를 뿌리고 불 질렀는 바

진령군의 신통력은 무당집 부엌에 있는 개다리 소반처럼 별무소용이었다.

진령군은 그런 최후를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는커녕 영원한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고 홀렸을 것이었다.

무당에게 홀린 민자영은 열강이 노리는 격동의 시대에 무당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다가 처참한 죽음을 당했으니

민자영을 죽인 범인은 진령군이라고 해야 타당하다.

민자영은 대가를 받은 것으로 치부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로 인해 무수한 백성이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고 나라가 멸망한데다 지금까지도 친일파가 떵떵거리게 만든 죄과는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다.


1882년 임오군란때 성난 군사들에게 죽을 뻔한 왕후 민씨(명성황후)가 간신히 충주 장호원까지 도망갔다가

50여 일만에 환궁하니 백성들은 놀랐다.

그런데 왕후는 한 여인을 데리고와 진령군이란 작호를 받게 해 주었으니 이는 7종 천민으로 취급받던 무당에게

군봉을 내린 것으로, 여자가 당호(堂號)를 받지 않고 군호(君號)를 받은 것은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례였다.


진령군이 이토록 파격적인 출세를 한 계기는 왕후가 죽음의 공포와 절망속에서 지낼 때 점을 쳐 주었기 때문이다.

왕후가 숨어 지내기 하도 갑갑하여 민응식이 불러온 무당이 진령군이었는데 자칭 관우의 딸이라 하였다 한다.

이때 진령군은 명성황후가 곧 환궁할 것이며 그 날짜까지 알려줬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그녀가 예언한 그 날짜에 환궁하게 되자 명성황후를 따라 나선 것이다.


그후 그녀는 대궐로 들어가 살며 부귀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날마다 왕실을 위해 산천 기도는 물론이요, 굿판과 제사는 쉴 날이 없었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임금께 아뢰어 봉군의 은전, 즉 진령군이라는 작호를 내렸다.

이렇게 신분상승을 한 그녀는 양반을 벼슬에 임명하고 내쫓는 것도 마음대로일 만큼 권세를 휘둘렀다.

진령군에게는 김창렬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당상관의 관복을 입고 다니며 실세 노릇을 하자 조정의 고위 관료들 중

몇몇은 진령군과 의남매를 맺거나 의자(義子)가 되기까지 했다.


허약한 세자(순종)의 병을 고친다고 굿판을 벌이고 금강산 1만 2천 봉에 쌀 한 섬과 돈 천 냥, 무명 한 필씩을 얹은 것도 이때 일이다.

그로 인해 국고가 탕진되고 있어도 명성황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령군만 믿었다.

게다가 자신이 관우의 딸이라고 자칭하면서 나랏돈으로 서울 북방에 관우 사당인 북묘를 건립하고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억만금을 벌었는데, 왕과 왕비는 여기 자주 찾아와 점도 치고 굿도 벌였다.

진령군의 세도가 세상을 흔든지도 어느덧 11년.

대담무쌍하게 목숨을 걸고 진령군을 통렬히 규탄하는 상소를 올린 선비가 있었으니 사간원 정언 안효제였다

고종은 대로하여 그를 전라도 먼 섬으로 귀양 보냈다.

3년 뒤 안효제는 귀양이 풀렸고 다시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한 후 낙향해 버렸다.

그러나 요지부동이던 진령군의 영화도 드디어 망할 날이 왔으니 그때는 고종 31년(1894년)이었다.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친일 내각이 들어서자 개화파 새 정부는 진령군을 잡아 들여 옥에 가두었다가

진령군이 모아 놓은 억만금을 모두 몰수한 뒤 풀어 주었다.

그녀는 북묘인 관우 사당에서도 쫒겨나 삼청골 오막살이에서 숨죽이고 근근이 살다가

이듬해 8월 을미사변 때 일본인들 손에 강력한 후원자였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그 충격인지 얼마 뒤 따라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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