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서/야담설화

이퇴계와 두향의 슬픈 로멘스

시인김남식 2010. 4. 18. 18:33

 

 

이퇴계와 두향의 슬픈 로멘스

 

이황(李滉) 퇴계(退溪)선생은 매화(梅花)를 끔찍이도 사랑했다.

그래서 매화를 노래한 시가 1백수가 넘는다.

이렇게 놀랄 만큼 큰 집념으로 매화를 사랑한데는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단양군수 시절에 만났던 관기(官妓) 두향(杜香) 때문이었다.

퇴계(1501-1570)는 1548년(명종3년)에 단양 군수로 부임한 것은 48세 때였다

그리고 두향의 나이는 18세였다.

두향은 첫눈에 퇴계 선생에게 반했지만 처신이 풀 먹인 안동포처럼 빳빳했던 

퇴계선생 이었던지라 한동안은 두향의 애간장을 녹였었다

그러나 당시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었던 퇴계 선생은 그 빈 가슴에 한 떨기 

설중매(雪中梅) 같았던 두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향은 시(詩)와 서(書)와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를 좋아했다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그러나 겨우 9개월 만에 끝나게 되었다.

퇴계 선생이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두향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변고였다.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은 두향이에겐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이별을 앞둔 마지막 날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움 뿐이다.』 .

두향이가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시 한 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 제 어느듯 술 다 하고 님 마저 가는 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 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1570년 퇴계 선생이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퇴계 선생이 단양을 떠날 때

그의 짐 속엔 두향이가 준 수석 2개와 매화 화분 하나가 있었다.

이때부터 퇴계 선생은 평생을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했다.

퇴계 선생은 두향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매화를 두향을 보듯 애지중지했다. 

 

 

 

 

선생이 나이가 들어 모습이 초췌해지자

퇴계 선생을 떠나보낸 뒤 두향은 간곡한 청으로 관기에서 빠져나와

퇴계 선생과 자주 갔었던 남한강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았다.

퇴계 선생은 그 뒤 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말년엔 안동에 은거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 퇴계 선생의 마지막 한 마디는 이것이었다.

"매화에 물을 주어라".

선생의 그 말속에는 선생의 가슴에도 두향이가 가득했다는 증거였다.

"내 전생은 밝은 달이었지. 몇 생애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前身應是明月幾生修到梅花).

퇴계 선생의 시 한 편이다.

 

퇴계 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4일간을 걸어서 안동을 찾았다.

한 사람이 죽어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장례를 마치고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그와  함께했던 단양팔경을 두루 둘러 보고는

그리움에 몸부림 치며 견디어 보지만  끝내 100일도 견뎌 내질 못하고 강선대 바위에서

고운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둔 채 옥순봉 아래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강물에 풍~덩 하고 말았다.  

그가 몸을 던진 강선대는 100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지만 현재 수몰되어

아쉽게도 볼 수가 없지만 가뭄으로 물이 빠지면 볼수 있다고 한다.  
두향의 사랑은 한 사람을 향한 지극히 절박하고 준엄한 사랑이었다.

 

 

 

옥순봉 아래에 있는 두향의 묘다. 무연고로 있던 것을 소설계의 큰별 정비석이 발굴하여 세상에 알려젔으며 댐으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정비석이 단양 군수에게 청해서 좀더 높은 곳으로 이장 했다. 

 

그때 두향이가 퇴계 선생에게 주었던 매화는

그 대(代)를 잇고 이어 지금에 안동 도산서원 입구에 그대로 피고 있다.

눈 속의 매화 설중매(雪中梅) 얼마나 멋진 말인가? 

천지는 눈 속에 하얗게 얼어붙었는데 홀로 꽃을 피우니. 

예전의 선비들은 설중매를 좋아하고 또 스스로 설중매이고 싶어 하였다. 

설중매는 선비의 표상일 뿐만 아니라 

여인의 마음까지 사로잡아 기생도 다투어 제 이름을 설중매라 하였다.

 

지금도 단양에서는 해마다 두향을 기리는 두향제가 열리고 있다.
퇴계와 이별할 때 두향이 주었던 매화는 그 대(代)를 이으면서 지금도 안동 도산서원 입구에서 해마다 꽃이 피고 있다.
혹여 도산서원 매화를 볼 기회가 있다면 두향의 사랑을 생각하며 한 번 유심히 바라볼 일이다

 

강선대

단양에서 서쪽으로 약 8㎞ 지점의 가은암산(可隱岩山) 아래에 큰 바위로 이호대(二皓臺)와 마주보고 있다.

바위 높이는 약 15m로 층대(層臺)를 이루는데, 그 위에 100여 명이 앉아서 놀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충주호에 잠겨 물이 많을 때는 볼수 없지만 담수량이 줄어들면 넓다란 바위가 드러난다.

이곳은 조선시대의 거유(巨儒)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재임중에 두향(杜香)이라는 기생과 정을

나눈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황이 풍기군수로 전임한 뒤, 두향은 강선대 아래에 초막을 짓고 이황을 그리워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이곳에 묻혔다. 충주댐을 건설하면서 두향의 무덤을 강선대 위쪽으로 이장하였으며,

매년 5월 단성향토사연구회에서 그의 넋을 기리는 두향제(杜香祭)를 지낸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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