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의민황태자비 이방자여사
한국 왕실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들어 보았나요?
조선 27대 왕, 순종(李拓)은 1910년 한일합병 조약으로 왕좌를 내 놓는다.
26대 왕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 이은(李垠)은 황태자(영친왕)로 책봉되어
왕좌없는 나라의 유일한 왕위 계승자가 된다.
그리고 일본에 의해 일본 여인 마사코(方子)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게 된다.
영친왕 이은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일본 육군 중장에 이른다.
이방자 ...출신은 분명 일본인 ... 근데, 이 분의 스토리가 꽤나 드라마틱하다.
그녀는 일본국왕 메이지의 조카 모리마시 친왕의 딸로 원래 히로히토 왕사제 妃로 정해 졌었다.
그러다가 한일 정략에 따라 일본에 볼모로 붙잡혀와 일본육군 사관학생이던 영친왕과 약혼을 한다.
마사코가 나중에 일본 천황이 된 히로히토의 왕비가 되지 못하고 멸망한 조선 왕조의 영친왕과
결혼 하게 된 데에는 내막이 있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은 그렇게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일본 천황의 황태자비 간택에 앞서 3명의 후보 중에서 마사코는
후손을 낳을 수 없는 임신할 수 없는 육신이라는 일본국의 은밀한 진단이
있었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일본 왕족을 한국 왕족과 혼례시켜 한국의 왕가 혈통을 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었는지 1921년 아들 진(晉)을 낳고 1922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아들 진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그러나 1931년 다시 아들 구(玖)를 얻고 행복한 생활을 했으나 1945년 해방이 되어 귀국하고자 했으나
국교 단절 및 한반도에 새로 생긴
이승만 정부는 정권 유지를 위해서 영친왕 부부의 입국을 거부하게 된다.
여기서 정권 유지란 말은 어부지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일본을 싫어하는 이승만 대통령이
패망한 조선을 미워하는 그런게 더 있지 않았었나 생각이 된다.
결국 그녀는 일본의 패망으로 황족의 특권이 상실되고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 되어서
1963년까지 일본에서 보냈다.
그 후 1963년 11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부인 이방자와 함께 귀국한다.
한편 영친왕은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시달리면서도 1966년 오랫 동안 숙원이던
심신장애자의 재활원인 자행회를 설립하고
1967년에는 그의 아호를 딴 신체장애자 훈련원 명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다
1970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생면부지 한국에 마지막 황태자비란 이름만 짊어진 채 육순의 할머니 이방자는 홀로 남았다.
그러나 그녀는 일본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1968년 정부의 마지 못한 배려로 들어가게 된 창덕궁 낙선재에서 마지막 생을 마칠 것을 결심한 것이다. 그녀는 일본 황족의 딸이 아니라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로 자신을 세웠다.
이방자는 순정효 윤황후( 순종妃) 를 모시고
정신 질환에 시달리던 또한 명의 망국의 희생자이자 시누이인 덕혜옹주를 돌보면서 낙선재에 끝까지 남았다. 그리고 그녀는 남편이 못다한 꿈인 사회복지사업을 시작한다.
이때 이방자가 시작한 사회 사업은 우리나라 사회복지 사업의 기틀을 닦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방자는 사회의 어둡고 어려운 곳이라면 거침없이 손길을 뻗었다.
그녀 자신의..운명적인...비극적인... 삶을 잊고자 함 이었을까?
아니면 아름다움으로 승화 시키고자 함이 었을까?
장애자들을 위한 많은 봉사활동과 함께 문인화, 서예, 자수, 편물, 도자기에 그림을 직접 그려 넣기도 하였다.
그녀는 조선왕족의 단절을 꾀한 정략 결혼의 희생자이기는 했으나,
이방자여사는 "내 조국도, 내 묻힐 곳도 한국" 이라는
신념으로 봉사를 해 왔으며 황족이자 평민이었고
일본인이자 조선인 이었으며
조선의 몰락과 일본의 패망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황태자비의 대접도 받지 못한 채 오로지 사회봉사의 신념으로 동분서주하며 남편의 유업을 이어가던 중
한국에 돌아온지 15년이 되는1989년 4월 30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88세에 지병으로 비운의 일생을 마치고
경기도 남양주시 홍류릉의 영친왕 묘소에 합장되었다. 영휘원
서울특별시문화상, 적십자박애장 금장, 5·16 민족상,
국민훈장 모란장, 소파상 등을 받았으며
저서로 《지나온 세월》 《세계는 하나 The World is one》 《세월이여 왕조(王朝)여》를 남겼다
이방자의 아들 이구씨는 줄리아 뮬럭이라는 미국 여성과 결혼하지만 오래 살지를 못하고
이내 이혼하였고 슬하에 자식은 없다..
직계 왕손이 없다는 뜻이다.
이게 바로 단절되는 조선국의 비운이 아닐 수가 없다
우리나라 사회복지 사업의 기틀을 만드신 분으로 높이 평가하며 한많은 인생을 살아 오신 그분의 일생을 돌아 보는 시간을 갖는것도 하나의 배움이다 사진 -> 아들 이구와 황세자내외
비운의 왕비 이방자여사외 영친와의 이야기는
그들의 만남이 너무 애절하고 사연이 깊어서 드라마와 영화로 여러번 만들어졌다
한편 생전에 장애 교육에 앞장선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의 동상이
이 여사가 1973년 설립한 경기 수원 장애인 교육기관 자혜학교에 2015년 5월에 세워젔다. 정리작가 kns
홍유릉에 있는 영휘원
영친왕비를 이방자(李方子)여사라고 흔히 부르는데 이방자 이름은 일본식이름
마사코(方子)에 신랑의 성(姓) 이(李)를 붙여 것이다
그러나 황태자와 혼인한 것이므로 의민황태자비로 부르는 것이 옳다. solsae k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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