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서/야담설화

길상사 자야김영한 그리고 백석

시인김남식 2016. 3. 14. 13:41

길상사 그리고 백석과 김영한 솔새김남식    

 

청와대 뒷길....  왜 있잔아 ~

삼청동에서 북악 스카이웨이로 올라 가는 길에서 

삼청터널을 막 넘어가면 북악산 자락이 끝나는 성북동 기슭에 자리한 길상사

사월 초파일이 되면 자주 입에 오르 내리는 성북동 길상사

처음 가 보는 사람들은 자유 분방한 분위기와 규모에 좀 놀래기도하지. 
이곳은 한 때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 대원각이 있었다오.

군사문화의 서슬이 시퍼렇던 1960년대말 삼청각과 청운각이 최고급 요정이었지.

 

요정 妖精이 뭐던가?
술과 음기(淫氣)를 팔던 자리가 부처님 섬기는 곳으로

사찰(寺刹)로 변한 것이 좀 의아하지만
그것도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이라면 인연이라고 하는 걸세.
불가에서 가장 성스럽게 치는 연꽃은 가장 더러운 진흙에서 피지 않던가 말이네.

대원각과 길상사에는 다 그만한 사연이 있었네.

그리고 자야김영한과 詩人백석과의 인연을 문인들 입에서 아직도 부럽게 오르내리고 있지  

 

길상사 이 절은 대원각 요정의 주인 이었던 김영한(불명 吉詳花)이 죽기 전

그 유명한 법정 스님에게 기증하여 절로 탈바꿈한 곳이다.
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사찰(寺刹)인 길상사  
이 사찰의 이름은 그녀의 법명인 길상화(吉祥華)를 본 따서 길상사(吉祥寺)로

명명(命名)했던 것이다.

 

 -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길상사 (吉祥寺)

 

김영한 (1916 ~ 1999년)

기명(技名)은 진향(眞香)이고 필명은 자야(子夜)로 백석이 애칭으로 붙혀준 이름이다
그녀는 시인 백석을 지독히 사랑했던 기녀이며
백석 또한 그녀를 위해서 많은 연애詩를 썼다고 전한다 
백석이 북으로 떠난 후 38선 때문에 그와 생 이별한 그녀 김영한은

북으로 떠난 백석을 잊기 위해서 혼자 대원각을 냈다는 소문이었지
그래서 성북동 배뱉골을 사들여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을 일군어 낸 여걸이었지만
백석이 죽도록 보고 싶으면 그녀는 줄 담배를 피워 댔다고 하더이다.

 

그 담배 연기가 이 가련한 여인을 그냥 놔두겠는가
글씨~ 기어이 그녀를 폐암으로 몰아 넣었다는군 
죽음이 임박해 지자 김영한은 자신이 운영하던 요정은 절(寺) 에
주머니에서 자신이 만지던 현금 2억원은 "백석문학상" 기금으로 내 놓는다.
그리고 '내사랑 백석' (1995년 문학동네)과
'내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 (창작과비평)을 출간하게 된다

 

어느날 기자가 찾아가서 물었대
시주로 1,000억을 내 놓았는데 후회되지 않냐고
그랬더니 무슨 후회? 라고 반문 했다나봐!
-그 사람이 언제 제일 생각나냐고?
그랬더니
-사랑하는 사람 생각이 나는데 어디 때가 있나!
그랬대요.
기자가 다시 물었대.
-그 사람이 어디가 그리 좋으세요?
- 1,000억이 그 사람의 詩 한 줄 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꺼야" 라고
  
               이생진詩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시인 백석을 사랑한 김영한)' 에서 

  

 

삶과 죽음에서 방황하며 죽는게 무어냐고 묻고 싶거든 

길상사를 찾아 가면 수목 우거진 언덕 한켠에 김영한의 비석 하나가 외롭게 서 있네.
삶이란 

그저 ~ 그 언덕 위로 불어 오는 바람같은 것 이라고... 

우리에 삶은 그저 스처가는 바람이라는 것이네.

그 바람을 세우지 못해 사람들은 오늘도 고뇌와 번뇌속에서 영욕을 채우고 있지.

 

그 여자 아니, 김진향 자야는 길상사가 문을 연지 2년뒤

1999년 초겨울 83세에 훌훌 ~ 서방 정토 세계로 떠난 여인으로

백석을 위해서 전생의 삶을 보낸 멋쟁이 여인이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앞 마당에 뿌려젔고

백석은 어찌보면 운 좋은 남자 임은 분명하다

사랑하는 여인 자야가 그를 평생 잊지 못 했으니 말이다.

 

- 길상사 내의 김영한(법명 吉祥華) 기념비

 

김영한 그녀는 가난한 탓에 나이 어린 신랑에게 몸이 팔려 갔으나

15살에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는 불운을 맞는다.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 그녀는

기생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그는 악착같이 돈을 벌었고 그리고 공부를 하여 1953년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미모의 기생이었다.

 

23살에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 유학까지 떠나게 되지만

스승이 투옥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 함흥 감옥으로 찾아 갔으나 만나지를 못하고

대신 함흥영생여고보(여자고등학교)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 갔다가

영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 1936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백석은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 
<오늘 부터 당신은 내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전 우리 사이 이별은 없어요>

함흥에서는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김영한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김영한이 서울로 돌아가자 백석은 아예 그녀 때문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 일보에 근무하게 된다

그리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3년간 동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이 못 마땅하게 생각했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켰으나 신혼 첫날밤 부터 도망치기를 여러차례 하면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백석은 날마다 괴로워 갈등 하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만주로 도피 하자고 제의를 하게된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함흥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백석은 혼자 떠나게 되는데 그것이 영영 영 이별이 될 줄은 그들도 미처 몰랐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백석을

비운(悲運)에 빠뜨렸다고 김영한은 늘 후회하고 자책을 하며

살았다고 전한다. 

 

그 당시 백석의 심경을 나타샤를 인용하여 노래한 詩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대표적인 연애시가(戀愛詩歌) 라고 한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1937년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뱁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오막살이집)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소리없이)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가 한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부터 일생을 마치게 되는데

여기서 그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은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얼마나 행복할까?

 

 

백석(본명 백기행 1912 -1996년)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0년 조선일보에 詩를 투고 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백석은 잘생긴 얼굴과 젠틀한 성품이었고

게다가 청산유수의 말 솜씨로 미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댄디보이(Dandy Boy) 였다고 한다.
그러나 백석(白石)은 많은 여인들 중 자야(子夜)만을 사랑하였으며
백석에 아름다운 시(詩)는 시인과 기생의 정염(情炎)을 넘어서

깊고 넓은 그리고 애틋한 사랑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만주에서 고향 함흥으로 돌아 왔지만

영한은 이미 서울로 떠나 버렸고 다시 영한을 찾아 서울로 가려 할 때는

남북이 38선이 그어져 그들의 사랑은 이승에서 잇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바로 분단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서글픈 사랑으로 기록이 된다 

그 후 백석이 북한 체제에서 어떻게 살아 갔는지는 알려진바 없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월북한 탓에 그의 詩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교적인 영향을 받은 큰 시인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랑...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함일까?

김영한 그녀는 오로지 재산 모으는데 전념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돈을 모을수록 허전함은 더하고 모진 세월 마져 백석에 대한

사랑은 사그라들게 하지는 못했다.

생전에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안았다고 전 한다.
자야는 백석이 진정으로 사랑햇던 단 하나의 여인이었고.
그녀 또한 백석에 대한 그 사랑을 평생 올곧게(불사조같은 사랑)

간직했던 여인이였다

 

당시 백석은 김진향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평생 자신의 연인이었다

"자야"는 중국 당나라 詩人 이백의 詩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서역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애절한 女人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백석은 그녀에게 평생 동안 자신만을 생각하고 기다리라는 그런 의미였으리다

 

 

 

나는 지금도 젊은 그 시절의 백석을 자주 꿈에서 본다.

그는 나의 방문을 열고 나 가면서 아주 천연덕스럽게

 "마누라! 나~ 나 잠깐 나갔다 오리다"하고 말한다.

한참 뒤에 그는 다시 들어 오면서

"여보! 나 다녀왔소!"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럴 수 가 있는가?

세월을 반백년이나 흘러 보내었는데도 그녀는 눈물을 훔친다.

 

내 나이 어언 일흔셋

홍안은 사라지고 머리는 파뿌리가 되었지만,

지난날 백석과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은 아직도 내 생애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마음은 추호도 이해로 얽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순수 그것 이었다.

그와 헤어진 뒤의 텅 빈 세월을 살아 오면서 나는 차츰 말이 어눌해지고

내 가슴 속의 찰랑찰랑한 그리움들은

남이 아무리 쏟으려해도 결코 쏟기지 않던 요지부동의 물병과 같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의 시 전집이 발간 되었다는 소식은

지금껏 물병에 선 수십 년 동안 고였던 서러움이

저절로 콸콸 쏟아져 나온다.
월간 창작과비평 에서 출고 한 자야의 회고록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않는 이름' 의 전문에서

 

 

이제 두 사람은 모두 세상을 떠났으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그들의 사랑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리고 길상사 한 쪽에 기념비로 남아서

길상화(吉祥華)처럼 길(吉)하고 상서(祥瑞)로운 빛을 발(跋)하고 있을 것이다

사랑을 간직하는 데는 詩쓰는 일 밖에 없다고

김영한은 말 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녀는 국악계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으며 국악계는 김진향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女 僧  -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 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山절의 마당 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이 詩는 기구한 삶을 살다가 여승이 된

한 여인을 두고 쓴 것인데,

왠지 김영한과의 사랑을 미리 예언적으로 쓴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데

대입 시험에 잘 나오는 詩다 

 

 

사람으로 태어나 만고풍상을 껵으며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사람에게 지워지지 않은 이름으로 모든이에게 기억되는 사람으로 살아 간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삶이 빛나듯이

두사람에 사랑과 인생 그리고 문학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우찌하면 평생을 그렇게 올곧게 사랑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백석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최근에 백석의 시가 수능 시험에 출제한 것을 보아서는 월북 시인이라고 외면 했지만

아마 복원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solsae

 

세월이 흘러 길상사의 주인 법정스님도 입적하는 바람에 지금은 주인을 모두 잃은 절이 되었다.

마음에 혼란스럽고 허전하다면 가을 단풍이 떨어지는 어느날

길상사를 찾아가 한때 사랑했던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뇌이면서

내 인생을 한번 되돌아 보며 내게도 저런 추억이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하는 것도

인생의 참 뜻이 아닌가 사료된다. 글정리 솔새김남식

  

 

성북동 길상사

찾아가는길=>  4호선 한성대역 6번출구 마을버스 02번 승차, 길상사에서 하차. 15분소요

 

 

길상사는 창건한지 불과 몇십년밖에 안 되었기에 문화유산을 품은 古刹이 아니다

 

길상사가 있는 부잣동네 성북동 그곳 일대는 일반 서민이 생각하는 그런 곳은 아니다.

집집마다 엄청 사납게 생긴 도사견이 있으며

어떤 집은 담장 울타리도 이건 거의 영화에 서나 보는 중범죄 죄수들의 감옥 담장보다 더 높다.

 

 

 

 

저기도 사람이 살까? 산다면 어떤 사람들일까?

집안에 얼마만큼 금은 보화를 두었기에 저렇게 높은 담을 쳐 놓고 곳곳에 경비 카메라를 설치하고도

그래도 못 믿어서 사나운 도사견까지 있을까?

 

 

처음 1985년에 김영한으로 부터 자신의 재산을 희사해 절을 짓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법정스님은 이를 간곡히 사양 했으나 10년 가까이 찾아와 끈질기게 부탁하자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사찰의 창건주였던 법정 스님은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주었고 그래서 길상사라고 한다.

 

 

 

한편 법정 스님은 길상사는 한 번도 자기의 사찰이라 생각해 본적이 없어서

9년 동안 강원도에서 길상사에 오셔서 법회때 설법을 하시고 나서는 다시 강원도 벽촌으로 되돌아 갔으며

길상사에 자기 방도 하나 두지 않았고 주무시지도 않았다고 전한다.

 

 

 

경내에 있는 관음석상은 가톨릭예술가인 최종태가 건립한 것으로 본인이 제작한 혜화동 성당 석상과 닮아 있다.

 

 

백석은 김진향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평생 자신의 연인이었다
"자야"는 중국 당나라 詩人 이백의 詩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서역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애절한 女人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백석은 그녀에게 평생 동안 자신만을 생각하고 기다리라는 그런 의미였으리다

 

길상화 보살님 사당

 

 

길상사 경내에는 功德主 김영한의 공덕비와 함께, 법정스님의 영정과 생전 유품을 전시한 기념관도 마련되어 있다.

 

 

길상사에 가시거든 그냥 사진을 찍고 절을 구경하고 그러는것도 중요하지만 백석과 자야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그 시절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고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깨닫고 돌아오길 바랍니다. solsae 

 

 

길상사 방문하기 좋은시기 = 꽃들이 한창인 5월이나 단풍이 짙어가는 10월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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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blog.daum.net/_blog/hdn/ArticleContentsView.do?blogid=03Ou5&articleno=16058071&looping=0&longOpen=

 

2. http://blog.daum.net/_blog/hdn/ArticleContentsView.do?blogid=03Ou5&articleno=16057489&looping=0&longO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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