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서/야담설화

이매창

시인김남식 2016. 5. 9. 20:09

'이화우 흩날릴제' 이매창             솔새김남식

 

이매창(李梅窓 1573년 ~ 1611)은 전북 부안 출생의 명기로 자는 천향 (天香)

본명은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 이었기에 계생(癸生) 또는 계랑(癸娘) 향금(香今)등 여러가지로 불렸다. 

아호는 매창(梅窓)으로 달빛 젖은 매화를 무척 좋아해서 아호를 매창으로 했다고 전함


조선 선조 때의 기생이며 여류 시인인 이매창은 부안 현리였던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기생이 되었는데 이로 보아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부안의 명기로 한시 70여 수와 시조 1수가 전해지고 있으며 시와 가무에도 능했을 뿐 아니라

정절(貞切)의 여인으로 부안 지방에서 400여년 동안 사랑을 받아 오고 있다.


그후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외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1668년(현종 9년) 부안 개암사에서

판각(板刻)해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간행 하였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 보아도 한 여인의 시집이 이러한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고 전한다


묘앞에 있는 지석은 名妓이매창이 아니라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로 적혀 있었다

이름난 규수(閨秀)라는 것이다


이화우

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

윗 시조는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유희경을 떠나 보내고 그를 그리며 지었던 시조이다.

기생의 사랑은 헤어짐을 전제로 하기에 더욱 애달픈 것이다.


숙명적인 사랑 앞에서 이별해야 했던 님

한줄기 실바람 같은 연민이

겨울을 이겨낸 때 이른 봄햇살이 되어 내 가슴속으로 애잔함으로 스며든다

.

님에 대한 잊지 못 함과 애절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시로써 이화우는

배꽃이 마치 비처럼 내리는 현상 즉 배 꽃 적시는 비를 말하며

천리란 뜻은 정감의 깊이를 나타내며 아마 정이 애닯도록 사무침이랄까

그래서 사랑은 위대한거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임 생각

애끓는 情 말로는 할길 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반 남아 세였고나

생각는 情 그대도 알고프거던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그녀는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 났으며, 부안(扶安) 기생으로써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매창의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있는 것이며 시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하는 데서 그의 우수한 시재(詩才)를 엿 볼 수 있다

또한 매창의 시는 재치와 정감이 있으며 우리의 정서를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는다.


매창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깊이 정을 나누었던 유희경이 한양으로 올라간 후

소식이 없자 시를 지어 받치고 수절했다고 전하는데 당시 매창과 유희경의 나이 차는 무려 28살 였다.


   

憶故人 옛 님을 생각하며

春來人在遠춘래인재원   봄이 왔다지만 임은 먼 곳에 계셔

對景意難平대경의난평   경치를 보아도 마음이 편치 않다오,

鸞鏡朝粧歇난경조장헐   난새 거울에 아침 화장을 마치고

瑤琴月下鳴요금월하명   달 아래에서 거문고를 뜯는다오.

 

看花新恨起간화신한기   꽃을 볼수록 새로운 설움이 일고

聽燕​舊愁生청연구수생   제비 우는소리에 옛 시름 생겨나니,

夜夜相思夢야야상사몽   밤마다 그대 그리워하는 꿈만 꾸다가

​還驚五漏聲환경오누성   오경 알리는 물시계 소리에 놀라 깬다오



유 희경(劉 希慶 1545~1636 년)

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민병을 모아서 관군을 도왔으며 광해군 10년(1618년) 조선 시대의 3원흉이라 일컫는

이이첨이 "폐모 상소를 올리라" 고 하자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절교한 후 은거 하다가

1623년 인조가 왕위에  오른뒤 절의(絶義) 표상으로 가선대부()로 품계를 올려 주었다

그는 조선 중기 천민 출신의 시인으로 漢詩를 잘 지어 당시의 사대부들과 교류했으며

문집으로 촌은집(村隱集) 3권과 상례초(喪禮抄)가 있다.




매창과 유희경의 러브스토리


1591년 따뜻한 봄날, 유희경은 부안에서 매창을 처음 보게 된다.
당시 유희경의 나이는 47세이고, 매창은 19세였다.
유희경은 소문으로만 듣던 매창도 만나볼 겸 부안으로 내려 갔다.
매창은 시를 잘 짓고 거문고도 잘 타는 기생으로 서울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유희경도 여항(閭巷)시인으로 유명했던 터라
시를 좋아하고 본인도 시를 썼던 매창 역시 유희경을 알고 있었다.


유희경은 김제부사 이귀(1557~1633)가 매창을 불러 마련한 술자리에서 처음 대면하게 된다

매창 역시 평소 시를 통해 흠모의 정을 품었던 유희경을 마주하게 됐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두 사람은 시와 거문고로 풍류를 즐기며 서로 마음을 주고 받았다.
이날 이후 두 사람은 꿈같은 나날을 보내게 되나 길게 가지는 못 했다.
이듬해 봄 임진왜란이 일어나 유희경이 권율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한양으로 가야 했다
이별을 하는 날 매창은 이별하기 싫은 마음을 담은 시 ‘자한(自恨)’을 짓는다.


‘봄바람 불며 밤새도록 비가 오더니 버들잎과 매화가 다투어 피었구나
이런 봄날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술동이 앞에 놓고 임과 헤어지는 일이네
마음속에 품은 정을 말하지 못하니 그저 꿈인 듯하고 바보가 된 듯하네


유희경은 의병으로 전장을 누볐고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못 잊어 그리워하나
만나지 못하자 두사람은 그리움을 편지로도 주고 받지 못한 채
각자 시로 마음을 달래야 했으며 매창의 ‘이화우(梨花雨)’가 이때 태어난다.


이화우 흩날릴 때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임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유희경도 매창을 향한 마음이 절절할 수밖에 없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라는 시를 지어 마음을 달래이고
‘도중억계랑(途中憶癸娘)’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계랑은 매창의 원래 이름이다

.

임과 한 번 헤어지니 아득히 멀어져 나그네 심사 어지럽기만 하네
청조도 날아오지 않아 소식조차 끊어지니
벽오동에 찬비 내리는 소리 견딜 수 없어라



두 사람이 헤어진 지 16년이 흐른 뒤 1607년에 다시 만나게 되는데............
당상관이 된 유희경이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에 잠깐 내려왔던 모양이다.
이때 매창의 나이 34세, 유희경은 62세였다.
노인이 된 유희경은 매창을 만나 열흘간 함께 지내며 회포를 풀게된다.
그러나 유희경이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이 회포를 풀 수 있는 날이

너무 짧았기에 매창은 이별을 하는 날 ‘별한(別恨)’ 詩를 남긴다.


임 떠난 내일 밤이야 짧고 짧아지더라도
임 모신 오늘 밤만은 길고 길어지소서
닭 울음소리 들리고 날은 곧 새려는데
두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네


유희경이 서울로 가버린 후 매창은 병으로 누워서 병중(病中)’이라는 시를 남긴다.


이것은 봄을 슬퍼하는 병이 아니요 다만 임을 그리는 탓일 뿐이네
티끌 같은 세상 괴로움 하도 많아 외로운 학이 못 떠나는 심정이네
어쩌다 그릇된 소문이 돌아 도리어 여러 입에 오르내리네
부질없는 시름과 한으로 병을 안고 사립문 닫네


유희경도 매창과 헤어져 한양으로 간 뒤 매창에게 시 ‘계랑에게(寄癸娘)’를 지어 보낸다


‘헤어진 뒤로 다시 만날 기약 아직 없으니
멀리 있는 그대 꿈에서나 그리워할 뿐
어느 때 우리 함께 동쪽 누각에 기대어 달 보며
전주에서 술 취해 시 읊던 일 이야기하려나


그러나 유희경과 헤어지고 3년 뒤인 1610년 여름 애지중지하던 거문고를 함께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38세로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매창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시다.


도원에서 맹세할 땐 신선 같던 이 몸이 이다지도 처량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애달픈 이 심정을 거문고에 실어볼까 가닥가닥 얽힌 사연 시로나 달래볼까
풍진 세상 시비 많은 괴로움의 바다인가 깊은 규방 밤은 길어 몇 해인 듯하구나
덧없이 지는 해에 머리를 돌려 보니 구름 덮인 첩첩 청산 눈앞을 가리네’


뒤늦게 매창의 죽음을 안 유희경은 슬퍼하며 만시(輓詩)를 남긴다.


맑은 눈 하얀 이 푸른 눈썹의 계랑아 홀연히 구름 따라 간 곳이 묘연하구나
꽃다운 혼 죽어 저승으로 돌아가는가 그 누가 너의 옥골 고향 땅에 묻어주리
마지막 저승길에 슬픔이 새로운데 쓰다 남은 화장품에 옛 향기 그윽하다
정미년에 다행히 서로 만나 즐겼건만 이제는 애달픈 눈물 옷깃만 적시네


매창은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그녀가 아끼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매창이 묻힌 뒤 사람들은 이 공동묘지를 ‘매창이뜸’ 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가 죽은 지 45년 후인 1655년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고

그후 13년이 흐른 뒤 그녀의 시집 ‘매창집’이 나왔다.

.


매창의 애절한 시 몇편

1. 평생에 기생된 몸 부끄러워라 달빛 젖은 매화를 사랑하는 나.

    세상사람 내 마음 알아주지 않고 오가는 길손마다 직접거리네.

 

2. 남쪽나라 바다 위에 앉았던 님 대숲 그늘 암자에서 만났던 님

    그리운 그 님은 지금 어디 있는고 검은 머리 붉은 얼굴 꿈속에 보이네.

 

3. 송백같이 굳은 맹세하던 날은 사랑이 깊고 깊어 바다였건만

    한번 가신 그 님은 소식이 없어 한 밤중에 나 홀로 애를 태우오.

 

윗 글은 기생의 몸인 자신을 어둠속에 핀 매화로 표현한 글이며

그 아래 글은 대나무 밑에서 사랑하는 님을 만나고 소나무 같은 절개를 믿고

사랑을 맹세하던 님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라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녀가 묻힌 곳을 매창공원이라 하여 1983년 지방문화제 65호로 관리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부안문화원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매년 5월초 추모제례와 문화제가 열리고 있으며 내가 세번째 찾아 가던 날 마침 제례가 있었다.


현재 부안군에서는 부안 마실축제와 어울리는 이곳을 매창 "사랑의 테마공원" 으로 조성중에 있다.


이곳에는 유희경을 비롯하여 허균 마당 그리고 매창테마관과 사랑 광장을 조성할 계획으로

부안군은 석정문화 테마공원과 더불어서 부안이 시문학 중심의 문화예술지역으로 주목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비문은 허균이 매창에게 쓴 글이다.

허균이 매창을 처음 만난 것은 1601년 김제군수 이귀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허균은 매창을 사랑했지만 이미 情人 유희경이 있음을 안 그는 매창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詩友로써

플라토닉한 사랑을 했다고 전 하는데 그 마음이야 온당치 않았을 것이다.


허균(許筠, 1569년 ~ 1618년)

조선중기 문인 학자, 작가, 정치가, 시인.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광해군때 대북에 가담하여 실세로 활동했으며 1617년(광해군 10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 가담하여

신분제도와 서얼차별에 항거하려고 서자와 불만하는 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이를 비판하던 기자헌을 제거 하려다가 역으로 밀고 당해서 반역죄로 능지처참 되었으며 

이때 아버지도 부관참시 당 했으며 가족이 멸종되다시피 하였다. 홍길동전, 엄처사전, 장생전등을 남겼다



매창공원 한 켠에 위치한 판소리 명창 이중선 묘

 

명창 이중선은 언제 어디서 누구의 딸로 태어났는지 잘 모른다.

다만 그가 전라도 어느 경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나 1920년대 이 땅의 실의에 빠진 겨레혼을 소리로 달래고 가락으로 부추기다가

몸과 마음을 한바탕 소리로 불사르고 겨우 서른을 넘긴 꽃다운 나이에 한 방울의 이슬처럼 사라져간 명창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뿐이다.



중선의 언니 화중선은 당대 최고 명창으로서 특히 춘향가 중의 사랑가를 잘 불러 

사람들의 얼을 사로잡을 때 중선은 애절한 흥타령과 육자백이 가락으로 우리의 한을 달래주었다.

중선이 언니와 함께 이 나라 방방곡곡의 소리마당을 누비다가 1932년 부안읍내 어느 골방에서 한많은 생애를 마치자 나라 안의

모든 명기 명창들이 소복차림으로 상여채를 메고 소리장으로 애도하니 원근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슬픔을 함께 하였던 일은 지금도 이 고장에 전설처럼 전해온다. 


중선이 간지 56년 봄가을로 꽃 한송이 술 한 잔 따르는 사람이 없으니 묘석은 마멸되고 가시덤불은 묘를 덮어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이에 이 고장 국악 동호인들이 뜻을 모으고 국악협회부안지회장 김종락님이 주선하니 인간문화재 박동진 김소희 박귀희 여사등

많은 국악인들이 뜻을 같이하여 이제 묘역은 다듬어지고 돌비도 세워졌다.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한많은 세월을 살다 가버린 우리의 명창 이중선은 삼가 이곳에서 편히 쉬시라. 서기 1988년 4월



小說 기생매창 윤지강 지음 2013년출판

얼마 남지 않은 죽음을 예감한 매창이 평생 마음에 품었던 유희경에게 전하는 연서나 다름없는 미완성 행록을 남겼다는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고결하게 피어난 사랑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매창과 유희경이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해 서로에 대한 마음을 감춰야 했던 사랑 이야기와 함께, 조선시대에 ‘기생’으로

살았던 여자 매창의 내면까지 들여다본다.



유희경 시비

유희경은 당시 도봉서원 창건시

전반적인 책임을 맡았으며 도봉산의 산수를 사랑해 말년에
도봉서원 인근에 ‘임장(林葬)’을 짓고 머물렀다 하여
도봉역사 인물의 문학성을 널리 알리고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도봉산 생태공원 내에
유희경·이매창 시비를 설치하였다.


본래는 하나였으나 어쩔 수 없이

헤어진 두 사람의 순고한 사랑과

그리움을 나타내기 위해 빗각 모양을
시비에는 유희경과 이매창이 생전

서로를 그리워하며 주고받은 대표적인 시 ‘매창을 생각하며’와

‘이화우 흩날릴때’ 를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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