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書/산문꽁트

해운대 엘레지

시인김남식 2015. 8. 3. 10:57

해운대 엘레지  솔새김남식

 

 

부산가는 고속버스에 내가 타고 있었다는 건 차가 톨게이트 입구에서 고속도로 티겟을 뽑기 위해서 잠시 머뭇거릴 때였다. 내가 어찌해서 이 버스를 탔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하지만 자다 말고 허겁지겁 일어나서 지하철을 타고 무심코 내린 곳이 강남 터미널이었다. 부랴부랴 버스표를 사고 그리고 버스에 올랐다. 바쁜 직장 생활에 늘 피곤함이 엄습해오니 떠나봐야 갈 곳 없는 내가 아니던가 말이다. 엊저녁 선잠을 잔 까닭에 잠시 졸은 것 같았다. 눈을 떠 보니 버스가 어느덧 추풍령 휴게소에 도착해서 사람들을 내려놓고 있었다. 잠시 머리가 멍하다. 시간을 보니 시계는 오후 1시를 지나고 있었다. 아직은 빈속인지라 간단히 요기도 할 겸 휴게소에 들어가기 위해 차에서 내리면서 버스 기사에게 물었다.

      "기사님! 몇 시에 부산 도착하나요?"

      "3시 반 도착입니다."

 

 

 

 

 

1.

어느 해였던가? 몹시 추운 그 겨울 어느 날 나는 그녀에게서 한통의 편지를 받는다. 더 늦기 전에 만나야 한다고 보고 싶다며 내게 와 줄 수 있는지를 물어 보는 내용 이었다. 사랑을 하면 행복해야 하는데 왜 자신은 아파야만 하는지 이런 사랑이라면 차라리 접어야겠다고 거리를 두고 있었던 그 사람 이였다.

나는 그녀에게서 온 편지를 몇 번을 읽고 또 읽어 본다. 결국 갈등 속에서 잊어야 한다고 중얼거리면서 백지위에 그려진 그녀의 얼굴에 가위표를 마구 그어 대다가 날 밤을 새고 말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내가 열차에 몸을 실었다.

 승강장 홈은 새벽안개 속에 그리움을 걷어 내고 외투 깃으로 스며드는 겨울바람이 성급하게 내 등을 떠밀고 있었다. 그래 떠나 가 보는 거다. 부산행 무궁화 열차표 한 장 주세요. 겨울의 시작인 12월 때 이른 혹독한 추위가 엄습해 오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열차의 소음은 그녀와 나 사이를 점점 멀어지게 하는 것 같이 들려 왔다. 하얀 입김 속에 번지는 그리움처럼 차창을 뚫을 듯 함박눈은 밖에서 유리창을 거세게 때리고 있었다.

 

그리고 뺨에서 흐르는 눈물처럼 차창 안쪽 창가에는 주르륵 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제 밤 왜 내가 그녀의 사랑을 붙잡지를 못 할까? 혹시 다른 곳에서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밤새 망설였던 바보가 아니었던가? 뿌연 유리창 위에 그녀에 이름을 적어 본다. ‘PMS’ 그러나 차안의 열기 때문에 습기가 유리창으로 흘러 내려와 이름이 곧 지워진다.

열차를 타러 나오는 길에 그녀에게 주려고 몇 송이의 꽃을 샀다. 안개꽃에 쌓인 붉은빛 장미는 하얀 눈과 대조를 이루어서 붉게 타고 있었다. 내손에 꽃이 들려진 게 얼마 만인지 새삼 탁탁해진 내 마음을 다독여본다. 밤새 설친 잠은 열차 속에서 세상 모르 게 곤히 자고 있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검표원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손님, 열차를 반대 방향에서 승차 하셨군요."

검표원의 말에 난 무표정하게

"알고 있습니다. 목적지가 방금 변경이 되었거든요”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던 길이였다. 그러나 힘든 사랑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다. 서울을 출발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대전까지 내려 왔고 무언가를 잊은 것 같은 느낌에 그녀를 놓아 주는 것도 사랑이라는 생각에 나는 열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대전역 승강장 홈에서 칼국수로 잠시 추위를 녹이고 홈에서 서성거리다가 부산에서 올라오는 상행선 열차로 다시 바꿔 탔던 것이다. 나 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기에 그녀의 행복을 빌어야 했다. 보내 주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 하였다. 서울에서의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지난 봄 부산으로 내려 간 그녀였다. 곧 결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말고 이제 짐을 덜어 주고 싶어서였다.

하찮은 일까지도 오해의 연속이었고 그 사랑이 너무도 나를 힘들게 하였기에 우리는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 했었다. 그녀는 아마도 나의 지지부진한 판단에 싫증을 느낀 것 같기도 했었다. 내가 그녀에게 청혼을 해주었으면 했지만 내게는 그 당시에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었다. 그녀에게 비밀로 이야기하지 않은 게 있었다. 바로 아버지가 오랜 병석에서 고생하고 있다는 것과 그래서 동생들 학비까지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 그리고 결혼을 하여도 방한 칸, 얻을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을 차마 그녀에게 이야기 하지 못하였다. 내가 이런저런 이유로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 했을 때 그녀에게 실망하는 눈빛을 혹여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그녀의 어떤 대답을 듣기 전에 옹졸하게 내가 먼저 포기해야 하는 것은 내 자존심이었다. 사랑도 약간의 돈이 있어야 성립 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혼기를 꽉 찬 그녀였기에 내 청혼이 절실 했었고 나는 아무런 대책 없이 망 서리고 있었다. 그녀는 매번 만나면 그 문제로 짜증을 했었고 억측의 오해까지 만들게 해주었다. 그러던 차에 어머니의 성화에 그녀는 사표를 내고 결혼 한다며 부산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더 늦기 전에 만나야 한다고 보고 싶다며 내게 와 줄 수 있는지를 물어 보는 그녀에게 이미 결혼 상대자가 있다는 것을 통보한 것으로 나는 암시를 하고 말았다. 사랑의 패잔병이 되고 만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간의 그녀와의 사랑을 정리하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그해 겨울 부산 행 열차를 탔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의 만남 자체가 이제는 의미 없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부산 가던 길을 뒤 돌아서 다시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한 나의 부족한 탓이기에 사랑이란 혼자서 만들어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 서울역에 도착하자 꽃다발은 아직 채 녹지 않은 하얀 눈밭 위로 휭 하니 던져 버렸다. 때 이른 저녁 어둠이 내린 서울 거리에는 찬란한 네온 불빛이 누구를 유혹 하려는지 갖가지 재주를 부리고 있다.

어느덧 내 발길은 남대문 뒷골목 포장마차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길가에 있는 포장마차는 영하의 추위에 지나는 행인들을 집으로 가지 못하게 잡아 놓고 있었다. 포장마차 술집은 혼자서 독한 술을 물 먹듯이 혼자서 단번에 마시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다. 손님이 좀 한가한 어느 낯선 포장마차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소주 한 병을 큰 컵에 따라서 어묵 안주로 단숨에 들이 킨다. 그렇게 취해서 정신없이 집으로 들어 왔던 게 어느덧 벌써 20년의 세월도 더 흘러갔다.

 

 

2

그리고 지금 고속버스로 부산에 내려가는 길이다. 그녀의 친구에게 며칠 전 뜻밖에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역업을 하던 남편이 사업 부진에다 설상가상으로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몇 달 째 혼미 상태라고 한다. 오랜 투명으로 병실 방문하는 가족도 친구도 모두 외면 한다고 전해준다. 그간 그녀의 소식을 간간히 친구에게서 듣긴 했지만 이미 지난 일이기에 애써 귀 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었다. 그녀의 친구는 나와 옛 직장 동료이다. 그녀는 사내 결혼을 했으며 남편도 내가 알고 있는 옛 직장 동료이다.

나와 그녀 그리고 그녀의 친구와 남편 우리 네 사람은 사이좋은 친구가 되어서 공개적으로 돌아다녔기에 다른 사람들이 참 많이 부러워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각자 다른 삶을 찾아서 서로 다른 회사를 다니고 있다. 일 년에 한 두 번은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지만 옛날과는 달리 그리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그녀의 친구는 그녀의 남편 와병을 나한테 알려 주고 싶었지만 20년도 더 지난 일이기에 하며 차일피일 미루고 망설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힘들어하는 친구를 볼 때마다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 누군가 있어야 겠다고 생각해서 내게 알려 주었다고 한다. 언젠가 보고 싶다고 와 달라고 했던 그 어느 해 그 겨울 그때처럼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혼자서 며칠 속을 끓이고 있었다. 한번 가봐야 하지 않을까 행복해야 하는데 바보같이 왜 그런 일이 있을까 밤새도록 연민의 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얀 백지위에 그녀에 이름을 또 적어 본다. 예전처럼 섰다가 지우고 다시 쓰고 그러다가 늦잠을 잤다. 그리고 날이 새자 그녀 친구가 알려준 전화 번호 하나만 들고 허겁지겁 뒤늦게 고속버스로 서울을 출발 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추풍령 휴게소에서 그녀에게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지금 부산 가는데....”

전화선을 타고 20여년 만에 들려오는 첫 소리는 그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그간 궁금했었고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다는 말 대신에

"어떡하니 기운을 내야지. 밥은 먹었어?"

라고 그녀를 위로 해 주었다. 회사 일도 바쁜데 뭣 하러 일부러 부산에 내려 오냐고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나를 기다린 듯한 애련한 목소리가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어떤 인연의 고리를 엮지 못하고 각자가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다하여도 내가 얼마나 그동안 그녀의 안부에 냉정했나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헤어진 사이도 아닌데 내가 부족해서 그녀를 잡지 못한 건 순전히 내 탓인데 왜 그녀에게 모른 척을 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버스는 어느덧 부산 터미널에 도착 하였다.

아직 여름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2001년 광복절 휴일 부산 노포동 고속터미널로 그녀가 마중을 나왔다. 통통한 20대의 얼굴은 어디에 가고 핼쑥한 모습으로 낯설고 을씨년스러운 서먹한 분위기에 참으로 오랜만의 해후였다. 대뜸 마음 고생을 많이 했음을 얼굴에서 느낌으로 알 수가 있었다. 더위에 흘리는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쉴 새 없이 나를 보더니 폭포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이상한 눈빛으로 힐끔 처다 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물은 어딘가 모르게 나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느껴졌다. 그간 그녀의 행복을 내가 시샘을 해서 그런 게 아닌가 잠시 생각 하기도 하였고 아니면 이전에 그녀의 행복을 내가 왜 책임지지 못했을까 여러 가지 갈등이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미안해! 너무 늦게 왔지 내가~”

“아냐~ ”

“몸은 좀 어때”

입술이 바싹 마른 그녀를 위해 터미널 매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권했다. 20여년의 긴 세월이 지났지만 그녀 역시 오빠를 만난 듯 옛정은 서로가 그대로 있었다. 잠시 슬픔을 이기고 난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 내며 힘내라고 어깨를 두드리며 그녀와 함께 택시를 타고 대학병원을 찾아 갔다. 잠시후 부산에서 제법 큰 부산대학 병원에 도착하였다. 병실에 들어서니 의식도 모르고 누워있는 남편 그것을 보니 가슴이 무겁게 또 한번 내려 앉는다. 아무 할 말이 없는 나. 고연히 그녀의 남편이 미워진다. 병원생활 벌써 일 년을 지나서 이년이 다 되어 간다고 한다. 남편을 30여분 바라보는데 몰골이 측은해서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간 치료비가 많이 들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산소 호흡기를 쓰고 있는 그녀의 남편을 바라보니 환자 그 사람보다도 그녀가 더 불쌍해지는 건 왜 일까 그것은 그녀의 사랑이 아직은 남아 있기에 보내는 안타까운 동정이 아닌 가 생각해본다. 고등학교 다니는 딸애한테 병실을 맡기고 우선 그녀를 데리고 병원을 나왔다. 무언가 그에게 밥을 먹여야 할 것 같았다. 어디를 가야할지 몰라서 태종대 봉래산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산을 여행하면 누구나 꼭 들려야 할 곳으로 부산을 대표하는 해안 경관지로서 울창한 해송 숲과 함께 기암절벽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 태종대이다. 택시에서 내려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해변 길을 좀 걸었다. 그리고 좀 조용한 듯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까 처음 만났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그녀의 얼굴이 참 많이도 상해 있는 것 같았다. 간신히 밥 몇 숟갈을 뜨더니 그녀는 또 울음을 삼키고 만다.

“나 어떡해 응?”

“......”

“지수 아빠 잘못 되면 나 어떡해?”

지수는 병실을 지키고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큰딸 이름이다. 이럴 때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만 다시 꼭 잡아 주었다.

“그래도 기운을 내야지”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해”

“무엇보다도 보호자가 건강해야 하니까 밥 먹어야지”

하지만 그녀도 나도 밥한 그릇을 다 비우지 못하고 식당을 나왔다. 해풍바람이 시원한 듯

했지만 해 저녁 더위는 식을 줄 모르고 있었다.

 

 

3.

뜨거운 여름 태양이 뒤 늦게 서산으로 이글거리며 지고 있었다. 바닷바람을 쏘이러 가자는 핑계로 그녀를 해운대까지 택시를 타고 나왔다. 그간의 걱정과 시름을 잊으라고 시끄러운 시장터 같은 백사장에 왔지만 어디를 가도 피서객으로 해안가 까지 가득하였다. 난장판이 된 모래판의 피서객들과 장사꾼에 고성이 어우러져 들어 설 자리가 없었다. 참 행복한 사람들이다. 당신 분위기와 전혀 다른 이곳이 싫은지 술 한 잔 사 달라는 그녀를 데리고 기장으로 넘어 가는 달맞이 공원에 있는 '아무르' 라는 카페를 찾아 갔다. 해운대가 내려 다 보이는 그 카페는 언제인가 한번 부산에 내려 왔을 때 그녀와 함께 했던 곳이다.

라이브 카페로 내방 손님들에게 즉석 기념사진도 찍어 주고 벽난로 한쪽으로는 그 사진을 기념으로 전시하는 부산에서 제법 유명한 카페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 묻지는 않았다. 그녀 얼굴에서 아픔을 알고도 남았다. 환자보다도 자네가 몸을 더 챙기라고 그리고 앞으로 큰일을 당하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도 생각해야 한다고 했지만 내 이야기를 듣는지 안 듣는지 그녀는 맥주만 줄 곧 마시고 있었다. 남편 병간호로 자신에 심신이 많이 지처 있었는지 얼굴에 붉은빛이 감돌자 그녀는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당황하였다. 그리고 분위가 잠시 썰렁 해졌다. 부부의 연이란 아니 사람 팔자란 묘하구나 생각하며 참으로 도도하고 당당했던 그녀였는데 이렇게 참패한 모습으로 내게 나타나다니 불쌍하고 측은해 보였다. 잠시 내게도 눈물이 핑 돌았다. 언제였던가 부산으로 내려오라고 했을 때 그때 대전에서 내가 뒤돌아 오지만 않았었다면 어쩌면 지금의 그녀가 내 아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운명의 신은 그때 우리를 갈라놓고 지금은 이렇게 애절한 사연으로써 이 자리를 다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받아 드려야 한다."

"삶을 굳건히 해야 한다."

그녀는 내 잔소리가 듣기 싫은지 내 입을 손으로 막는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카페 앞마당에 있는 소나무 벤치에 앉았다. 멀리 해운대 백사장에서 혼란한 네온 불빛은 아직도 시끄러웠다. 바닷바람이 제법 시원하게 불어온다. 그리고 어딘가로 혼자서 가고 있는 밤배가 칠흑 같은 어두운 밤 바다 저 멀리에서 점박이 불빛으로 가물가물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내 무릎을 베고 곤하게 자고 있다. 맥주 몇 잔을 연거푸 마시더니 피곤해서 술이 취한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말 못할 고민과 걱정이 가득 하겠지. 남편 때문에 고생하는 그녀를 보니 애써 나와 상관없는 일이려니 하여도 가슴은 메어지게 아파져 온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그녀의 핸드백에서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다. 병원에서 고3 딸이 그녀를 찾는 전화였다. 우리는 남편이 아프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이제 그녀를 병원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 밤차로 지금 올라갈게."

"가지마. 조금만 더 있어 주면 안 돼?"

그녀의 눈에는 애원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있으면 자네가 더 힘들어"

"조금만 더 있어줘. 응?"

그녀는 이제 어린애처럼 다시 또 칭얼댄다. 아마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든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등을 어루만져 주며

"아픈 사람도 중요 하지만 자네가 몸이 성해야 돼.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을 해"

“.......”

“숙아! 미안해 큰 힘이 돼주지 못해서...”

"참! 마누라가 잘 해주지?"

"그건 왜 물어? 싱겁게?"

“그냥”

“..............”

“명희한테 자기 안부 간간이 물어보고 그랬어. 괜찮지?”

명희는 종종 내게 그녀의 소식을 알려주던 서울에 사는 그녀의 친구이다.

“그간 자기 나 안 보고 싶었어?”

"참! 이거 맛난 거 사 먹어."

그간 안 보고 싶었냐고 물어보는 대답 대신 나는 그녀에게 약간에 돈을 넣은 봉투를 내 밀었다. 극구 사양하는 그녀에게 이러면 나 다시는 너 안 보겠다고 으름장 하니까 마지 못해서 받는다. 부산역으로 나오는 택시 안에서 그녀가 내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댄다. 그리고 내손을 꼭 잡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심정을 어떻게 설명 할 수가 없었다. 생사의 기로선 남편과 20년 만에 만난 옛 연인사이에서 무슨 연정이 다시 살아날까마는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었다.

 


4

부산 역. 11시30분에 서울로 출발하는 부산 발 무궁화 열차 출발 20분전 두 사람은 부산역에 서 있었다. 그냥 왠지 그녀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떠나는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녀와 헤어지려니 서운한 마음에 눈물이 핑 돈다. 이 어려움을 그녀가 잘 이겨야 할 텐데 하며 나 혼자서 애써 마음을 삭혀 본다.

"나~ 그때~"

병원으로 그냥 가라고 했지만 그녀는 승강장 홈까지 따라 내려오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언제?"

"언제긴 언제야."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밝게 웃으며 그녀가 내 팔짱을 낀다.

"........"

"거짓말 이었어 결혼 한다는 거."

"........."

"그때 왜 부산에 안 왔어 바보같이."

“.......”

“몇 군데 선을 봤는데 다 맘에 안 들었어. 자기만한 사람이 없더라.”

".....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남편 간호나 잘 챙겨."

"그래서 부모님에게 인사 시키려 했는데, 왜 안 왔어. 응?"

"옛날이야기 지금해서 뭣해"

“자기는 그때 생각하면 꼭 바보 같더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녀의 투정에 나는 질책으로 응수했다. 그녀가 무안했던지 내 옷 깃을 툭 친다.

“...................”

"서울 올라가면 뭘 도와 줘야 할지를 한번 생각해볼게."

“자기가 그때 왔더라면 지금 내가 이러진 않겠지? 그지? 응?”

그녀는 잠시 발길을 멈추더니 내 얼굴을 처다 보며 얼굴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숙아! 얼른 병원에 가봐야지.”

애써 자신을 감추려는 그녀의 모습에 난 울컥 그만 눈물이 고였다

“자기가 곁에 있으니까 정말 고마워”

나는 그녀의 얘기를 건성으로 듣고 남편 걱정을 대신 해주었지만 그녀는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고 있었다. 찹찹한 심정으로 어떤 이야기도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다. 잠시후 우리는 열차 승강장 홈에 도착을 했다. 홈에는 시끌 법석한 피서 여행객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그녀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8월15일 광복절 날 그해 여름 서울로 출발하는 무궁화 열차가 곧 출발 하겠다고 안내 방송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가볍게 않아 주었다. 얼마간 정지된 상태에서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또 다시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숙아 미안해"

"........"

"마음 약하게 먹지 말고 아마 정성을 봐서라도 남편은 곧 일어 날거야"

"..........."

"나~ 간다..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고"

"고마워요"

"나도 기도 해 줄게. 좋은 일 있으라고.........그리고 용기 잃지 말고."

그녀가 열차 안 까지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언제 샀는지 음료수 캔 봉지를 내게 건네준다.

"자네가 먼저 몸 챙기고 밥도 잘 먹고 그래야 한다."

마치 내가 그녀의 남편 같았다. 열차 안은 온통 피서객으로 난장판이다. 이제 열차가 출발하겠다는 방송이 들려온다. 열차에서 이제 막 내리려고 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리자마자 열차는 부산역을 천천히 출발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열차를 따라 오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현석씨”

“미숙아”

불과 일이초 사이에 애절하게 이름을 부르고 어떤 말을 주고받았지만 열차는 우리들 마음을 따라잡지 못 하고 있었다. 승강장 홈 저 멀리에서 쓸쓸히 혼자 서 있는 그녀를 달리는 열차 안에서 바라보니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니 마구 흐른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도 지금은 아마 엉엉 울고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먼저 손을 흔들었고 나도 따라 흔들고 언제 다시 볼 수가 있을까 남편이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서 행복해야 하는데 남편 때문에 핼쑥해진 그녀가 불쌍해 보였다. 희미해진 옛 사랑을 오랜만에 만났지만 되살리지도 못한 채 자정을 넘기면서 서울로 출발하는 열차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고 말았다.

그녀와 하룻밤을 병원에서 지내며 위로도 해주며 말동무가 되어주고 싶었지만 내 맘은 허락지 않았다. 옛사랑이 퇴색해서 희미해진 것 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사실은 냉정하게 이 위기를 그가 스스로 딛고 일어나길 바랬다. 사랑의 굴레에서 헤어진지 꼭 20년 만에 오늘 오후 4시 부산에 도착해서 8시간의 재회를 하고 자정에 부산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5

서울로 가는 무궁화호 야간열차 해운대 광안리 해변의 열기가 열차 안으로 가져 온 것처럼 온통 반바지 차림의 젊은이들 천국 이였다. 시끄러워서 더 이상 눈을 붙일 수가 없었지만 나는 안주머니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꺼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즉석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다.

 

- 해운대 우체국에서 -     솔새김남식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는 우체국 앞에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이런저런 이야기 많지만 그냥 지나는 길이라서

많은 이야길 너에게 쓸 수가 없구나.

네온 불빛 속으로 퍼지는

해운대의 파도소리가 지금 들리지 않니?

밤 이면 더 유난히 크게 들리는

포말처럼 부서지는 파도

그것이 바로 내가 너에게 하고픈 말이다.

세상을 좀 더 넓게 보라고

삶을 좀 더 값있게 알고 있으라고

마음을 굳건히 하라고 너 에게 잔소리를 한다.

지금껏 지나온 길 보다

이제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더 많이 생각하라고

나는 너 에게 이 편지를 쓴다.


그가 일어서야 한다는 용기와 신념을 그에게 주고 싶었다. 밤잠을 설치고 새벽에 서울을 출발하여 어찌나 피곤했던지 잠시 내가 잠이 들은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바지 주머니에서 요란한 휴대폰 진동 소리에 잠을 깨운다. 그녀의 전화였다. 헤어진 지 몇 시간인데 벌써 전화일까 생각을 하면서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하며 급히 전화기 열었다. 다급한 목소리의 그녀였다. 남편이 갑자기 이상해서 응급실로 들어갔다고 전 한다.

".........이제 나 정말 어떡해."

"그럴수록 불길한 생각은 하지 말고,"

"애들이 울고 있어요."

“애들을 봐서라도 침착하게 마음 굳게 먹어야 돼 알았지”

다음 대화가 채 이여지기도 전에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황급히 보호자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나 생각 하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반 열차는 대전을 지나고 있었다. 그 어느 해인가 겨울 그녀의 부름을 무시하고 칼국수를 먹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던 그 대전역 이였다. 그 한순 나 혼자의 판단과 착각으로 그녀를 행복으로 책임있게 이끌지를 못하고 잃어 버렸던 곳이 바로 대전역이다. 그런데 지금 또 다시 대전역에서 그녀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갑자기 이상한 예감이 머리를 갑자기 스치고 지나갔다. 옛 직장 동료였지만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라고 내가 부산에 가는 게 아니었는데 그 사람을 동정해서 내가 무얼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며 갈등이 터져 나왔다. 집에 있는 아내가 알면 어찌하려고. 인연에 고리를 도대체 왜 붙잡으려는지 나도 내가 잘 모르겠다며 가슴 벽에서 방망이질 하고 있었다. 아니 우리는 남남 이라는 걸 애써 부인하려 했지만 마음의 동요가 사정없이 자꾸만 내리친다. 그것이 아마 한 가닥 남아 있는 연민의 정이 아닌가 생각해 보며 잠시 눈을 지그시 감으니 그녀와 함께 했던 지나간 순간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통행금지가 풀리는 크리스마스 때 명동성당의 성모상에서 사랑을 약속했고 그 밤이 새도록 걸었던 충무로 종로길 청량리 동산다방 그녀와 함께했던 많은 시간의 추억들이 활동사진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한때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사랑이란 굴레에서 함께 했던 사랑이었는데 그 사람이 지금 힘들어 하는데 난 모른 체 하고 있다면 나쁜 사람이겠지 하며 자책도 해본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 중에 다시 전화기가 요란하게 진동을 할 때는 열차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리고 그녀는 크게 울고 있었으며 남편에 비보를 짤막하게 내게 전해 주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불혹의 47살 이였다. 서울 역 개찰구를 나오면서 부산으로 다시 내려가서 장례 일을 도와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하며 또 한 번 갈등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그녀에 대한 나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하며 대합실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서울 역 대합실 한쪽 벽에는 지금 부산으로 출발하는 열차 시간표를 알리는 자막이 반복적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러 가지 내 입장을 볼 때 가야 할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남녀의 관계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 부산에 내려간다면 그녀를 돌봐 주어야 할 마음에 짐이 더욱 무거울 것 같았다. 홀가분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서울역을 나오면서 그녀의 안부를 알려준 그녀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산에 내려가서 뒷일을 봐 주면 좋겠지만 미안하다고 그녀에게 서운하지 않게 내 입장을 섭섭하지 않게 이야기해 달라고 전했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 연민으로 그녀에게 매달릴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오늘은 마침 회사에서 중역회의가 있는 날이다.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 IMF로 부터 그간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잘 해결은 했지만 장기적으로 많은 회사들이 아직도 구조 조정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리 회사도 예외는 아니었고 요즈음 구조조정 명퇴의 굴레에서 도저히 빠질 수가 없는 위치에 내가 서 있었기에 그녀와의 인연을 여기에서 마무리 하는 게 좋을 듯 하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녀와의 인연을 접으려 하는데 마음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라고 질책하고 있었지만 매몰차게 인연을 끊으려고 하는지 어느덧 총총히 서울 역 지하철 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6.

그리고 보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의 장례를 잘 마쳤다는 그녀에게서 전화 한통을 받았다.

“나는 다 알아. 내가 부담 가서 안 왔지.”

“그런 거 아냐”

“바쁘다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 핑계라는 것도 알고 있어”

“아냐. 그날 마침 중요한 일이 있었어.”

“올라 갈 때 그런 말 하지도 안았잖아?”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있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해 줘”

“아냐~ 저번에 부산 내려왔던 거 정말 고마웠어. 감사했고”

“미숙아! 미안해”

“다 이해하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이제 연락 좀 자주 했으면 좋겠어.”

“알았어요”

“..............”

그날 전화를 받는데 어찌나 미안하고 송구한지 죄인처럼 아무 할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리고 일생을 함께하려고 했던 사람이었는데 사랑도 세월이 지나면 퇴색한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해주었다. 옹졸했던 내가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한 게 내내 한없이 미안했다. 나는 왜 바보 같은 짓을 그녀에게 여러 번하고 있을까? 스스로 명퇴를 자청해도 될 나이에 목구멍 포도청이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 핑계로 옛사랑에게 또 서운한 것을 보여 주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와의 인연은 여러번 내 주위에서 머물다 비켜간 꼴이 되고 말았다. 그토록 나를 원했던 그녀였는데 아무 것도 해주지 못 한 것이 여간 미안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녀에게 아무것도 되어 주지 못한 나 우리는 정말 인연이 아니었을까? 남편 장례식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왈칵 나를 붙잡고 갑자기 엉엉 울게 되면 큰일이자 하며 내심 걱정을 하지 않았나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왜 나는 그렇게 생각이 짧고 속이 좁을까 자책을 하면서 그녀를 처음 만날 때부터 아무 힘이 되여 주지 못 한 것 같았다.

한 여자를 사랑하고 책임진다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그 만큼의 거리에서 두려움 없는 배짱으로 사랑을 만들어 가야 했었다. 그리고 어느덧 세월은 한해를 마무리 하려는 듯 거리에는 크리스마스트리에 오색 등불이 켜지고 사람들도 분주하게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한해를 바쁘게 지낸 사람들은 송년회 일정을 수첩에 빼곡히 적어 놓기에 바쁘다. 여기저기서 송년회가 막 시작 되었다. 힘이 되어 주겠다고 내 자신이 스스로 약속을 했지만 바쁘다는 이런저런 핑계로 그녀에게 전화 하는 것을 또 잊고 말았다. 지금은 남편이 없으니까 망설임 없이 옛 연인의 사이에서 이제는 친구로서 진심으로 무엇이라도 도와주고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동료들과 송년회로 술 한 잔 들어 간 기분에 잠깐 밖으로 나와서 무심코 전화기를 열었다. 그런데 '지금 거신 번호는....." 하며 별번이라는 음성 안내가 흘러 나왔다. 맥이 탁 풀리고 술이 확 깨였다. 내가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 했던 게 못내 서운해서 일까 전화번호를 바꾼 것 같았다, 사업 부채와 병원 치료비등 많은 빗을 안고 있다고 그녀의 친구가 언제인가 지나가는 말로 내게 전 할 때 나는 귀담아 듣지를 않았다.

조금은 그녀를 도와주었어야 했는데 여전히 애써 외면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또 그녀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나는 왜 그녀에게 거리를 두고 따뜻한 마음 한번 제대로 주지 못 할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생각 따로 마음 따로 각자 행동을 내가 하고 있을까 한잔 술에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낯선 거리에서 주저앉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 마음을 내가 알 수가 없었다. 또 한 번 그녀에게 못난 사람이 되었다고 자책을 하여도 정말 이제는 소용이 없다. 그녀에게 이제는 잊혀진 사람으로 되고 말았다. 그녀의 안부를 알지 못한 채 그해 겨울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어디에 사는지 ..

어떻게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20년 만에 지난 여름 부산에서 만난 그녀의 핼쑥한 모습을 생각하면 꼭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리고 무엇이 두려워서 그녀에게 다가 서지 못 했을까 참 용기가 없다고 마음속에서 또 스스로 채찍을 하고 말았다. 내게도 가정이 있어서 일까 그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열정이 식었다는 말이 옳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서 열정이 식어서 냉정으로 변한 게 아닐까 스스로 진단 하면서 어쩌면 스스로가 내 이익을 위해서 위선자라고 생각 하는 게 옳다.

참 마음 착한 여자였는데 왜 그녀에게 불행이 다가 왔을까 여러 가지 집안 일로 마음 고생 하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잠시 스쳐가고 있다. 양쪽 얼굴에 보조개를 하고 천연스럽게 웃어 주었던 그녀였다.

간암을 앓고 있는 아버지의 병환 그리고 어린 동생들 그 당시의 내 환경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 할 것이라 생각하여 그녀를 놓아 주었는데 그녀를 오히려 불행 속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닌 가 스스로 후회를 해 본다. 그녀는 내가 할 일이 많으면 서슴지 않고 다가 와서 밤늦도록 회사에서 나를 도와주었다. 그녀는 고집이 좀 세다. 그녀는 빵을 무척 좋아 했다.

특히 보리 식빵을 무척 좋아했다. 빵을 먹을 때는 빵을 입으로 가져가는 게 아니라 조금씩 떼어서 손에서 입으로 가져가서 먹었다. 커피가 곁 들여서 빵을 음미하며 먹는다고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조 용필의 "친구"라는 노래를 무척 좋아 했다. 지금의 우리 인연을 예견하듯이 그 노래를 그렇게 즐겨 불렀는지 모른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그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친구, 그냥 우리는 친구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고 애써 변명을 해 본다.

 


7

남녀 관계란 한번의 인연에서 멀어진 사람은 누구든지 아니 만나는 게 당연한 것 같다.

나와 그녀 처음부터 인연이 아니었기에 하나로 묶지 못 하였다. 그런데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20년 만에 다시 만났지만 서로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상처만 남기고 말았다.

피천득의 '인연'에서 그가 흠모하던 여인을 30년 만에 일본에서 세 번을 만난 이야길 쓰고 있다

[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

그토록 흠모했던 여인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것을 안 피천득은 아니 만났어야 했다고. 그래서 심란한 마음을 소양강에서 풀어 보려는 심통 난 남자들에 마음을 그린 글이다.

나 또한 열정이 식어서 냉정으로 변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또 헤어짐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꼭 보고 싶은 사람 또는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나 있으며 그 일을 하지 않고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음이 허 탓해서 견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또 하나 ‘에쿠니 가오리’ 라는 일본 작가가 쓴 ‘냉정과 열정사이’ 라는 책이 있다. 책의 내용은 이러하다. 여자가 이런저런 사유로 남자의 아이를 지우게 되고 그래서 남자는 여자와 헤어진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남자는 이태리 유학을 갔는데 그곳에 예전의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이 여자에겐 자신을 사랑 해주고 또 사랑하는 남자가 이미 있었다. 그러나 남자의 용기를 내어 만나자고 편지를 쓴다.

그 여자는 편지를 받고 갈등 하다가 약속장소로 가게 되는데 이때 망서리고 있는 여자와 선뜻 손을 잡아 주지 못하고 서 있는 남자 그것은 남자는 그녀를 아직 잊지 못해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았지만 여자는 그게 아니었던 게 남자로써는 마음에 걸린 게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 바로 남자는 열정인데 여자는 냉정이란 것이다.

사랑을 되돌리고 싶어하는 남자 지난 사랑은 그냥 추억이라는 여자 누구에 생각이 옳은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사랑이란 처음 마음이 그대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세월이 지나면서 바래지고 퇴색해지는 게 어찌 보면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은 허구일지도 모른다. 즉 사랑 그 자체가 변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주관하는 사람에 마음이 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또 헤어짐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꼭 보고 싶은 사람 또는 만나야 할 사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그 일을 실행 하지 않고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음이 허텃해서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다.

그래서 인생에 대한 견해는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현실을 존중해서 착실하게 실행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기대가 현실적으로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떤 일에 대해서 버리지 못하고 미련을 갖게 하는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천상에서 부부로 연결시켜 주는 연이라는 실을 인연(因緣) 서로의 신의를 묶어주는 약 이라는 실을 약속(約束)이라고 한다. 서로가 만나서 정이 든다는 것은 상대의 마음속에 내 마음을 넣어 주는 것인데 정(情)이 떨어지면 주었던 마음을 모두 걷어 가는데 끌어내고 묶어 가는 실을 연(練)이라 한다.

그런데 이 연이라는 실이 냉정히 모두 끌어내어 묶지 못하고 흘리는 정이 있는데 이것은 연이 제대로 자기 할 일을 다 하지 못 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자신에 마음을 괴롭히는 것을 우리는 미련(未戀)이라고 한다. 그래서 찌꺼기에 정이 조금은 남아서 때때로 관심 두게 하고 때로는 마음을 흔들리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번 인연의 잘못으로 평생을 고생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인간으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면 누구나 똑 같이 빛나는 삶과 사랑 이여야 한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운명은 행복과 불행으로 갈라놓는다.

만약 불행의 시작이라면 그 운명을 순순히 받아 드리고 스스로 개척 하는 일도 사람이 해야 하는 중요한 몫이다. 여자의 행복도 무너지는 게 한 순간이다.

남편이 돈 잘 번다고 그녀가 무척 좋아 했다 했는데, 행복해야 했는데, 그 행복은 길지 않았다. 그녀의 소식은 그 후로 몇 년이 지난 뒤 그녀의 친구에게 들었다. 울산에서 보험 설계사 일을 하고 있다고 하며 누구에게도 자신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전 한다. 그래서 꼭꼭 숨어서 잠수하지 않았나 생각하며 내게 무언가를 기대려 했던 그녀가 옹졸한 내 생각을 얼마나 섭섭해 할까 두고두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나이는 이제 오십을 훌쩍 넘어서 어느덧 손자가 있다면 할머니가 될 나이이다. 혹여 만나지 못하더라도 아니, 만날 수가 없어도 보험설계 일처럼 자기의 삶도 자신 있게 설계를 하라 이르고 싶다. 이제는 좀 더 행복하기를 더 이상 불행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한 때는 사랑이란 굴레에서 서성이었던 한 사람이니까 어디에 살든지 행복을 빌어 주고 싶다. - 끝 -

 

음악을 들으려면 풀레이를 누르세요  솔새김남식



'古書 > 산문꽁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들국화_1   (0) 2016.03.12
연정(戀精)   (0) 2015.10.12
천상재회  (0) 2014.12.28
예스터데이  (0) 2014.06.12
이 여자와 그 남자  (0) 2014.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