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書/生活수필

비상금

시인김남식 2006. 12. 17. 19:09


비상금   솔새김남식


아무리 혼자 생각해 봐도 참 우스운 재밌는 일이기에 오래된 일이지만 이제는 말할 수가 있는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따스한 봄 햇볕이 내리쬐는 어느 날이었다. 마침 주방 찬장 문을 수리하기 위해서 안에 있는 그릇을 모두 꺼내기 시작했다. 아내는 볼일이 있다고 외출 나가면서 며칠 전부터 고장이 났다고 좀 고쳐 달라고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었다. 그냥 멀거니 텔레비전을 보다가 밥술이라도 얻어먹어야 하기에 틈을 내서 오늘은 찬장을 수리해 주기로 했다. 찬장은 집안에서 쓰는 그릇 등을 넣어두는 곳이다. 여하튼 문짝이 잘 열고 닫히지 않는다고 하기에 우선 찬장 안에 있는 그릇을 밖으로 꺼내야만 수리를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릇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시 후 다른 그릇을 또 꺼내려다가 그만 입이 벌어진 일이 발생하였다. 그릇과 그릇을 포개놓은 자릿속에는 무언가 잡히는데 조심스럽게 꺼내보니 거금 오십만 원이 하얀 손수건으로 쌓여 있었다. IMF 때니까 당시 오십만 원은 몇 달을 모아야 하는 큰 돈이었다. 이게 웬 떡이야 하며 깜짝 놀라서 잠시 주춤거렸다. 그러잖아도 주머니가 궁색한데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입맛을 꿀꺽 당기고는 속으로 웃으면서 이 돈을 어떻게 쓸까 궁리하였다. 공돈이니까 우선 근사한 곳에 가서 술 한잔하고 재밌는 노래방도 가야겠다고 머릿속에서는 갖가지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아니 그런 것 말고 그간 내가 사고 싶었던 기능좋은 카메라도 사야겠다는 생각도 하였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슬쩍 넣고 모른 척하면 되겠지 본 사람도 없고 감시용 카메라도 없으니 모른다고 무조건 모른다고 아무 것도 모른다고 딱 잡아떼면 그만이란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문짝을 고치면서 한참을 생각하다가는 결국 원래대로 그냥 그 자리에 놓고 말았다. 공돈을 보면 누구든지 탐내는 것은 인간의 욕심이라고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따지고보면 이사람은 참으로 한없이 착하고 착한 사람이다. 바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돈은 욕심이 있지만 아깝지만 한 푼도 건들지 않고 찬장을 고치고 원래대로 돈을 접시에 넣고 그 위에 다시 그릇을 여러개 포개 놓았다. 그게 이 집에 기둥인 남자의 순리이자 미덕이었고 착한 남편이라 생각했다. 찬장을 모두 고치고 그릇 하나하나 위치까지도 표가 나지 않도록 그대로 정리 정돈을 마쳤다. 그리고 라면을 끓여 먹고 텔레비전을 다시 보고 있으니까 아내가 볼일을 보고 오후늦게 돌아왔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찬장을 고쳤다고 말은 하지도 못했다.


혹여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언제부터인지 나를 의심하기 시작한 아내가 드디어 말 문을 열었다. 유도신문을 하는데 찬장을 언제 고쳤냐 고칠 때 그릇을 어떻게 했는지 묻고 또 묻고 하였다. 그릇 속에 뭘 놨는데 없어졌다고 하는데 바로 그 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릇도 건들지 않고 찬장을 쉽게 그냥 고쳤다고 했다. 그래도 의심하는지 여러 차례 묻고 또 묻고 그런다. 그릇 속에 있는 돈이 없어져 봐야 우리 가족 중에서 돈 주인을 빼놓고 나면 단 두 명 아들과 나 뿐이다. 나는 결단코 그 자리에 그대로 놓았기에 범인은 아니고 분명 아들이 슬쩍한 것은 확실했다. 그릇 속에 뭘 넣어 뒀냐고 여러 번 물어도 아내는 돈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돈은 보긴 보았어도 건들지 않았기에 우습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여자는 아니 마누라가 참 순진하고 착해보였다. 범인은 둘 중의 하나인데 진범이 누군지 현재 오리무중이지만 아내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마치 수사관 앞에서 조사를 받듯이 여러 번 묵고 또 물었지만 어떠한 단서도 내게서 발견 못 한 아내는 방문을 확 닫고 나가는 것이다. 돈을 내가 가져간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돈을 본 것처럼 말 할 수는 없었다. 안 가져 갔다고 모른다고 했다간 공범으로 덤터기를 쓸 모양이다. 그리고 그 후 며칠 간은 나를 의심하며 입이 삐죽 나와서 말도 하지 않고 퉁퉁거리는데 정말 그 돈이 내게 있다면 아내에게 슬쩍 주고 싶었다. 눈치를 보니 혼자 며칠 속을 썩고 있었다. 큰 돈을 눈뜨고 도둑맞았으니 분명히 누군가 건드린 것 같은데 의심은 가지만 증거는 없고 증거는 있는데 물증이 없으니 풀이 죽어서 끙끙 앓고 있었다.


아들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찬장을 고친 나를 순전히 의심하는데 거금 오십만 원을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속상하고 배가 아플까요마는 그냥 모른 체하며 또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법인을 드디어 잡았다. 바로 아들이 이실직고 하였다. 늦은 밤 집에 들어와서 라면을 끓이려고 그릇을 꺼내다가 그릇 속에 있는 돈을 발견하고 웬 돈이야 하고는  말도 없이 주머니에 넣고 라면은 끓이지도 않고 바로 줄행랑했다고 한다. 한참 돈이 궁한 놈이라 글쎄 게눈 감추듯 며칠 새 다 써버렸다고 한다. 아내는 날 의심했는데 범인이 아들이니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렇다고 경찰서에 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아주 얌체 아들이다. 급한 일로 돈이 필요할 때 쓰려고 비상금으로 준비했던 것이라 한다. 은행에 있는 돈도 필요하지만 때론 집에 얼마간의 비상금으로 현금이 있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아내이다. 그동안 남편을 의심했지 아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봄이 지나 여름이 지나고 다음 해 가을이 왔다. 그 일이 있는 후 어느 날 또다시 비슷한 그런 일이 생겼다.

아내가 외출을 나가면서 옷을 갈아입고 나갈 때 집에서 입던 바지를 벽에 걸어 놓고 나갔다. 그런데 또 그런 행운이 있었다. 오후에 밖에 좀 나가려고 벽에 걸린 잠바를 입다가 그만 아내가 벗어놓은 바지를 툭 건드렸는데 바로 뭔가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바지를 옷걸이에 다시 걸려고 하는데 허리 고무줄 틈에서 뭔가 있는 것 같았다. 즉 바지 안쪽에 있는 작은 자크 주머니가 옷핀을 이중으로 꼽아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지난번처럼 돈이 20만 원 들어 있었다. 주머니에서 돈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옷핀을 사용하였다. 참 어리석긴 하며 속으로 웃었다, 또 누굴 범인으로 지목하려고 이랬을까 생각하니 아내 마음이 착했다, 그날 온종일 그 비상금을 아들로부터 지키느라고 외출도 하지 않은 채 집에서 나가지 못하였다.


아내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은 내 돈이니까 그래서 그날도 못 본 체하였다. 그리고 저녁에 돌아온 아내에게 돈 이렇게 숨겨놓지 말고 가능한 은행을 이용하라고 했지만, 아내는 돈이 급히 필요할 때 요긴하게 사용하려면 주머니에는 항상 돈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특히 남자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어디 가서 기를 못 편다고 화장대 위에 놓고 나가는 아내이다. 아내의 비상금. 그간 정말 요긴하게 여러 번 혜택을 받았다. 돈이 없는 눈치가 보이면 어디서 났는지 슬쩍 내놓으면서 이웃집 순용이네 집에서 빌린 거라고 아내는 말한다. 그걸 믿을 내가 아니지만, 그저 고맙다고 감사를 표할 뿐이다. 돈이란 나를 위해 쓰기도 하지만 절약해서 가정에 비상금으로 슬쩍 내놓는 사람이야말로 사랑받는 일이다. 아울러 돈을 물쓰듯 쓰는게 아니라 절약해서 필요할때 요긴하게 사용하는 지혜로운 가정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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